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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검은 혁명 - 6. Memory from Death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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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219
  • 작성일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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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혈한.)

셀린이 앉은 철창에서 멀리 떨어진 채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인 이그나이트에게, 라세다르가 다가왔다. 사일과 함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그나이트. 묻고 싶은게 있어요."

그러자, 그녀의 마음 속으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꽤나 나이가 있는 듯 들리는 목소리. 이그나이트의 그것임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니? 라세다르."
"당신, 어떻게 글씨를 쓸 줄 아는 거에요? 사일이 알려주더라고요. 자기도 가르쳐 달라면서."
"하하. 꼬마야. 재밌는 걸 묻는구나. 어떻게 아냐니. 배워서 아는 것 뿐이지. 배우는데 5년이나 걸렸다구. 그래봤자 아직 악필이지만."
"당신은 대체 몇살이나 먹었길래 저한테 꼬마라고 하는거에요?"
"나? 옛 주인 엔타르가 알에서 날 깨웠을 때, 그는 열 살이었어. 그러니까, 나는 서른 다섯 살. 나는 유타칸에서 이뤄진 일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보아왔고, 검은 로브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하무트의 과거도, 칼라이아 그녀의 과거도."
"굉장하네요."
"사실 여기 있는 사일이라는 녀석도, 내게는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칼라이아도, 네 누나도, 파르신도 말이지. 열살이나 어린 녀석들이야. 모두."

그가 피식 웃는다. 사일이 자신을 꼬마라고 부른 것에 대해 화가 났는지 그르릉거리자 라세다르가 그를 제지한다.

"꼬마라고 했겠다...!"
"사일, 안돼. 정말로 나이가 많은 거잖아. 요즘 용 치고는."
"나도 용 치고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 안해봤어? 열 둘이면 말이야!"
"그래도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용이야. 말 조심해."
"하하. 그냥 둬.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대잖아. 나도 그 때엔 저렇게 다녔었지. 이빨도 지금보다 날카롭고, 발톱도. 지금은 많이 죽었어. 사실 가끔은, 옛날이 그리워지곤 한다니까."
"셀린은 좀 어때요?"

이그나이트에게서 슬픔이 느껴지는 것을 라세다르가 알아챘다. 그녀의 목소리도 덩달아 슬픔이 깃들었다.

"모르나봐요...?"
"우릴 완전히 잊은 모양이야. 이럴 때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새삼 깨닫곤 해. 부...그것이 가진 달콤하고 환상적인 맛을 한번 보고 나면 빈곤의 시절은 다 잊어버리고 계속 그 맛을 탐닉하게 되지. 탐욕이 자신을 아작아작 갉아먹어, 언젠가 완전히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잊은 채."

이그나이트의 슬픔만큼, 목소리도 무거워진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란다, 라세다르.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존재하기에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만. 그러니 너는, 너만은 그렇지 않은 부류에 속하길 바란다. 이 말을 꼭 기억해. 과한 탐욕은 너를 아작아작 갉아먹어, 언젠간 너를 사라지게 한다는 걸."
"..."

이그나이트가 꽤나 진중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둘, 아니 셋 사이의 대화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사일이 다시 말을 꺼내며 대화가 다시 재개되었다.

"그래...아저씨라 그런가 그런 재미없는 소리만 하네."
"아저씨라니. 그런 말 마. 한참 옛날...그러니까 용들이 한차례 멸종되기 전이었으면 난 꽤 어린 축에 들어간다고. 그 당시의 용은 백 살은 거뜬히 넘겼다고들 하니까."
"그건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고."
"하하...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오래된 시간도 아니야."
"지겨운 이야기는 그만 두자고, 더듬이 아저씨."

사일이 이그나이트의 갈기 위에 톡 삐져나온, 가느다란 털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세다르가 더듬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그나이트가 고개를 숙여 제 '더듬이'를 그녀의 손에 닿게 한다. 더듬이처럼 생긴 털은 아래쪽이 고무줄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라세다르가 더듬이를 손으로 더듬어 갈기에까지 닿자 고개를 도로 올린 그가 사일에게 다시 한마디 한다.

