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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검은 혁명 - 6. Memory from Death (4)

0 카타스트로프
  • 조회수277
  • 작성일2017.04.13
(오늘은 카타스트로프의 마감 문제로 인하여 표지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우개가 사라졌는뎌 몇일 사지 못한 탓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가 주변을 살핀다. 클라이드가 싸우고 있고, 그를 쓰러뜨린 기계장치까지는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떨어진, 이제 보니 손상 상태가 꽤 심각한 방패도. 일어서려 했지만, 데미지가 누적되었는지 일어서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동굴이 붕괴하고 있는 듯, 위태로운 떨림이 자주 일어난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가 클라이드에게 피하라고 소리치고 기계장치에게 달려들자, 클라이드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에겐 닿지 않은 듯, 그는 기계장치를 상대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카앙 하는,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무너질 듯 한 동굴을 울렸다. 클라이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돌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테오도르의 귓가에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하다 나와! ... 안에서 ...고 있지 말고!"

추적자의 근처로 큰 돌이 하나 떨어져 큰 충격을 만들었다. 잠시 주춤하자 공격이 바로 그에게로 들어왔지만 갑옷이 공격을 어느정도 상쇄시켰다. 휘둘러지는 방패에 상반신을 강하게 맞은 기계장치가 땅 위에 넘어지자, 그가 달려들어 방패로 목을 내리찍었다. 뭐라 하지도 못한 채, 기계장치는 그 숨을 거뒀다. 무어라고 하려고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곧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그를 덮친다. 방패로 막을 틈조차 없었다.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그것이 동굴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젠장...! 테오도르! 살아있냐!"

살아 있을리 만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부질없는 희망에 소리쳐 본다. 새삼 인간이 이렇게 쉽게 죽는 존재라는 것이 다시 떠오른다. 그걸 처음 깨달았던 때가 꽤나 어릴 적이었는데도. 메르헨을 업은 디프라이브 박사가 다비타와 함께 동굴을 나선다. 추가 붕괴 위험이라나.

"이 많은 바위들을 하나하나 들어낼 수도 없고...!"

짜증이 솟구친다. 대체 뭔 동굴이 전에는 멀쩡하다가 우리가 들어오니까 갑자기 무너지느냔 말이야!

"테오도르! 무통증인 양반아! 띨띨아! 들리면 대답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그는 죽은 걸까?
왜인지 그렇게 믿고싶지 않다. 설마,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한심한 내 모습에 웃음만 픽 나온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걸까.

과거엔 전혀 그렇지 않았으면서-

짧은 생각을 마치고 그 곳을 떠났다. 발걸음이 왠지 무겁다. 이것도 그 영향일까. 이렇게 무언가에 얽매이는 건 딱 질색이다. 인연이라는 단단한 밧줄이, 내가 이 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내 발을 잡아당기는 것이 틀림없다.


"메르헨 오빠는 좀 어때요?"
"글쎄. 경과를 지켜봐야 해. 레넬은 뭐 멀쩡하고."

레넬이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주인을 가만히 보던 그가, 상태가 꽤 나아진 것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다시 들어 하늘을 보았다. 고대신룡이라도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캬우우 하고 우는 듯한 소리를 낸 레넬이 다시 고개를 디프라이브 박사 쪽으로 돌린다.

"음?"

시선이 느껴진 박사가 그를 바라보자 레넬쪽에서 먼저 그르릉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늘따라 레넬이 왜 저럴까. 아마 그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클라이드가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한 걸 알고 나자, 다비타가 그를 부축한다. 나오지 않은 한 사람에 대한 질문도 잊지 않았다.

"테오도르 씨는요...?"
"..."

그의 입이 파르르 떨다가는, 단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죽었어...아마도..."
"어째서...!"
"동굴 천장이 무너졌어. 깔렸을 꺼라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못해. 반 이상이 무너졌으니까. 분명 그 아래에..."

그의 안색이 이리도 좋지 않은 때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엘피스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즈음, 디프라이브 교수가 무슨 장치를 꺼내들고는 작동시켰다. 이동 마법.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레넬이 말리듯 캬우우 하는 특이한 울음소리를 다시 한번 냈지만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디프라이브 박사가 올라서자, 메르헨의 신형과 함께 그가 사라졌고 모두가 차례차례 올라서 그것을 통해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레넬이 올라선 순간, 장치가 그의 무게를 못 이기고 부숴지며 레넬의 성질을 돋구기 전까지는 완벽했다.

