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색 연필 샀습니다. 컬러 표지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손에 남은 텅장)
---------
불길 속에서, 그는 보았다.
자신의 하나뿐인 신 아모르를.
신의 목소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하나뿐인 신 아모르는 복수의 아모르니라.
이단들에게 복수하라.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이단은 사라져 없어져야 할 존재이니."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환청에 압도되어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 뒤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모르님께서, 너를 위한 계획을 세워두셨단다."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
"착한 아이를 넘어, 영웅이 되려무나, 메르헨.
이단들을...없애는 거야."
공포로 인한 환영은, 그의 작은 영혼을 검게 물들였다.
◇
파이어 볼의 충격에 나가떨어질 뻔한 크노첸이 주인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겁에 질린 눈이 셀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셀린으로써도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크노첸을 데리고 조용히 숨어있는 수밖에는. 무기도 없는 자신이 무언가 하려 한다면, 그녀의 세상이 그녀 자신의 심박과 함께 멈춰버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행히 테마리가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도 아델레온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라이츠! 저 이상한 촉수부터 어떻게 해봐!"
"예!"
라이츠가 최대한 등 뒤로 가보려고 했으나 그 기계는 그보다 한참 더 빨랐다. 수인을 맺는 것이 끝나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라이츠의 피부를 베고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소년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아랑곳 않고 다시 공격 기회를 잡는 라이츠. 촉수를 어찌어찌 붙드는 데엔 성공했지만 이내 다시 놓친 그가 바닥에 떨어진다.
클라이드도 백마법이 통하지 않음을 알아채고는 근접전으로 방향을 바꿨으나 손해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내 그가 메이스를 땅에 던졌다. 땅이 다시 흔들림에도 기계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의 손 주변에서 푸른 빛이 빛난다.
"나 진짜 화났다, 지금. 라이츠, 비켜."
"앗...네!"
"거기 내려놓고. 단검은."
이질적인 말투에 라이츠가 조금 놀란 듯 보이다가는 그의 말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셀린이 숨은 바위 뒤로 이동한 그의 귓가에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써보는데 말이야, 이건."
곧 그가 던진 단검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
영광의 성채에 있는, 긴급 텔레포트 체크포인트 근처에서 일이 다 끝났다고 믿은 채 라세다르와 한가로이 쎄쎄쎄나 하며 놀고 있던 더 폴른의 눈 앞에, 테마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아델과 이그나이트도. 그가 의료팀에게 연락을 취한다. 기분이 한껏 나빠진 그녀가 총사에게 손찌검을 한다.
"빨리도 연락한다!"
"너같은 겁나 센 용병이 다쳐서 올 줄 누가 알았나...안 그래? 그리고 난 말야, 놀기 바쁘다고-"
"이 쓰레기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쓰레기. 그건 그녀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만 나오는 말이었다. 폴른이 표정이 굳히며 입을 다문다.
"아...알았어...잘못했다고. 앞으로는 잘 할께."
"알았으면 됐어! 뭐, 내가 겁나 세다는 건 맞췄으니 이 정도로 끝내주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테마리 앞에 라세다르가 나타났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강한 분노를 감지한 그녀가 제 언니를 꼭 끌어안는다.
"언니...화 내지 마. 응?"
"아...어......응... 미안하다. 대판 깨지고 와서."
"언니가 졌어? 그럴 수가..."
"사실상 무승부야. 그 파란 머리 사내놈...어찌나 맷집이 좋던지. 걔도 날 못 죽였고 나도 걜 못 죽였으니, 내 기준, 그러니까 용병 기준으론 무승부지. 그 놈도 나를 간신히 못 움직이게 할 뿐이었으니까."
"무승부면 아직 괜찮잖아. 그러니까 진정하구...응?"
테마리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하나뿐인 핏줄, 동생에게만큼은 늘 자상한 언니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라세다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라셰. 걱정 마. 이제 너 보고 다 풀렸으니까. 그 놈은 나중에 내가 진지하게 해서 초전박살을 내버리면 되고!"
