
2012. 한 모바일 게임. 드래곤빌리지.
여행의 시작.
...
카드팩.
학습 만화.
후속작. IP의 확장.
...
그리고 다시, 드래곤 빌리지.
highbrow, Inc.의 드래곤빌리지가 아닌, 용들과 사람들이 누비는 작은 마을.
데이터 삭제, 코드 거래, 계정 판매, 치밀한 계산과 공략이 아닌
용들의 마을.
그것이 나의, 드래곤빌리지였다.
"당신은 희망의 숲으로 탐험을 떠났습니다.
숲의 으슥한 곳에서 시선이 느껴집니다."
희망의 숲을 처음 들어간 모험가에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를 스킵하지 않고 읽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오랜만에 돌아와서 게임에 들어와 보니 '자동탐험'이라는 버튼이 보였다.
그 외에도 내가 알던 그 많은 것들이, 모두 나의 소중한 추억이 하나하나 담겨있던 것들이 바뀌었다.
확실히 유저의 편의성을 고려해 개편했나보다. 월드맵 사이를 옮겨 다니는게 편하다.
설날 이벤트.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는 갖가지 패키지.
포인트 샵. 에그 샵. 멤버십. 패스.
추억을 찾아 한참을 둘러다니던 나는, 그나마 그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로 들어간다.
상점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판매하는 물품들은, 대부분 현재 '메타'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잡동사니. 아르하 젬이 있는데 방어력 +3 젬을 사려고 상점에 오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보주와 뿔이 있는데 전사의 깃털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전사의 장신구라는데. 뛰어난 주술사의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데. 고작 회피 확률 5%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소인 점술집으로 들어간다.
정해진 알 조합이 있는지도 몰랐던 그 때의 나는, 내가 가진 알들을 조합해 다른 알이 나오면 마냥 좋아했었다.
하지만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 왼쪽 상단의 네모난 박스들이다. 세 개나, 어울리지도 않는 색에, 입체감도 전혀 없는, 직사각형들이 떡하니 붙어있다.
"유저의 편의를 위해서 이 정도는, 괜찮지. 그래, 신규 유저들을 위해서라도 기능의 접근성이 떨어지면 안되지."
..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정이 떨어진 점술집을 나온다. 나온 뒤에서야 오늘의 점을 못 들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뛰어들어가지만, 나를 바라보는 것은 상업적으로 디자인된 2D 캐릭터의 공허한 눈빛, 멈춰있는 미소. 오늘은 딱히 해줄 말이 없다면서 다시 찾아오라는 말이 그 무엇보다 듣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그 때는 그것도 성의없다고 느껴졌는데, 그럼 지금의 점술집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지막 희망이 남은, 동굴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나의 용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종의 용들을, 정확히 똑같은 능력치로 갖고 있겠지만, 이 용들은 내 동굴의, 나만의 용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21렙, 0.0의 흑룡 각성. 조잡한 어둠의 공격 젬이 5개나 붙어있다. 추억이 하나, 조각을 맞추듯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어릴 때 형이랑 장난스럽게 '이렇게 하면 재밌겠지'하고 키운 용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3.3, 3.4로 자란, 레벨업을 쓰지 않고 모험으로 키운 용들. 베놈, 와일드, 오미야콘, 아르고...
아주 옛날에 가장 좋아했던 용은 아르고였다. 멋있게 생겼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때문이었다. 그 때 캡슐만이라도 나와달라고 빌었는데, 긴 시간이 흐른 지금 확인해보니 각성, 강림까지 나와있다. 마음 속 깊이 있는 어딘가의 어린 내가 미소를 짓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가장 좋아하는 용은 타아B레이다. 하하, 세상은 참 짓궂기도 하다. 타아B레가 복귀 유저에게 뿌리는 용이기 전부터 좋아했는데. 한 땀 한 땀, 내가 키우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가 "자랑스럽게" 키워낸 타아B레는 역시 성체, 3.4이다. 초라하다. 그 때도 나름 정성을 들인다고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젬인, 꿈의 젬 +25를 줬었다.
지금 동굴에는, 중간중간 돌아와서 체크했을 때 받은 복귀유저 보상으로 타아B레 초월이 세 마리나 있다. 그 중 하나는 45렙, 7.0으로 키웠다. 지금 있는 용 중 가장 세다. 게임 자체를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기에 가장 좋은 젬을 끌어다 주어도, 방어 아르하 젬 하나와 나머지는 꿈 젬 +35들이다. 강림이나 진각성은 없다.