"크르아아아아아아아!"

용의 분노가 숲에 울려퍼진다. 레넬이 수목신의 묘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엘피스 방향으로 향했다. 5년 살았으니, 이정도 길은 문제도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젠장. 길을 잃어버린 건가."

아까 본, 내가 해놓은 표식이 열번째인지 열두번째인지 모를 횟수만큼 나를 반겼다.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서서 고민했다.

"내가 그거 쓰지 말자고 그렇게 부르짖었는데도 안 듣더니, 나만 무슨 꼴이냔 말이야."

여기가 거기같고 거기가 저기같고 저기는 또 여기같은 이 복잡한 숲길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전에 봤던 그 조그마한 다크머더러가 어느새 다가왔는지 내 눈 앞에 서 있다.

"뭐 찾는거라도 있어? 아까부터 같은 자리만 열 다섯번째 빙-빙! 앗, 그러고보니까 전에 날 도와줬던 사람들하고 같이 있던 용이다! 뭐 찾아, 응?"
"길."
"길? 주인이 버린거야? 그럼 우리랑 살자!"
"그건 아니야. 내 주인이 간 다음에 이동 마법 장치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장치가 내 무게를 못 견디고 부서지는 바람에..."
"약하게 만들었나보다-"
"그래. 그건 그렇고, 열 다섯번째라고? 열번째나 열 두번째가 아니고?"
"응! 아니, 열 여섯번째였나-?"
"..."

그러던 그 작은 녀석이,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와서는 쫑알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길 찾는거 도와줄까?"
"그래주면 고맙겠네."
"대신..."

대신이라는 말만 나오면 침을 꿀꺽 삼키는 건, 인간이나 용이나 다를 게 없었다.

"나랑 놀자! 나 심심해!"
"...뭐?"
"나 놀아달라구우-"

놀아달라니. 이건 또 무슨...

"루아네르. 너 용이랑 뭐해?"

그녀석의 말이 딱 끝날 때 즈음이었을까. 저 멀리서 페어리고스트 특유의, 살짝 청명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났다. 조금 어린 듯, 살짝 작은 몸집이 아마 이 다크머더러 또래 즈음 되어보인다.

"어? 레지에타구나- 으응, 그게. 길을 잃어버렸대서."
"어떤 바보 용이 테이머랑 떨어져서 돌아다녀? 주인이 버린 거 아냐?"
"타고 가려던 이동 마법 장치가 부숴져버렸대-"
"또 인간들이 허술하게 만든 장치에 당했겠네. 그렇지?"
"그런 거 같아. 그래서, 지금 막 길 찾아주려고 하던 참이었어. 헤헤..."

얼굴을 붉히며, 제법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녀석의 모습이 귀엽게 다가온다. 마치 인간과 비슷한 모습. 아마 이들도 다른 어린 생명들처럼 서로 장난도 치고 하며 자라겠지. 어른 '몬스터'가 된다는 건 다르지만.

"음, 그런거야?"
"으응- 맞아, 같이 길 찾아줄래?"
"...뭐, 특별히 그럴까.
"그건 그렇고, 네 이름이 루아네르라고?"
"루아네르! 쟤는 내 친구인 레지에타!"
"둘 다 이름 한번 특이하네."
"몬스터 이름에 뭘 바래? 바보 용 같으니. 그리고 누가 니 친구래? 그냥 좀 놀아주는 거지."
"그게 친구지-"
"어휴. 내 인생에 바보 다크머더러에 바보 용까지 해서 저런 것들이 붙었어. 빨리 떨어지지 않으면 바보가 옮아버릴지도 몰라..."

레지에타의 톡 쏘는 말투에 피식 웃어주며, 함께 길을 떠나려던 차에, 테이머와 용이 보였다. 노리는 것은 분명 두 몬스터 중 하나이리라. 루아네르가 뒤로 휙 숨자 남은 것은 레지에타와 나 뿐. 용은 당연하다는 듯 레지에타를 노렸고 둘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숲에서 나가!"
"프로스티! 저 몬스터를 없애!"
"그럴꺼야!"

그 아이의 주변에 떠돌던 영혼이 프로스티를 공격했지만 상대는 바람속성 드래곤. 빠른 것이 장기인 드래곤이다. 매서운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아이가 죽어 사라지기 직전일 때 즈음, 내가 그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본능이라고 하면 좋을까?