"아저씨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언제까지고 젊게 남고 싶은 것이 모든 생물들의 마음이라고."
"아무튼 간에, 그 더듬이는 뭐야?"
"셀린이 만들어 준 거야. 이러면 귀엽다나. 프흐흐. 어린 마음에 그랬겠지."
"그녀는 지금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해봤자 무의미한 일 아닌가요?"

라셰다르의 의구심이 섞인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걸 보고 날 기억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건 인간들이 우상을 만드는 거랑 비슷해. 셀린은 날 잊었지만, 난 셀린을 잊지 않기 위함이야. 어찌 보면...이것도 그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 뿐이겠지만 말이야."
"과거의 망령이라...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셀린이 싫지 않아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많이 슬프고 괴로워. 아델은 더하겠지. 엔타르와 우릴 버리고 간 헤로디아 그 년 외에 유일한, 자신이 애정을 느꼈던 사람이니까..."
"헤로디아는...?"
"엔타르의 전 부인 이름이야. 아델과 셀린의 어머니이자... 셀린을 데리고 나간 장본인. 아델은 왜 데리고 가지 않았나 모르겠어. 그저 그 망할 년이 믿던 미신과는 다른 이유가 있을꺼야."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금 의구심이 피었다. 미신, 사람들이 가끔 믿곤 하는 그것. 그녀의 언니도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꼭 품에 자기 사진을 넣어놓곤 했다. 그런 것 처럼, 헤로디아라는 여인이 그를 데리고 가지 않은 비논리적인 이유가 있는것일까?

"미신?"
"푸른 눈의 남자 아이는, 재앙을 가져온다는... 푸흐흐. 제가 눈구멍에 끼워넣고 다니는, 검은 마나가 잔뜩 낀 시퍼런 눈이 더 저주스럽다는 건 잊은 모양이지."
"당신에게서 적의...아니 살의가 느껴져요."
"죽인다니. 내가 그 정도로 끝낼 만큼 자비로운 용으로 보이나?"

그의 살의가 한층 더 강해졌다. 아니 적의와 살의가 섞여서 괴물같은 무언가로 느껴진다는 것이 더 정상적이리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이전의 인자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조금씩 조금씩...하지만 괴롭게 하며 죽여야지. 가엾은 엔타르를 버려서 그 지경까지 만든 댓가로,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다음, 머리 아래를 갈기갈기 찢을꺼야. 그리고 머리를 잘라서 보여줘야지. 제 죄의 댓가를."
"그, 그럴 생각이에요? 정말로...?"
"물론, 그 전에 고통에 잠겨 죽으면 할 말 없지만 말이야."

그의 말은 보통의 인간, 아니 보통의 용 조차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 일을 실행할 용이나 인간이 있을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적의와 살의를 불태우는 용이라면 가능할 듯 보였다. 그녀의 느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Chapter 6. Memory from Death

"야. 빅터."
"..."

발데마르를 마주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말이 없다. 양 눈이 모두 파내지고 양 손이 모두 잘린, 끔찍한 몰골의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만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 편한 모습이다. 텅 빈 눈구멍을 간신히 가려놓는 눈꺼풀이 깜빡인다. 마치 눈이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나 오늘 바깥에서 용사놈들 만났다?"
"용사?"
"그래. 자기들이 신성해빠진 왕국 엘피스의 용사라고 나대는 놈들 말이야."
"엘피스. 그 망할..."

그는 이 곳에 들어왔을 때 부터, 제대로 들리지 않는 기이한 목소리로 짧은 말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목 중간에는 흉터가 크게 남아있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기이하다. 마치 유령의 그것처럼.

"맞아. 디프라이브 교수도 만났어."
"디프라이브...디브라이브...!"

그가 갑자기 분노한 듯 소리치며 자기 앞에 있는 책상을, 위에 손목이 붙어있었을 잘려나간 부분으로 내리친다. 몇번이고 계속, 살이 터져 피가 흐를 때 까지.