어린 소녀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 폴른에게까지 와닿았다. 용병은 소녀와 눈을 맞추며,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시간 안에는, 우릴 쫒아낸 그 대주교란 놈을 몰아내고 새롭고 평등한 사회를 세울 꺼니까. 우리 손으로.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해야겠지? 그러면 위험한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될 꺼고, 그러면...어...평화. 그래.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될꺼야. 바깥에 자유로이 가볼 수 있게 될꺼고. 언니 믿지? 라세다르."
"응."
"우린, 꼭 해낼꺼야. 여기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내 목숨이 걸려있든 뭐가 걸려있든 말이야. 이번만은, 돈 같은데에 연연하지도 않을꺼고."
그녀의 눈빛이 결의로 꽉 차있다. 그 때, 수중동굴 근무를 섰던 두 암흑 기사가 셋에게로 다가왔다.
"테마리님. 오늘 땡땡이 리스트 뽑아왔습니다."
"오호라. 그게 있었지! 어디 보자... 위도우, 미르미돈, 에브스, 알테리어라! 걔네들은 오늘 나랑 대련해서 이기면 면제, 못 이기면 단체 기합이니까 모가지 잘 닦아놓고 있으라고 전해. 세 시간 후에 그리로 가볼테니까. 난 그 시간동안...파르신하고 라세다르랑 놀고 있지 뭐."
"...예."
테마리가 여동생을 데리고 아래로, 더 아래로 향한다. 암흑기사 둘은 둘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 말은 곧...단체 기합?"
"최소한 위도우 귀에 들릴 때는. 테마리님은 공격하고 싶지 않다는 별종이니까. 안 그래, 윈터?"
"에브스한테도. 신입이니까. 성격도 그렇고. 안 온 이유가 '혼자 나가면 뻘쭘해질 거 같아서' 라고 하는 애인데 뭘."
"그래...뭐 최소한 미르미돈이랑 알테리어는 승산이 있어보이지?"
"미르미돈은 별로. 너무 정공법으로 싸우는 사람이라."
"내기 할래?"
"난 미르미돈 기합에."
"난 둘 다 통과에."
"헤이, 거기! 나도 끼면 안돼?"
폴른의 목소리에 그들이 고개를 돌린다.
"누구...?"
"나? 더 폴른 원(The Fallen One). 간단하게 더 폴른이나 폴른이라고 불러."
"타락자...?"
"멋대로 부르라고. 이름같은 건 버린지 오래니까. 아무튼 나는 둘 다 기합받는다에 한 표!"
"...왜지?"
그가 예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분명 지금 기분 최악인데, 사람 감정을 보는 여동생 앞이라 꾹꾹 억누르고 있는 거거든. 소원빵 할까?"
"소원빵?"
"그러니까,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라는 소리야. 좀 알아먹어봐, 윈터."
"그럴 이유가...?"
"말을 말자. 맞다. 이쪽은 윈터러, 나는 블리드. 코드 네임이지. 너랑 비슷하달까?"
"그럼 우리,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기쁜데-?"
서로 맞잡은 손이 따스하다. 분명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위에서는 말하는데도.
◇
단검이 날아들어 다리를 대신하는 기계의 관절부를 파고들었다. 박힌 단검을 빼내려는 추적자의 움직임도 잠시, 곧 메이스가 그녀의 팔을 내리쳤고 뼈가 부러지는 수준의 충격이 가해졌는지 팔이 기이한 모양으로 꺾였다. 작은 기계들이 뼈를 맞추고, 추적자의 본체가 치료 마법을 쓰는데에 열중하는 중에도 클라이드는 쉼없이 움직였다. 그의 메이스가 단검의 손잡이를 때려 검을 깊이 박아넣었고, 단검이 뒤로 한번, 두번 그렇게 재차 움직이자 다리가 떨어져 나왔다.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게 된 기계는 그럼에도 움직이려고 발버둥쳤다. 어찌어찌 움직인 기계가 제 다리를 집어올린다. 팔은 이미 말끔해진 상태였다.
"자체 재생? 아니지, 수리 로봇이라도 딸려있나 보네."