"레지에타, 물러나!"
"크윽...바보 용아. 너 지금...죽을 수도 있는 거...알고 그래? 테이머도...여기 없잖아."
"물론 알아. 그것보다, 상처가 심각하니 어서 치유의 샘으로 가라. 이 근처에 하나 있는 것을 다섯번은 넘게 봤다. 지리는 네가 더 잘 알겠지?"
"흥! 죽어도 난 몰라...!"

레지에타와 루아네르가 빠르게 치유의 샘 방향으로 사라진다. 상대는 프로스티. 내가 조금 불리하긴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먼저 공격해 들어온 것은 프로스티였다. 바람속성 드래곤 특유의 빠른 몸놀림으로 매섭게 살을 파고드는 발톱에 고통이 엄습한다.

연속되는 공격을 교차막기로 간신히 막고, 그 놈의 앞발을 밟았다. 아마 공격이 한동안 약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몬스터들을 지키고 있는 이유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프로스티! 없애버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꽤나 건방지다. 그 언행의 댓가로, 프로스티에게 빠른 연속 공격을 선사했다. 몸으로 부딪힌 충격에 저쪽이 잠시 주춤하는 그 때를 노려 잠시 빠졌다가는 고운 털이 덮여있는 몸에 둔탁한 충격을 가했다. 콜록대는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앳되다. 아마 갓 성체가 된 용일까. 분명 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몬스터들을 지키는 거야, 나이트드래곤!"
"...그들도 고통을 느끼니까."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주인을 가르칠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 학자는, 동물 또한 고통을 느끼기에 권리를 가지는 대상이 된다고 했댔나...몬스터들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물러터진 생각을 가졌으니 주인이 버렸겠지. 몬스터를 주인으로 삼아놓고선 지키고 앉아 있고!"
"주인? 이 몬스터들은 내 주인이 아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으니까."
"하? 그럼 지금부터 명령하도록 하지, 비켜! 난 몬스터를 사냥하고 강해져야 하겠으니까!"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고 했을텐데."
"그래서 지금 내가 약하다는 거야? 한번 보시지, 내가 얼마나 강한지!"

같잖은 허세를 조금 부려봤더니 바로 들고 일어난다. 어린 녀석이라 그런가. 자존심 하고는...

"프로스티! 뭘 꾸물대는 거야! 없애버리자구!"
"아아, 미안하다. 대화 좀 했지."
"아파? 그래도 참아! 넌 충분히 강하잖아! 가자! 저 이상한 용을 해치우는 거야!"

이상한 용이라. 나름 어울리는 별칭이다.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 용의 치명타를 신의 결계로 막아내고 내 공격을 선보였다. 빠르게 피한 프로스티가 바로 내 목을 노렸다. 큰 고통이 엄습했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보인다.

"좋아. 상처가 다 보이는데!"

그 놈이 내가 입은 상처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고통에 점차 어지러워질 때 즈음,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교차막기로 다시 한번 막아낸다. 공격이 막히자 성질이 났는지 그 녀석의 공격이 점차 격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약점도 노리기 쉬울 터.

"무르군."

공격하는 그 순간 드러난 급소를 가격하자 프로스티가 고통으로 잠시 일어서지 못한다. 테이머에게 경고하는 말을 보냈지만 그저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들려서인지, 그저 한발짝 물러설 뿐이다.

"프로스티! 일어나!"

그 녀석이 간신히 일어나서는 분노한 듯 나를 노려본다. 나도 그 녀석도 상당히 지쳐있고 상당히 다쳤다. 일 합으로 모든 것이 결정날 것이다. 그 때, 그 녀석이 꽤 강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의 분노-!"

그 녀석이 나를 향해 정면으로 강한 빛줄기를 보낸다. 충분히 피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뒤쪽 방향은 치유의 샘이 있는 곳이다. 버텨내야 한다.

"으극...!"

빛무리가 강하다. 신의 힘을 빌어 결계를 펼치려 했지만, 듣지 않는다. 어째서야...! 몬스터들을 지킨다고 그러는 건가...!

"크아아아아아!"
"잘했어, 프로스티!"