"디프라이브! 아아아악!"
"빅터, 진정해! 진정하라고!"
"콜록...콜록..."

발데마르가 힘겹게 그를 붙들었다. 그대로 놔두면 기계 이식마저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에. 간신히 빅터를 진정시킨 그가 그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빅터는 격하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일까.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다. 물 한잔에 약을 타서 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안에서 다비타도 만났다고. 사람 말을 좀 차분하게 들어 봐."
"다비타...다비타?"

다비타. 그 말에 그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본 발데마르가 계속 조잘거리기 시작한다.

"그래. 유타칸 왕립대학 간호사 다비타 말이야. 그 사람들을 치료해주려고 따라 나온것 같은데. 아닐수도 있지만 말이야."
"왜 그들을? 어째서 따라다니는...콜록, 콜록."

피폐한 정신과 다친 목으로 꺼낼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기침이 이어진다. 긴 말은 그의 목을 혹사시키는 듯 그의 기침이 심해지자 발데마르가 물을 한 컵 가져온다.

"한번 만나러 가 볼테야? 조금 위험하긴 할텐데 말이지."
"응. 가볼래."
"그런데, 다비타가 겁먹으면 어쩌지?"
"다비타..."

다비타. 그 단어에 그는 집착하고 있었다. V&D라고 쓰인 반지가 서랍장 위에 놓여있다. 발데마르가 반지를 집어다 주자 그가 팔의 뭉뚝한 부분으로 그 반지를 살살 더듬는다. 텅 빈 눈의 자리는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는지 반지가 있는 방향만을 바라본다. 서랍장 위, 반지가 놓여있던 자리 뒤에는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에서, 바다처럼 깊은 푸른빛 눈의 그가 다비타와 함께 밝게 웃고 있다. 너무나 밝게. 그의 검은 머리가 가리고 있는 눈구멍은 그 바다빛 광채를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눈을 감는다. H자의 낙인이 오른쪽 눈에 새겨져 있다. 아마 그 때, 바다빛 광채도 함께 불타 없어졌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다비타...다비타아아...!"
"뚝. 울지 말고. 다비타도 널 기다리고 있을꺼야. 분명히. 그러니까, 오랜만에 외출 준비나 할까?"

발데마르가 그를 끌어안는 모습에는 어떤 판단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를 걱정하는 것, 그리고 감싸안아 달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당위성도 없는, 그런 행위는 그에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반지를 실에 꿰어 목에 걸어주었다.


수중동굴 안 공기는 늘 그렇듯 습기가 가득이다. 가끔 뭔가를 주워 가방 안에 우겨넣고는 쪼르르 다시 달려오는 라이츠를 빼고는, 모두 한 목적으로만 움직였다. 셀린을 찾는 것.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츠의 뱃속에서 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입을 다물고 있다. 라이츠가 가방에서 뭘 꺼내서는 바스락바스락 집어먹는다. 클라이드가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홱 돌렸다. 그가 입에 문 것은 드블랑 다리였다.

"야. 니가 용이냐? 그건 크노첸 꺼잖아."
"스즈늠...브그픈글 으뜨크르그으...그리고 생각보다 맛있다구요, 이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집어먹어 봤길래 그러는 거야?"
"아빠가 가끔 가져와요."
"아빠 직업이 뭔데?"

그 질문에 이어지는 대답은, 그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대답, 그러니까 상점 주인 내지는 종업원, 혹은 도매상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떨어진 대답이었다.

"노상강도."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집안 식구가 없어?"
"아니요- 엄마는 술집 다니구, 형아는 소매치기, 누나는 꽃뱀, 할아버지는 전직 빈집털이, "
"그게 정상이냐?"
"아니에요?"