[미확인 패턴. 정보 전송중. 메카 폼에서의 정상적 기동 불가능. 포스 폼으로 변경 요청... 변경 승인. 변환 시작.]
기계 다리들이 모두 제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남은 것은 상반신 뿐이었다. 그리고 곧 그 기계에서, 마나로 이뤄진 사람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보고 그가 떠올린 것은 마법과 과학의 조화였다. 한낱 이교에 불과한 것들이 이런 것 까지 만들어냈단 말인가?
"그들이 이걸? 설마. 그건 그렇고... 누구야, 저건. 겁나게 익숙한 상판떼기인데."
「출력 리미트가 해제되었습니다.」
기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지자 그도 살짝 고전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아직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역장 전개.」
그리고 다음 마법이 펼쳐졌을 때, 그는 그것이 누구인지 직감했다.
"유리아?"
"크...클라이ㄷ...아악! ...오류 발생. 냉각에 돌입합니다.」
"...빙고."
그의 웃음이 사악하게 느껴진다.
◇
그는 계속 기계 안의 유리아를 자극했다. 유리아는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기계의 자아가 꽤 강한 모양이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의 가슴팍을 장식한, 마치 생체같은 부분을 가리키며 간신히 두 단어를 말한다.
"마력의 근원...아아! 지속적 오류 발생. 정보 전송.」
"마력의 근원이라."
기계적인 목소리로 되돌아온 유리아가 그를 향해 마법을 날린다. 물 속성인 것은 분명하다. 그를 스치고 지나간 마법이 그에게 한기를 불러 일으킨다. 흡 하고 숨을 들이쉰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유리아는, 아니 유리아의 탈을 쓴 검은 로브의 병기는 그를 매섭게 몰아쳤다. 마력의 근원. 그 실마리를 풀어내야 한다.
조여오는 압박감들이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 마냥 후두둑 떨어져 내려오던 돌들, 그리고 칼 내지는 메이스가 마침내 답이 나왔다는 듯, 그의 손에 잡힌 채 그녀의 심장이 있을 곳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게 정신을 자신에게만 쏟는 동안, 어째 동굴이 무너질 것 같아 라이츠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라이츠가 셀린을 데리고 빠져나왔고, 그에 맞춰 동굴 벽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추적자는 그 징조를 전혀 알지 못하듯 그만을 노린다.
-----------
'테이머와 함께 할 때, 나는 내가 아닌 나로 있고 또한 나로써 존재한다.'
어떤 용이 20년 전에 한 말이다.
팀버 드래곤이었던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아는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러나 곧 승천해버렸지. 고작 등급 어쩌구 하는,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드래곤의 힘의 척도 같은 것 때문에. 그는 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테이머와 같이 있어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옛 주인, 엔타르-
"...아. 연구에 집중해야지. 이그나이트, 헤로디아, 내가 졸면 나 좀 깨워줘."
"알았어요, 여보."
헤로디아와 나는 그가 연구하는 것을 보았다. 계속된 연구로 가끔 쓰러지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게 남의 연구 성과가 되었다. 나는 분노했다. 그건 분명히 그의 것이다. 내가 봤고 들었으며 헤로디아와 함께 그의 보조도 해주었다. 어떻게 그것을 가져갈 수 있는가! 화가 나서 내뿜은 작은 불덩어리는 엔타르의 앞에 기고만장한 채 서 있던, 디프라이브인가 뭔가 하는 탐욕스러운 놈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탐욕스럽고 사악한 놈! 다음에 보이면, 사지를 찢어발겨서 내 먹이로 삼아주겠어! 뼈까지 삼켜서, 작은 흔적조차 없애버릴거다!"
하고 소리질렀던, 젊은 시절의 나. 젊은 혈기는 역시 혈기라서, 피를 그리도 보려고 안간힘을 썼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드래곤 언어 번역기인지 뭔지 하는 것이, 내 말을 옮긴 것도. 지직거리는 소리가 섞여, 그것이 억양도 재멋대로인 기계음으로 나왔던 것이 생각난다. 그 말을 듣고 사색이 된 그들이, 나와 엔타르를 강제로 끌어낸 것도.