만들어지다 만 신의 결계는 빛을 거의 막지 못하고 부질없이 뚫려버렸다. 강한 빛은 나를 강타한 영향인지 샘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 내가 쓰러지자, 그들의 걸음이 나를 지나친다. 싸늘하기 짝이 없다.

걸어서 저 너머의 숲으로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비치고, 그들이 사라지자 온전히 나은 레지에타와 루아네르가 다가왔다. 그들 특유의 어두운 기운 - 인간들이 '검은 마나'라고 하는 그것 - 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바보야! 왜 막아서서 이 난리야!"
"안돼- 죽지 마-!"

그런데, 큰 고통이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다.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푹 자고 일어날 것 같다. 내가 흘린 피를 보니 발톱이 꽤 날카롭긴 했던 모양이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슬슬 눈이나 감자 했더니, 누가 물을 붓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레지에타다.

"꼼짝 말고 있어, 바보야!"

픽 웃어버렸다. 바보는 누가 바보라는 건지.

"웃지도 마! 꼼짝 말고 있으라니까! 찍 소리만 했다간 한대 맞을 줄 알아!"
"...짹짹."
"이게 진짜! 농담할 기분 아니라고!"

농담 좀 던졌더니 까칠하게 바로 톡 쏜다. 주변에서 분주해지는 소리가 멀게 들린다. 그리고 루아네르의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도. 아마 상황 설명이겠거니 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어지는 물 양이 늘어난다. 이러다가 샘 다 마르는거 아닌가 싶을 무렵, 누군가 내게 다가온다.

"뭘 그리 물만 붓고 있나. 내가 치료하겠네."
"와! 장로님이다!"
"그래, 루아네르. 듣자 하니 이 사람이 너희 둘을 지켜줬다면서?"

가까이서 말하는 내용이어서 그런지 보다 명료하게 들렸다. 다크머더러 장로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자, 따뜻한 힘이 나를 감싸며 몸에 활기가 돈다. 그제사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몬스터들이 꽤 많다. 이 많은 몬스터들은 또 어디서 나온걸까.

"와- 치료 성공이다!"
"살아나서 기뻐! 히히."
"어쨌든 일어났네, 바보 용."

그들을 둘러볼 무렵, 그 장로라던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에는 울림이 섞여 있어서,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자네의 앞길에 미아메이스님의 축복이 있길 비네."
"축복이라니. 으음."
"허허허...상처는 좀 괜찮아졌는가?"
"덕분에. 아주 좋아."
"아이들을 지켜주어 고맙네. 그 아이들은 우리 종족의 보전을 위해 중요한 아이들 중 하나거든..."
"종족...보전이라고 했나?"

그들이 종족을 보전할 일이 있긴 한가 싶어 그에게 물었다. 들려온 대답은, 꽤나 절망적이었다.

"우리 종족은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네. 무분별한 사냥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각 종족별로 남녀 각 5쌍씩, 아이들을 데려다가 보호하기로 했다네. 이 아이들은 그 중의 한명이지. 더욱이 루아네르의 부모는 사냥당했기도 하고..."
"사냥당했다. 라고..."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내가 막긴 했지만...

"아이들을 지켜준 것에 대해선, 나 다크머더러의 장로, 라마나크가 끝없는 감사를 표하겠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자네 혹시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어줄 순 없겠나?"

아이들의 수호자. 순수를 지킨다는 점에선 꽤 좋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주인이 있다. 그렇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서 실망감이 느껴진다.

"그런건가..."
"뭐, 언제든 올 수는 있게 해달라고. 수호자 자리에. 혹 무슨 일 때문에 주인과 헤어지게 되면 그 일을 맡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길 안내 좀 해주겠나? 길을 잃어버려서 말이지."
"그래. 그렇게 함세. 은인이니. 자- 이쪽으로."

그들의 안내를 받아 수목신의 묘지 바깥으로 향했다. 저녁 노을의 빛을 피해 손을 살래살래 흔들며 나를 배웅하는 모습들이, 저들이 마물이라고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누가 그랬던가, 몬스터가 괴물이라고?


무너진 수중동굴에서, 테마리와 아델이 조사를 벌인다. 파르신, 그리고 라세다르와 놀다가 끌려온 테마리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보인다. 구시렁대는 테마리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기계들은 계속 돌을 치우고 있다.