참 골때리는 녀석다운 골때리는 대답이었다. 그 와중에도 먹던 드블랑 다리를 놓지 않고 다시 입에 넣는 모습에 클라이드가 미간을 짚는다. 뭐하러 이런 골때리는 녀석을 고용했는지. 그 당시의 그를 저주하고만 싶은 클라이드였다. 그 다리 하나를 다 먹고도 배가 고픈지, 수목신의 묘지에서 주운 다르스 조각을 또 입에 우겨넣는 라이츠.

"야. 이거 완전히 잡식성이네."
"냠...왜요-?"
"아니야. 가자."

한숨을 푹 내쉬자 때맞춰 땅이 갑자기 울린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그들이 혹 동굴이 무너지지 않는가 조심스레 살폈지만 그런 낌새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나선다. 몇가지 함정이 있었지만 거의 기초적인, 사람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분을 건드리면 끝인 정도였다.

물론 가끔 시간차 공격이 있어 몇번 긁히긴 했지만, 그건 대부분 테오도르가 맞았다. 치료마법을 담당하는 클라이드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테오도르 귓전에 닿았지만 그는 그것을 주기도문이겠거니 하며 넘겨버렸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말은, 그의 직분과는 따로 놀고 있었다.

"에휴. 내가 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잠깐 기다리면 될껄 굳이 그냥 나가가지고 다치냔 말이야. 나는 뭐 신성력이 남아도는줄 아나 이게 진짜...아, 때리고 싶네 이것들 다..."

직분과 따로 노는 중얼거림이 막을 내린 것은 그들이 여지껏 온 길이 막다른 길임을 알아챘을 때였다.

"야. 뭐야 이게?"
"아...막다른 길이네요. 되돌아가서 찾아볼까요?"
"지금까지 날린 내 신성력은 뭐가 되는데?"
"일단 가봐요...여기 있는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 예. 갑시다요."

거꾸로 길을 되돌아나온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검은 천으로 몸을 감은 사내 하나와 양 손이 사라지고 없는 남자였다. 눈을 가린 앞머리의 검정색이 왠지 기분나쁜 감각을 살아나게 한다.

엘피스의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사내가 목에 건 반지는 은빛으로 빛난다. 다비타가 제 손에 끼운 반지를 보았다. 그녀의 반지에는 'V&D' 라고 새겨져 있다. 앞머리가 부드럽게 입구에서 부는 바람에 날렸지만 그가 눈을 감고 있어 눈 색까지는 알 수 없었다.

목에 반지를 건 그가 가만히, 굳어진듯 서 있다. 그 자의 목에는 큰 흉터가 남아있고, 오른쪽 눈에는 H자가, 눈꺼풀 위까지 선명하다.

그도 이단이었다.

"이단이에요, 사제님!"
"뭐? 그런데...저런 몰골하고는 싸우고 싶지가..."
"이단이 이 문제의 원인이잖아요! 아무리 저런 꼴을 하고 있어도 이단은 이단이에요! 전부...없애버려야 하는 존재라구요!"

그의 눈빛에서 느껴진 것은 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야. 저 시꺼먼건 위협이 된다고 쳐. 저 병...아니, 많이 아파보이는 사람은? 좀...!"

그 때,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눈을 뜨는 듯 보였다. 레넬이 말리려는 듯 울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뛰쳐나가서는, 그의 얼굴, 오른쪽 눈을 노렸고,무방비 상태로 있던 남자의 눈을 베었다 생각하는 찰나, 중간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음을 자각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한 것은 그 다음 일이었고, 그의 고통스러운, 그리고 희미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괴한 비명이 수중동굴을 울렸다. 메르헨이 검을 떨어뜨린다.

"아아아악...! 아아...!"
"무슨...!"
"...혹시 빅터?"

빅터. 다비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콜록, 다...비타? 다비타. 도와줘. 아파. 아ㅍ...콜록, 콜록. 어디야? 어딨어? 다비타? 다비ㅌ...콜록콜록. 으윽..."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기괴한 목소리로 다비타를 부르는, 애처로운 모습에도 그는 아랑곳 않는 듯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레넬이 그를 막아섰다. 제 주인 메르헨에게 처음으로 반하는 모습이었다.