소송은 패배였다. 우리 쪽에서 돈을 물어줄 위기였다. 나는 인간들 몰래, 반짝이는 것들을 보이는대로, 다만 티는 나지 않도록 입 속에 우겨넣고 배 밑에 깔고선 자는 척을 하며 버텼다. 건드리려고 하기라도 하면 눈을 슬쩍 뜬 채 으르렁거리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인간들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뒤, 내가 그에게 내어준 그 반짝이는 것들로 엔타르는 빈민가에 집을 구했다. 그의 아내, 헤로디아도 함께 그 곳으로 남은 집기들을 들고 이사했다. 그 뒤, 아델이 태어나자 그녀가 소리질렀다.
"재...재앙의 아이야! 아악!"
그 때, 또 분노했던 것이 떠오른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어떻게 저리 매몰차게 대하는거야! 저건 몬스터들도 하지 않는 짓이야!'라면서. 그녀는 그 사내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낳고 나서부터 9년간,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아델이 태어나고 5년쯤 뒤 셀린을 낳고, 그녀는 셀린만이 제 자식이라는 듯 대했다. 아델이 애정을 구하려는 시도는 실패로만 되돌아왔다. 매몰찬 년.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아델은 한결같았다. 구해질리 없는 애정을 끝까지 갈구했고 매번 실패했지만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그러다가 그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두운 밤이었다.
헤로디아가 들어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짐을 나와 엔타르는 의심하고 있었다. 왜 늦을까. 둘이 같이 회의를 하기도 했다. 아델과 셀린, 그리고 헤로디아 몰래.
'헤로디아 늦게 와 혹시 그거 아닐까 그거'
"그거 뭐?"
'외도'
"..그럴리가."
'그거 아니면 답 없어 헤로디아 일 안해 늦게 올 이유 없어 늦어 답 딱 하나야'
"아니야. 아닐꺼야. 일단 보자. 그 다음..."
외도. 인간이 제 배우자를 저버리고 남의 남자와 연애하는 행위, 또한 인간만이 저지르는, 죄 그 자체인 행위. 용은 절대 자신의 배우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유희라는 듯 쉽게 저지른다. 설마 헤로디아가 그 유희에 빠져버린 것이라면...
"아니야. 아닐꺼야. 아니어야만 해. 내 아내가, 헤로디아가 그럴 리 없어."
'나도 아니길 바래 부정하기 힘들어 그것뿐이야'
아델이 방으로 들어와서, 회의가 중단되었다. 셀린도 함께. 셀린이 엔타르에게 돌을 하나 건넨다.
"아빠. 이거 이그 닮았져!"
"어? 하하. 그러게."
"아빠. 이거 셀린이 찾은거야."
"맞아맞아. 내가 찾았떠! 그니까, 아빠 주께!"
"아하하. 고마워. 그럼 어디 볼까? 정말로 이그나이트 닮았네. 그치?"
"응? 그러게. 나를 닮았어. 정말로."
물론 엔타르와 아이들에겐 그르륵 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고개까지 끄덕여 의사표시를 명확히 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이 기분좋다. 셀린과 아델레온의 목소리도 늘 그랬듯 듣기 좋고. 엔타르는 그녀에게, 오르골을 하나 주었다. 예쁜 소리가 나는 오르골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기괴한 소리가 났다. 부드러운 선율을 내는 오르골의 밑바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아닌 나로있고 내가아닌'
알 수 없는 구절. 도저히 모르겠는 내용이다. 그저 아름다운 소리일 뿐인데 왜 내게는 불길하게 다가올까.
그리고 그 날 밤, 헤로디아는 떠났다.
