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레온, 이그나이트, 발데마르.)
기묘한 일을 겪은 그들의 모습이 영 좋지 않다. 셀린은 바르르 떨고 있고, 메르헨 역시 마찬가지이다. 디프라이브 교수와 다비타도 표정이 굳은 가운데 침묵만이 흐른다. 클라이드와 라이츠 사이만 빼고.
"사제님, 수중동굴에 가면 뭐할 꺼에요?"
"그 놈들의 흔적을 찾아야지."
그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도 이내 침묵이 돌았다. 영웅담을 내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을 뿐이었다. 마치 살인자처럼.
"그 사람...뭐 하던 사람이었을까요, 박사님..."
"복식으로 보면 사냥꾼일거야. 그것도...중산층 출신의. 나이로 보면 가족도 있을 테고...젠장. 이러니까 꼭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 같잖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어쩌면 있었을지도...클라이드 오빠의 판단이 너무 조급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클라이드가 입을 다시 열었다.
"앞으로 이런 꼴 많이 보게 될꺼야. 그리고 그렇게 안했으면, 다 다치고 뭐하고 난리도 아니었을껄. 여기서 시간을 더럽게 끌게 될 수도 있었다고. 그랬다간 그것들이 너희가 말하는 신성한 엘피스를 뒤엎어 버릴꺼야."
"그렇긴 해요. 하지만..."
셀린의 가녀린 목소리는 클라이드에게 닿지 못했다.
"우리는 앞을 막는 건 가차없이 부숴야 하고 거기엔 어떤 다정해빠진 말도 필요 없어. 알아들어?"
너무나도 차갑지만 이치에 맞는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저것이 정말 영웅이 가져야 하는 태도인지, 아니면 그저 살인자의 그것인지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침묵속에 걷던 가운데에 다비타가 갑자기 멈춰서서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본다. 디프라이브 교수가 이유를 묻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쪽 구석을 가리킨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임에도 그녀는 그곳을 가리키며 떨고 있었다.
"왜 그러나?"
"박사님. 저 사람들...안보여요?"
"뭐가 보인다는 건지 난 모르겠네만. 숲일 뿐이지 않은가?"
"으...으아아아악! 귀신인가 봐. 난 몰라! 으아아아-"
그가 자신의 노트북을 켜고 스카우터를 장착한다. 자각자각 하는 소리가 몇번 난 뒤 그가 다시 다비타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는 움찔한다.
"시야에 다량의 마나가 잡히긴 하는구만... 그런데 저건 대체...? 어두운 마나라니."
"맞죠! 뭐가 있죠! 사람이라니까요?"
"사람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고... 어두운 마나 덩어리이긴 하지만 적의는 없는 듯 하네. 모여있을 뿐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
그가 다시 노트북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다비타가 다시 소리질렀다.
"또 왜 그래?"
"다가오고 있다구요! 엄청 빨리!"
"뭐?"
그리고 정말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사람 대여섯명 정도와, 그 사이에서 후드를 뒤집어 써서 눈을 가린 채 길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 인사랍시고 흔들어보이는, 특이한 형상의 팔찌 아래로 뼈가 다 드러나보이도록 말라비틀어진 사내와 그의 뒤로 착지하는, 뿔과 갈기 형상이 조금 별난 레드 와이번.
그의 로브를 보고 디프라이브가 맨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저 로브...유타칸 왕립 마법대학 로브인데?"
"지인이 그쪽에 연이 있거든, 위선자 양반. 그러고보니 우리 구면이지?"
"뭐? 저런 사람을 본 적이..."
말라비틀어진 사내의, 여기저기 기워놓았긴 하지만 분명 유타칸 마법대학의 복식 중 하나인 짙은 보랏빛 후드를 입은, 아니. 낡을대로 낡은 마법대학 후드를 '뒤집어 썼다' 라거나, 그가 후드 안에 들어가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아떨어지는 그를 보고 디프라이브는 제 기억을 되짚ㅇ고 셀린은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다. 잔뜩 마른 얼굴이나 체형하며, 저 특이한 복식.
그 때 광장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나를 셀린 이메레스라고 불렀던 사람...!"
"너도 저 사람 알아? 셀린? 그러고보니까, 저 사람이 빈민가 3남매 데리고 가던데."