"그르르르..."
"레넬, 비켜!"
"그릉...!"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레넬. 아마 주인의 마음을 좀먹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허나 그는, 제 주인만 막을 뿐 그에게로 향하는 다비타를 막진 못했다.

"빅터!"
"거...기야? 다비타?"
"저에요, 다비타 플로리아!"

그 목소리를 들은 그가 비척비척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메르헨이 더러운 이단과 접하지도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듣지도 않았다.

"반지...아직도 가지고 있네요. 내 사랑..."
"다비타...사랑하는 다비타..."

손이 달아나버려 뭉뚝한 채 남아있는 부분으로,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훑었다. 마치 그것이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가 손에 반지를 끼우고 있음을 자각한 그가 미소지었다.

"너도...가지고 있어서...기뻐...콜록, 콜록. 이거...내 아버지가...만들어줬던...콜록콜록. 반지. 맞지?"
"맞아요. 그 반지에요. 그리고 힘들면 말하지 말아요...불쌍한 사람..."
"괜찮아."
"거기서 당신을 지켜준 거에요?"
"응. 발데마르가, 낙원이."

낙원. 그것이 이단자들의 소굴을 지칭하는 것을 알아챈 메르헨이 분노한다. 자기 부모를 죽인, 이단자들과 한 패인 말라비틀어진 사내가 그 안에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그곳에 가면 모든 사람들을 쓸어버리리라고 그의 마음이 일갈했다. 그들의 대화가 꽤나 이어질 무렵, 검은 사내가 박수를 치며 둘의,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자, 자! 대화시간 종료! 빅터, 이제 가자. 저 남자가 널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저...남자?"
"칼로 아까 니 눈구멍을 그은 남자 말이야. 아, 어린 남자애구나. 암튼 걔가 널 잡아먹을 것 같아. 도망가자!"
"잡아먹어? 흥. 할 수 있으면...콜록, 콜록. 해보라지. 먹을 것도... 쿨럭. 없을 텐데."

희미하고 기괴한 중얼거림은 마치 유령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비타가 눈'구멍'이라는 말에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눈을 보여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처참한 몰골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비명이 동굴 안을 울리고,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몰골이 된 그의 품 안에서 그녀가 바들바들 떤다. 목소리도, 몸도 떨고 있는 그녀를 본 클라이드가 무언가를 직감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어...어떻게...이단 취급에 손을 자르는 것도 모자라서 눈까지...아아...믿을 수 없어. 그들이 이렇게 잔인한...어떻게 이럴수가..."
"난 괜찮아. 난..."

손이 없음에도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토닥, 토닥 하는 소리만 들릴 무렵에 레넬이 그의 주인을 제지하기 위해 다시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다비타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안녕을 말한다. 빅터가 그녀를 찾아 더듬거리다 돌부리에 걸릴뻔한 것을 검은 사내가 붙든다. 그의 손은, 아니 손목 부분은 여전히 다비타를 찾아 휘적거리고 있다.

"다비타? 다비타?"
"ㅂ..."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갈세라, 라이츠가 입을 막고는 속삭였다. 아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지금 저 사람, 다비타 누나 찾고 있고, 눈은 없잖아요. 저대로 찾는다고 돌아다니다간 함정같은데에 걸려서..."

그가 손날로 목을 쓰윽 그었다. 다비타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검은 사내가 빅터를 어르고 달래 다시 데려가려 애쓴다.

"아, 다비타 안보이네. 다비타 어딨지? ...안보이는데. 빅터. 다비타 갔나 봐. 우리도 슬슬 가자. 응?"
"하지만 다비타...콜록. 방금 전까지 여기...콜록, 콜록."
"너 목도 아프잖아. 약 때도 됐어. 약 먹고 다시 찾아보자. 응?"
"그...그래..."