마당에서 자다가, 조용히 일어나서 집 안의 그녀를 보았다. 짐을 싸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고 내가 있는 마당의 너머엔 사람이 여럿 보였다. 화가 나 으르렁거리자 헤로디아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으르렁거리며 그녀가 나가려는 문인 앞문을 막아섰고, 그러자 헤로디아도 포기한 듯 제 방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뒷문이 열리며 헤로디아가 잠든 셀린을 안고 달아나버렸다. 앞문을 나선 뒤 그녀가 향한 방향으로 날아 셀린을 안은 그녀를 발톱으로 낚아챘지만, 곧 탐욕스러운 인간의 하수인 정도로 보이는 자들이 셀린을 낚아채 마차에 태우고는 내게 상극인 물 속성 마법 공격을 가했고, 내가 땅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를 놓치자 그들이 헤로디아를 안전하게 받아 마차에 태운다. 필사적으로 저항해 마차 바퀴라도 부러뜨려보려 했으나, 전부 좌절돠었고 물 속성 마법들만 쏟아질 뿐이었다. 결국 내 몸도 움직이기 힘들만큼 둔해져버렸고, 어두워지는 시야만이 남은 감각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의식이 흐려졌다.
그 장면을 끝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년이 탄 마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크게 소리쳤다. "망할 년! 셀린이 타고 있다고 해서 그 마차를 내버려 두는게 아니었어! 바퀴라도 불태웠어야 했는데!" 하고. 물론 남들에겐 포효로만 들리겠지만 말이다. 천천히 되돌아간 다음, 고개를 들이밀고 집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꼴에 양심은 있었는지 돈같은 것은 챙겨가지 않았지만, 그가 준 오르골이 사라져버렸다. 더러운 년, 셀린까지 금조각의 장신구로 만들려 하다니, 망할 년. 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 뒤, 뒷문이 막혔다. 아델과 셀린의 옛 놀이터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엔타르는 연구에만 집중했다. 마냥 어린 것 같았던 아델은 의젓하게 제 아버지를 챙겼다. 광장의 고대신룡 석상 앞에만 나가면, 아델은 '불여우와 도둑놈의 아들'이라는 경멸과 혐오, 그리고 박해만 받고 돌아왔다. 그렇게도 순수한 아이였는데, 그런 말을 들으며 그 아이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광장의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엔타르가 완성해낸 둘째 연구의 성과는, 또 다시 빼앗겨버렸다. 이번에 그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뒤, 그는 지금...
"아델. 셀린은 언제 돌아오니? 아 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연구해야지. 연구..."
학회에서 추방당한 것을 잊기라도 한 듯, 그는 계속 오래 된 종이와 이미 마력이 다한 마나스톤만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곤 했는데, 종이를 보면 항상 같은 단어만 쭉 나열되어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쌓여있는 종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 같은 모양이었다. 전부.
그리고 지금 엔타르는, 보이지 않는 셀린을 보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셀린을 쓰다듬고, 들리지 않는 셀린의 목소리와 대화하고 있다. 정말로 그가 어떻게 된다면, 정말로 그의 앞에 셀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라면...
허나 내가 용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셀린만은 데려와야 해. 헤로디아 그 화냥년이야 어쩌든 간에. 모두 엔타르를 위해서, 아델의 아버지를 위해서야. 그리고 아델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술을 마실 때, 그 애의 감정이 느껴졌다. 슬픔, 그리고 배반감. 내가 느끼는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었지. 어쩌면 나는, 아델과 비슷한, 혹은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인 지금이지만, 일단 한가지는 확실하다.
'모두가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
잃어버린 우리의 앨리스를 되찾겠어.
그래야만 엔타르도, 아델도 무너지지 않을테니까.
그들의 곁에 계속 있기 위해서다.
방해된다면, 없애면 그만이다.
그 레넬이라는 놈의 주인도.
우선 목적을 달성하고, 과정상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
너는 나를 무어라 생각했는가
-류선우, 새벽이 가져다주는 처량함
==========
저는 타락이 좋습니다.
사실 정신붕괴도 좋습니다.
타락했다가 무너질 때는 더더욱 좋습니다.
아델 일가는 다 해당되며, 특히 이그나이트는 자신이 하는 일은 무슨 목적에서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타락에 해당합니다.
이쯤 되면 아시겠지만 저는 블자빠입니다. 호드에 영광을! 얼라이언스를 위하여! 엔 타로 아둔! 엔 타로 태사다르! 우리는 오버워치! 누가 나를 심판하는가! 내가 곧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