"네놈들 덕분에 가정이 파괴된, 가엾은 어린 아이들이지. 어머니도 그랬고, 아버지도, 맏딸도.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그 어린 막내 아들까지...!"
그의 일갈이 분노에 차있는 듯 가볍게 떨렸다. 메르헨은 아직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디서 그를 봤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해내기 위해서. 생각하던 그가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날의 기억 속에서 발견한 그의 얼굴을, 그의 누더기 로브를 그가 떠올려낸다.
"당신... 불이 난 날, 우리 집 앞에 있던...?"
"빙고."
"그럼...불을 낸건 혹시 당신이야?"
"...하! 내가 그랬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단순한 사고방식이네. 마치 누구같이 말이야."
정색과 비웃음이 섞인 모습이 마치 하나의 차갑고 비인간적인 예술작품 같았다.
"그런데 웃기는건 말이야, 그게 또 맞아. 나야. 너까지 싸그리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말이야. 쥐죽은듯 쳐자고 있었으면 어디 덧나? 아니면 최소한, 폐인이라도 되어주길 바랬는데. 으음...안타깝기도 하지."
메르헨이 충격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바르르 떨고 있을 때 셀린이 그를 대신해 질문을 이어나간다.
"왜...왜 하필 메르헨 오빠였죠? 왜였냔 말이에요!"
"..."
그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가라앉는다.
이유.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가족과, 어머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던 파르신의 말을 듣고 질투가 나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목적 달성을 위한 순간의 광기였을까.
그의 옆을 줄곧 지키고 있던 레드 와이번이 그르릉거린다. 마치 그 입 다물으라는 듯이. 그 눈빛은 그들이 아는 흔한 용들의 눈빛과는 상당히 달랐다. 짐승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마치...인간처럼.
세월이, 감정이, 기억이 깃든 깊은 눈을 한 용은 그들을 향해 계속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그들에게 '시덥잖은 말을 할 바엔 닥쳐.'라고 말하는 듯 들렸다. 으르렁거림은 갈수록 거칠어져갔다.
그러나, 셀린이 그 용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 용이 위협을 뚝 그쳤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날개 중간즈음에 있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적는다.
글자는 악필이었지만 꽤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나 셀린 알아 셀린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낸거 같네 다행이야'
"...용이 글자도 쓸 줄 알아?"
'이상해'
"응...? 아, 이상하냐니, 당연하지. 용은 원래 사람 글자 쓸 줄 모르잖아. 배웠으면 모를까. 그것도 몇년은 배워야 한다는데, 요즘 키우는 용들은 금방 승천당하니까."
그러자 레드와이번은 글자 쓰기를 그만두었다. 모두가 그의 주변을 둘러싼 검은 사람들 때문에 공격하길 주저하고 있을 무렵, 충격에 잠시 빠져있던 메르헨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너...! 죽여버릴꺼야!!!!"
"그르르르...! 크아아아!"
그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침묵을 유지하는 주인을 대신해 레드와이번이 포효했다. 메르헨이 그에게 달려들려 하는 것을 셀린과 클라이드가 간신히 막아서 저지한다.
"그만, 그만해요! 저 검은 사람들을 이길 방법이 없잖아요!"
"띨띨아, 너도 세상 하직하고 싶냐? 진정부터 해!"
"하지만 저 자식이...!"
"셀린 말 좀 들어라! 답답한 띨띨이 자식아! 흔해빠진 엘피스 아침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것 마냥 뺨이라도 한대 맞아야 정신 차릴래?"
"하, 재밌네. 날 죽여보시겠다? 아직도 영웅놀음에 빠져있는, 동심 속에서 살고 있는 멍청이 주제에?"
그의 예리한 말이 쇄도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없는게 뭔지 알아? 바로 완전한 빛, 궁극의 선, 절대적 정의야. 용사님. 그따위 게 있다고 믿는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떠벌거리면서 영웅행세 하고 있을 동안에 차라리 네 가족이나 챙기지 그래?"
그 말을 마친 뒤, 그가 차가운 미소를, 동심을 잔뜩 비꼬고 비웃는 현실의 모습을 다시 보인다.