그가 빅터를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다른 검은 옷에게 맡기고, 그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주지. 빅터가 그녀를 보고싶다고 해서 온거니까. 하지만 다음은, 저 다비타라는 아가씨 빼고 전원은 투항하지 않는 이상 국물도 없어. 전부 죽여버릴꺼라고. 특히 거기 너, 없는 빅터 눈을 그어버리려고 한 X자식!"

검은 옷의 사내가 빅토르를 따라 사라진다. 메르헨이 조용히, 자기 안에서 다져진 말을 꺼내놓는다.

"다 거짓말이야."
"...뭐라고, 띨띨아?"
"다 자작극이고 거짓말이야. 저것들이 우릴 갖고 놀려고 일부러 저렇게 만든 거라고."
"띨띨이가 별 소리를 다 하네."
"전부 다 거짓말이고 헛소리에요! 닮은 사람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것 뿐이야. 다들 가자구요. 저것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게 아모르님이 내린 사명일꺼에요! 나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요. 우리의 목적은 그거야!"

그의 목소리가 수중동굴 안을 울린다. 그 훤화는, 그 안에 깃든 감정은 그들 모두를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클라이드만 빼고.


외침을 들은 아델이,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테마리가 킬킬거린다. 마치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라도 보듯이. 때마침 튀어나온 테마리의 농담이 분위기를 더욱 화기애애 비슷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광신도가~ 탄생했습니다~ 아멘!"
"킥킥. 테마리 누나는 말을 참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어."
"내가 좀- 용병단 안에서도 알아주는 코미디언이었지."

그들이 웃고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안으로 안으로 오고 있었다. 발데마르가 그들 곁으로 다가와 얼마나 왔는지를 일러주자 테마리가 지시를 내린다. 그것도 굉장히 상세하게.

"확보된 비상구로 대기 인원 전부 대피시키고, 성채에 연락해서 긴급텔레포트 체크포인트 활성화시켜. 괜히 낙원으로 보내지면 곤란하니까. 나랑 아델이랑 남은 인원이 그거 타고 제낄꺼야. 아델도 긴급텔레포트 켜고 여기서 같이 싸우자고. 그러고보니 너는 대기냐, 아니냐?"
"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 하나가 전부에요. 다들 땡땡이치는 바람에..."
"뭐? 땡땡이?! 이것들이 죽을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마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한 발데마르가 살짝 뒤로 물러섰지만 한숨 한번으로 끝나는 요행덕에 물건내지는 사람 뼈가 부숴지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땡땡이 친 것들은 아마 무덤 안에서 라테아 구경할 준비나 해야 하겠지만.

"그럼 너랑 남은 하나도 싸운다. 은폐하고 대기타다가 한놈이라도 그어. 둘 이상은 더 좋고. 그 검 위력 너도 알지? 못해도 중상이야. 삐끗해서 잘못 노려도 깊이 베이고. 아델은 저 여자 어쩔꺼야? 풀어줄꺼야, 갖고 갈꺼야?"

그가 살짝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셀린이 원하는 대로."
"그럼 내가 여쭙지. 기다리라고."

그녀가 철창살에 한쪽 발과 팔을 걸치고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귀공녀 양반."
"..."
"이런 X미. 대답을 하라고!"

그녀가 철창을 강하게 치는 바람에, 놀란 그녀가 뒤로 기듯이 물러섰다.
"흐...흐익...!"
"뭐, 벙어리는 아니네. 너, 계속 저 망할 것들을 따라다닐 생각이야? 그랬다간 나랑 대판 싸워야 할텐데 말이야."
"..."
"또 벙어리 놀이냐? 대화에 진전이 없네 이거. 이 년은 때려야 말을 하는 성격인가?"
"그 여자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아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있다. 그 목소리에 그녀가 미안하다며 짤막하게 말하고 다시 입을 연다.