말했듯이, 오랜 시간 함께해온 것과는 다르게 계정 자체는 '스펙'이 높지 않다. 풀초월 3마리, 풀각 2마리 정도가 전력의 전부이다. 그래도 오래는 했는가 보다. 항상 금쌍세모 세 개였던 유정등급이 어느새 동 별이 되어있다. 하지만 콜로세움에 나의 용들을 데려가면 어느 금쌍세모의 번지르르한 강림한테 진다. 아, 그러고 보니 콜로세움에도 스킵이 생겼네. 원래는 누가 회피하고, 크리티컬을 날리고, 연속으로 두 번 공격하는지 지켜보면서 하는 건데.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연승을 빨리 쌓고, 포인트를 모으려면 한 판 한 판이 오래 걸리면 안되니까. 결국은, 다 유저 편의를 위해서 생긴 거 아니겠어."
이제는 모든 곳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는 것이 재미없지는 않았다. 물론 많이 흐려지고, 찾아볼 수 없던 것들도 있었지만, 최근에 이만큼 값진 시간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때 자주 둘러보았던 드래곤빌리지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역시, 구조는 많이 바뀌었구나. 한 때는 버릇처럼 하던 출석체크를 누르자 익숙한 알림이 화면에 뜬다. 다이아 2개. 누구에겐 렙업 하나조차 살 수 없는 인게임 재화이겠지만, 나에게는 잊었던 기억의 파편 또 하나이다. 자유 게시판엔 여전히 다양한 글들이 보인다. 나도 한 때는 시세를 열심히 물어보며 거래를 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앱도, 홈페이지도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림 게시판과 소설 게시판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이런 게임은 유저들의, 팬들의 창작물도 중요하지. 그러던 중, 나도 나의 기억의 파편을, 어느 곳에 올려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추억과 감상에 빠진 장문의 글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테지만, 어쩌면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완전히 다른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어도, 드래곤빌리지라는 연결고리가 우리의 추억을 이어주지는 않을까, 하며 글을 쓰고 올린다. 하지만 옛 글의 흔적이 있는 본 계정에는 부끄러워서 올리기가 어려워, 계정을 하나 새로 만들었다.
마무리하며
나의 핸드폰에는 그동안 수많은 '키우기' 게임들이 왔다갔다. 꽤 인기 많은 장르인 만큼, 앱스토어에는 많은 '키우기' 게임들이 있다. 처음 깔고 한 두 시간을 하다보면 정말 재밌다고 느낀다. 하지만 거기까지. 조금만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세히 분석해 보면, 돈을 써서 강화하고, 강해져서 적을 잡고, 돈을 모으고, 다시 강화하고, 더 강한 적을 잡고. 이 똑같은 짓을 계속 반복한다. 깨달은 다음에는 바로 앱을 꾹 눌러 삭제해 버린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날려버리다니. 아깝다.
그러다 보니 키우는 게임 중에서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한 게임이 떠오른다.
드래곤빌리지. 용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 키우던 그 때가 생각나서, 나는 핸드폰 화면의 구석에 있는 폴더의 세 번째 장으로 넘겨서 드래곤빌리지를 켠다. 핸드폰을 바꿀 때도 가장 먼저 설치했던 앱이, SNS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드래곤빌리지였다고 하면 믿겠는가. 나는 그 정도로 진심이었나보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아닌,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이 게임에.
한 때는 이런 치기어린 약속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나중에 부자가 된다면, 그리고 드래곤빌리지가 그때까지 남아있다면, 나의 모든 재산을 써서라도 하이브로를 도와 드래곤빌리지의 과거 영광을 재건하리라. 매번 홈페이지에서 분탕질이 일어나고, GM들이 욕먹으며 유저들이 '이럴거면 섭종해라'라고 할 때마다, 나는, '제발,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때까지만 남아있어줘, 드래곤빌리지.'라고 기도했었다. 하하, 하하..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지금도 이벤트에서 가장 효율적인 배치를 찾는 다수의 유저들에게 나처럼 드래곤빌리지를 게임이 아닌 하나의 세상으로서 사랑해달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지. 나 하나만이라도 드래곤빌리지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해야 하나보다.
고마워, 드래곤빌리지. 잘 지내.
-어느 한 초창기 유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