"...아아, 챙길 가족이 없지, 이젠. 네가 잠이나 자면서 정의 꿈을 꾸는 동안 너희 가족은 숯덩어리가 됐지. 미안. 잠깐 까먹었네."
"닥쳐! 그건 네가 꾸민 계교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리고 너희들, 검은 로브가 그동안 한 일! 그건 정의란 말이야? 마을을 부수고 사람을 죽이는게 정의라면 난 인정 못해! 정의라는 건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게 정상이잖아!"
현실의 냉혹한 말이 동심에게 쇄도했다.
"그럼 이단자들은?"
이단자들. 그는 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정의, 그 근간이 되는 자신의 국가, 엘피스에 반했고 그래서 쫒겨났으리라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마치 광장의 우민°처럼.
(우민 : 어리석은 민중. 이게 모여서 민주주의 한답시고 나대면 중우정치라고 하는, 선지자 내지는 지도자격인 누군가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고 물타기만 더럽게 해대는 끔찍한 정치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신성왕국 엘피스가 된다는...당신 누구야! 읍읍!)
"그들도 가족이 있었어. 개중에는 제카리아스나 발데마르처럼 이단질당해서 자기만 빼고 가족들이 다 몰살된 사람도 있어. 그들은 어쩔꺼지? 네가 관철하는 정의에 심장을 꿰뚫리고 베인 그들을 너는 사람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거야? 네 정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야 하지. 너한테 도움이 되고 동조하는 사람들만."
메르헨은, 동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해서 정의라면, 우리도 정의야. 낙인이 찍힌 이단자들을 감싸고 네 정의가 만든 상처들을 치료해주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네 이기적인 정의를 뒤엎으려는 정의. 그게 우리의 목적이고 행동 이유야. 물론 목표를 이루려면 약간의 희생과 폭력이 따르지. 친절한 말에 총을 더하면 말만 할 때보다 많은 것을 얻는 법이거든. 건물이나 사람을 부수는 게 그런 경우지. 넌 날 이해하리라 믿어. 셀린."
제카리아스, 발데마르. 둘 모두 이단으로 밝혀져 가족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그들은 낙인을 찍은 뒤 본보기로 감옥에 영구 수감되었다고 전해지는 인물들이었다. 제카리아스는 운명의 사제 다이즈, 잠의 사제 샌즈 등 본래 인간이라고 여겨지는 데르사가 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죄.
블라디미르는 검은 로브들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알려진, 드래곤 교배를 시도한 죄...그가 셀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의 표정에 슬픔이 살짝 묻어났다가는 금세 지워진다.
"건물이나 사람을 부수는게 정의 실현의 방법이라고? 동의 못해! 그렇게 해서 만든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야! 거기다가...그 더러운 이단들이 네놈 편에 있다면 더더욱! 지지따윈 받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더러운 이단이라는 소리 집어치워! 더러운 아모르의 하수인 자식!"
검은 사내 중 한명이, 중후하지만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리친 자가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치웠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 한, 평범한 중년의 모습. 바람에 하얀 머리카락이 날려서 보여진 이마 위엔 H자의 낙인이 선명하다. 이마 위는 대개 사형급의 죄를 지은 이들에게 낙인을 새기는 장소. 그의 붉은 눈은 피를 머금고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저 고대 기술 연구였을 뿐이야. 그 결과를 만들어내 발표하려 했고. 20년 전부터 찾은 어느 문헌에도 그 기술을 검은 로브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어! 그저 너희들은 그 결과물들이 두려운 거야."
"결과물...?"
"그렇고 말고. 그 기술은 너희들의 신을 이용해서 어둠의 마신까지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니까! 그래서 그 기술을 알고 있지도 않은, 우리 가족을 몰살하고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같은 꼴로 만들려 했겠지."
"웃기지 마! 분명히 책에는 그게 검은 로브가, 마신을 깨울 육체를 만들기 위해 만든 기술이라고 적혀있었어!"
"책 뒤를 모르는 바보같은 녀석...선지자님, 장벽을 칠까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듯 보입니다. 무력을 써야 할지도요. 저 아가씨도 그다지 대화는 꺼리는 듯 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모든 검은 남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뒤, 레드와이번이 불을 확 뿜자 기름을 타고 타오르는 불이 그들 주변을 덮었다. 말라비틀어진 남자가 휘파람을 휘익 불자 레드와이번이 그의 앞에 섰고 그가 등 뒤에 올라타자 빠르게 하늘로 올라 그 주변을 선회한다. 불 가운데에는 무력하게 바르르 떨고 있는 메르헨과 그를 데리고 어떻게든 나가보려는 셀린밖에 없었다.