"야. 아델의 신부. 말을 하라고. 뚫린 주둥일 가지고 있으면. 내가 라세다르도 아니고, 네 감정을 읽을 수도 없는데 입을 그렇게 싸물고 있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니가 벽이냐?"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하! 마치 선택권이 있는 것 처럼 지껄이시네. 이렇게 되면 나도 생각이 있어. 아델! 열쇠, 내 맘대로 해도 되냐?"
"계속 그렇게 나오면 맘대로 해도 신경 안쓰겠어."
"어때, 이젠 말 할 마음이 좀 생기셨나?"
"..."

침묵밖에 돌아오는게 없자, 그녀가 동굴 안 깊은 곳으로 열쇠를 휙 하고 던져버린다.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혀를 낼름 내민 그녀가 곧있는, 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벽 한곳을 누군가 때리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문을.


또 함정을 지나 누군가가(아마 빅터일 것이다.) 흘린 핏자국을 건너, 그들이 마주한 것은 또다른 벽이었다. 화가 난 클라이드가 애꿎은 벽을 걷어찼다. 그가 괴롭히는 벽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 옆쪽의 벽에는, 20년쯤 전에 한 테이머가 검은로브와 전투하며 남았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메르헨이 그 흔적을 보고는 그를 말리기 시작한다.

"사제님. 여긴 검은로브와 전설의 테이머님이 싸웠던 곳이에요. 진정하세요."
"그딴거 난 알 바 없고, 결국 둘 다 막다른 길이면 셀린은 어딨는 건데?"

이치에 맞기는 한 말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계속 벽을 치고 또 친다. 아마 화를 푸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그가 어떤 지점을 퍽 쳤을 때, 그 지점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런줄도 모르고 계속 벽의 살짝 들어간 곳을 치기를 몇번 더 하자, 벽이 정확히 네모난 모양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 안에 펼쳐진 꽤 넓은 공간. 팔을 휘둘렀던 클라이드가 그 자리가 빈 것을 알아채자 그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 본다.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그 안에서 벽을 살피던 아델과 테마리가 문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린다. 뒤집어쓴 후드 아래의 푸른 눈이 차갑게 빛난다.

"왔어?"

그리고 뒤에서, 그들을 습격하는 암흑 기사 둘. 은폐상태라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레넬과 메르헨을 베는 보랏빛의, 에너지로 이뤄진 칼날이 그들을 이등분할 기세로 내리찍어진다. 휘익.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둘의 비명이 울렸고 용의 울부짖음이 원인인지 동굴이 재차 흔들렸다. 균형을 간신히 유지한 넷이 싸울 기세로 선다. 테마리의 눈에는, 그녀가 클라이드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비웃음만이 걸려있을 뿐이다.

"덤벼봐. 누구 목이 더 잘 붙어있나 내기 한번 할까? 난 내 목이 잘 붙어있다에 걸지."

칼날을 붕붕 휘두르는 그녀의 자태는 오만 그 자체였다. 화려한, 금빛 갑주를 몸 곳곳에 장비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먼저 죽을 사람 없어? 없으면 내가 들어간다?"

말을 마치자마자 튀어나가는 그녀의 신형이 민첩하게 움직인다. 테오도르가 방패로 공격들을 간신히 막아내는 동안 디프라이브 교수는 다비타와 함께 메르헨을 들쳐메고 밖으로 나선다. 사실상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기에. 그들이 메르헨을 치료하며 돌보는 동안 안에 남은 사람들이 잘 해결할 것이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너희들은 빠져! 땡땡이 친 놈들한테는 7박 8일 라테아 자유 여행 풀 코스로 준비하라고 전하고! 나랑 아델이 이것들 끝내고 슬슬 갈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벽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디프라이브 교수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유타칸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으니까. 과학을 맹신하는 그에게는 충격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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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본에 거하는 딸아, 네 영광 자리에서 내려 메마른 데 앉으라.

  - 예레미야 서 48장 18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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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수 제한이 제 소설 분량을 잡아먹는 문제가 생겨, 소설을 갈아엎고 모든 비축분의 분량을 재조정했습니다. 시봉탱. 거기다가 아예 모바일로는 사진을 '정상적ㅇ' 방식으로는 올리기 드럽게 힘듭니다. 개시봉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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