"이그나이트! 잡아!"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레드와이번, 이그나이트가 셀린을 휙 낚아챘다. 셀린이 꼭 안고 있는 크노첸도 함께. 불 가운데에 둘러싸이자 그 때의 악몽이 다시 생각난 메르헨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레넬이 그의 옷을 입으로 물고는 그를 들어올려 불 밖으로 빼낸다.
불이 조금 붙은 메르헨이 새된 비명을 지르자 클라이드가 임시방편으로 성수라도 뿌렸고, 성수 덕에 불이 꺼졌음에도 메르헨의 호흡은 거칠었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제사 디프라이브 교수는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자각했다.
"셀린이었나, 목적은!"
"수중동굴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저걸 어떻게 잡아! 망할!"
클라이드가 들고 있던 메이스를 집어던졌다. 다비타가 가서 도로 주워왔지만 그는 그것을 도로 받지 않았다.
◆
셀린을 잡아들인 곳은 수중동굴 안쪽이었다. 입구와는 멀리 떨어진 곳, 과거의 검은 로브가 실험을 했던 곳. 그에 걸맞게 그 안에는 우리와 같은 쇠창살들이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셀린의 모습이 애처롭다. 레드 와이번, 이그나이트가 바닥을 걸어서 다가오고는 바닥에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나 이름 이그나이트'
"이그나이트...?"
'셀린 목소리 여전해 듣기 좋아'
"날 알고 있어요?"
작은 의구심이 그녀를 용에게로 이끌었다. 그 의구심에 답하듯, 용은 고개를 끄덕이곤 글씨를 써내려갔다..
'당연히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까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
'아델 뱃속에 있을 적 셀린 뱃속에 있을 적 다 알고있어 아델 아빠랑 셀린 엄마랑 만나던 날 알고 있어 전설의 테이머 대검 들고 노력하던 거 어릴 때 봤어 알고있어 그 사람 뭐였는지 어땠는지 듣고 봤어'
전설의 테이머를 만난 용. 유타칸에 알려지면 난리가 날 사안이었다. 거기다가 그 말은, 이 용이 사실 굉장히 오래 살았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나 나이 많아 셀린보다 아델보다 사제보다 간호사보다 많아 디프라이브보다 10살 정도 적어'
"그럼...전 예전에 어떻게 지냈어요?"
'셀린 행복하게 지냈어 우리 집에서 밥 먹었어 잠 잤어 책 봤어 가끔 뒷문으로 나가서 희망의 숲 놀이터에서 아델이랑 놀았어 나 같이 놀았어 즐거웠어'
"즐거웠다구요?"
'응 그때 즐거웠어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못 해 슬퍼 뒷문 엔타르 막았어 문 밖 못 나가게 못질했어 망치 소리 아직 생생해 쾅 쾅 꼭 인간들 사형선고하는 망치소리 같았어 쾅 쾅 쾅 소리 가슴 두드렸어 슬펐어'
"희망의 숲...?"
그가 써내려간 시적인 표현 밑에서부터, 흐릿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셀린 내 옛 주인 엔타르 돌 줬어 셀린 나 닮았어 말했어 엔타르 헤로디아한테 오르골 줬어 소리 예뻤어'
"오르골..."
'그날 밤 헤로디아 자던 셀린 데리고 뒷문으로 나갔어 나 헤로디아 쫓아갔는데 못 잡았어 화났어 슬펐어'
그녀가 제 엄마의 오르골을 떠올렸다. 엄마가 아낀다는 오르골이 혹시나...
'낮에 준 선물 둘 다 마지막 선물 됐어 슬펐어 엔타르 조용히 울었어 아델 많이 울었어 엄마 갔댔어 셀린하고 갔댔어 헤로디아 가버렸어 셀린하고 가버렸어 나 많이 화났어 슬펐어'
"왜요...?"
'내가 못잡아서 배너티 공작한테 헤로디아 갔으니까 슬퍼 헤로디아 내가 못 잡아서 도망갔어 마차 타고 다그닥 다그닥 아직 소리 생생히 남아있어 지옥 가는 넓은 길로 가는 거 같이 쌩쌩 달려갔어 그대로 배너티 공작 돈한테 자기 몸 팔아버렸어 배너티 공작 장신구 하러 갔어'
장신구. 지금의 자신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제 아버지, 배너티 공작의 장신구, 허울을 위한 존재.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셀린의 마음이 제 이성에게 질문했다.
'헤로디아 몰라도 셀린 잘못 없는데 나 셀린 남 장신구 되는거 싫은데 셀린 그런 탐욕덩어리 인간 장신구 하기에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는데 셀린 데려갔어 너무너무 슬펐어 나 아델 엔타르 다 울었어 다들 그 날 슬펐어 초상집 같았어 눈물바다였어 우는소리 너무 슬펐어'
글자를 쓰는 이그나이트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눈에 슬픔이 깃들어 눈물이 떨어질듯 하다. 셀린이 그것이 자신이 요새 가끔 기억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임을 알아채는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헤로디아...그것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엔타르...익숙한 이름이었다. 누구의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셀린 여기 아델 곁에 왔어 기뻐'
"단순히 제가 보고싶어서 데려온 거였어요? 그 냉혈한...인 사람이?"
'냉혈한'이라는 한 마디의 파장에 반응한 아델이 움찔 하는 느낌과 함께 셀린에게 고개를 돌렸고, 용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셀린 아델 몰라 나 슬퍼 아델 많이 슬퍼 나 많이 슬퍼 마음 아파 괴로워 아델 슬퍼 마음 많이 아파 괴로워 힘들어'
"단지...보고싶어서..."
'아델 전에 술 많이 마셨어 취했어 울었어'
"..."
'셀린 아델 기억 못해 나 기억 못해 나 슬퍼 가슴 아파 셀린 미워'
"미우면 왜 대화하는 거에요...?"
'아델 너 좋아해 아직도 기억해'
"아델..."
아련한 그리움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제발 아델 너 기다려 돌아와 엔타르 같이 기다려 우리집 있어 너 계속 기다려'
그의 글이 서서히 급박해진다.
'계속 너 보고 있어 너 없는데 집에 없는데 엔타르 너 집에서 계속 봐 너 없는데 아무데도 없는데 나 무서워 엔타르 어떻게 될까봐 제발 셀린 빨리 기억해 돌아와 줘 엔타르 살려줘 저러다 죽을 거 같아 도와줘 부탁이야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나 엔타르 죽는거 싫어 너 그렇잖아'
"그, 그렇지만."
셀린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것도 같았다. 우는 상이었을 뿐인 얼굴에 주름이 잡히자 당장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 되었다. 이그나이트의 표정에도 푸른 슬픔이 짙어진다.
'엔타르 죽는거 싫잖아 제발 알아줘 떠올려줘 엔타르 이름 불러줘 엔타르 손 잡아줘 품에 안겨줘 나 빌께 제발 제발 제발 엔타르 구원해줘 너 할 수 있어 제발 부탁해 너 필요해 우리 배너티하고 달라 널 진심으로 좋아해 우리집에서 셀린 장신구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와줘'
"아무리 그래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구요."
충격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의 이그나이트. 용의 감정이 저리도 풍부했던가. 셀린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주인의 의지만 따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왜 셀린 우리 몰라'
"기억이 없어요. 미안해요."
'셀린 미워 싫어 바보야 왜 몰라 너무 미워'
글이 점점 난폭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거칠게 써내려가는 원망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인간 잊기 잘해 셀린 돈 파묻혀서 자신 잊었어 셀린 똑같아 헤로디아 똑같아 엘피스 사람 다 똑같아 탐욕스러워 안락한 생활 받았는데 배부른데 만족하지 않아 끝없이 원해 또 원해 벗어나기 싫어해 그 탐욕이 너---'
'너무 미워'까지는 정갈한 글씨였고, '탐욕이 너'까지는 그래도 알아볼 만 했으나 그 뒤의 글자는 완전히 휘갈겨 써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이그나이트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용이 등을 돌리고는 아델에게로 향한다. 아델이 이그나이트의 슬픈 눈을 보고는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달랬다.
"셀린은 우릴 기억 못한다니까...왜 그랬어. 너만 힘들게."
"크르륵...그릉..."
"너만의 이유가 있었겠지..."
"키이익-"
"울지 말고. 그래. 착하지..."
그 모습을 보고, 셀린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저 용의 자리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실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거의 잔재에 따르면, 저 사람은 그녀의 오빠니까. 오빠라면, 정말 오빠라면 그렇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델레온님."
"전엔 선지자라고 부르더니 왜, 블리더?"
"일단 여기에는 저 포로 여자애하고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그래서...저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둘 밖에 없을 때는."
"마음대로 해. 용건이 뭐야?"
"그들이 수중동굴로 오고 있다는 정보입니다만. 비상 통로는 확보되어 있고 하니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추적자도 대기중입니다."
아델이 가만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셀린의 장갑을 그에게 넘긴다. 뭐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은 그가 장갑을 가져가고는 몇분 정도 후에 다시 가져온다. 그러고는 상자 안에 자물쇠를 채워서 넣고는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이그나이트가 그륵거리자 아델이 그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살거린다.
"걱정 마. 강화도 약화도 아니니까. 그냥,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끌어내주려는 것 뿐이야. 나 믿지? 어릴 때 부터 그랬잖아. 나는 항상 너한테 거짓말 안하는거."
"그릉..."
아델레온. 그 남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 셀린의 머리를 고통이 다시 엄습했다. 전보다 더 심한 고통이. 그녀가 머리를 감싸쥔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누군가 들을세라 꾹 눌러담았다.
◇
수중동굴 안으로 셀린을 찾기 위해 들어선 그들이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앞장서서 가던 테오도르가 매서운 눈으로 함정이 있는지 살핀다. 그가 함정 하나를 발견하고는, 다들 물러서라는 신호를 주고 그것을 작동시킨다. 함정을 작동시키자 날아오는 것은 화살이었다. 테오도르가 얼굴 앞에 방패를 세우고 화살들을 막아낸다. 함정이 멈추자, 테오도르가 그들을 향해 뒤돌아선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아...어. 고맙다."
그 순간, 시간차 공격인지 어쨌는지 뒤에서 화살 하나가 슝 하고 날아왔다. 클라이드가 그것을 보고 신호를 주기도 전에 그 화살이 날아와 투구 왼편을 맞고는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 화살은 힘을 잃고 톡 떨어져 그의 발 아래에 떨어진다.
그런데 화살을 주운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얼굴에 따뜻한게 조금 흐르는 것을 알아채고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쓱 쓸자 묻어나는 피로 자신이 상처입었음을 알아챘다.
"아, 뭐에 베였나 보네요."
"화살촉이 니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고! 몰랐어?"
"그랬나요? 아무튼 어서 가죠."
"상처를 치료하고 가야될거 아니야. 이 띨띨아!"
"아, 그럼 부탁합니다-"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 클라이드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중얼거린다.
"참내. 판타스틱한 조합이네. 일단 출신이 구린 사제인 나는 그렇다 치고, 검은 마나 보는 간호사 여자에, 몬스터가 좋아하는 귀족가 자제에, 고아에, 마법공학대학 박사에다가, 빈민가 출신 성십자단 도둑 꼬맹이에, 그것도 모자라서 무통증인 방패병 녀석까지..."
"예?"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냐고. 오파츠 하나 잘못 찾았다가 이꼴이냐. 에휴..."
그 자신도, 오파츠 하나를 잘못 찾았다고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파츠를 찾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이었을지 모른다. 내쉬는 한숨에는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섞여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이그나이트는 문장부호와 기초적인 보조사 일부, 그러니까 은/는/이/가 를 쓰는법을 모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는 아는데 그걸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그리고/그래서/그런데/그러나 등등도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를 몰라서 다 안씁니다. 근데 ~한데/~하고 는 잘 씁니다(...).
그래서 글쓰면 애 머리가 어째 영 하자같습니다. 근데 설정 상 35세로 전설의 드래곤 테이머를 어린 엔타르와 함께 대면한 적이 있고, 세계관에 나오는 용들 중 현실에서 먹은 나이가 가장 많고 현실에 대해 아는 것도 용들 중 원탑으로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