"아, 진짜. 꼭 놀던 사람을 불러와야 돼?"
"그냥 해, 테마리. 상부의 명령이잖아."
"이렇게 되면받을 다이아 좀 확 늘려야겠어. 내가 누군데. 대륙에서 딱 50명밖에 없는, 전쟁에 나갔다 하면 한 중대정도는 코 파면서도 밀어버리는 S급 용병 중 한명이라고! 원래 S급 용병 고용료라 하면, '금액을 말하라, 그들이 너에게 갖다 바칠것이다.'가 정론이란 말이야! 이정도 기간씩이나 고용되려면 흔한 소국가 예산 1년치만큼은 그냥 받는 정도의 능력자가 난데! 저기 신성왕국 엘피스 1년 예산의 한 반 정도는 받아야 일하는 여자라고!"
"그만큼 보상이 있겠지. 좀 참으라고."

끄응 하고 미간을 짚던 그녀가 무언가 찾은 것이 있는지 그를 부른다. 그녀가 찾은 것은, 죽어있는 추적자였다.

"일격에 목이 부러졌어. 아마 그 놈 방패의 가장자리 부분에 맞았을꺼야. 흔적이 꽤 얇아."
"뭐, 이상한 말만 안했으면 상관 없어. 가령 입구가 여기라던가 하는 말 같은거."
"그러고 보니 칼라이아가, 그 여자의 인격이 계속 튀어나왔었대. 마지막 한 말은 마력의 근원이고, 죽는 순간에는 그 년 본래 인격이었다나 봐. 낙원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못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더더욱 상관 없지. 수거하자."

추적자의 잔해들을 수거해 낙원으로 전할 무렵, 그들의 눈에 또다른 뭔가가 들어왔다. 푸른 머리카락의 사내. 셀린과 함께 다니던, 성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사람은..."
"나랑 무승부 냈던 그 사람이네. 죽이자고."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죽이자는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왜? 네 옛 연인이라도 돼?"
"셀린의 동료잖아."
"아, 니 신부 동료라고?"
"신부가 아니야. 여동생이야. 11년 전에 헤어진 여동생..."
"그래서, 이 놈을 죽이는 거랑 그 사람이 네 잃어버린 여동생인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 애한테는...이별의 아픔을 이렇게 일찍 가르치고 싶지 않아. 아직 열 네살밖에 안된 아이야."
"나는 열 두살 때 부모가 눈 앞에서 죽는 걸 똑똑히 봤네, 이 양반아! 라세다르는 한 살 때고!"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고. 그 애는 아직 어려. 나하곤 달라. 곱게 자랐을거야."

결국 먼저 폭발해버린 쪽은, 원래부터 격한 성격이었던 테마리였다.

"대체 왜 그러는데! 지금에 와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넌 꼭 결정적인 순간에 감성적이야! 평상시엔 감성은 어디다가 팔아 잡수셨는지 모를 냉혈한인데, 이럴 땐 어디서 감성을 만들어 오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냥 언젠간 죽을 인간일 뿐이야. 그게 1초 후가 될지 1분 후가 될지 1년 후가 될지 아니면 10년 후, 100년 후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그리고 이건 그냥 우리의 적이야! 그러니까 들어, 좀! 현장 경험은 내가 더 많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고! 이거 하나 죽인다고 해도, 라테아던 낙원이던 둠이던 엘피스던간에 인구 수 변동은 거의 없어!"
"그 애는 어떤 위험이, 아픔이 존재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꺼라고. 11년을 온실에 갇혀 살았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격렬한 아픔은, 조금 늦게 가르쳐도 괜찮아."
"조금 늦게 가르쳤다간 우리가 조금 빨리 라테아로 이송될 수 있다는 거 몰라?"
"알아! 하지만...이렇게는, 이렇게는 아니야. 얼마나 충격을 받겠어. 나는 그 애가 무너지는 건 보고싶지 않아."

둘이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사이, 동굴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급하게 둘이 숨은 사이, 사람들 여럿이 테오도르를 발견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뭐? 빨리 꺼내!"
"그...그런데 지금 혼수상태고, 왼팔이 조금...!"
"돌들 최대한 들어내고 작업 시작해!"

그 소리를 들은 테마리가 미간을 짚더니 아델에게 분노를 담아, 나직이 속삭인다.

"잘-한다. 이게 뭐냐? 결국 니 말대로 됐네. 축하한다, 자상한 오라버님."
"입 다물어. 저 사람들이 아니었어도 내가 손수 데려다가 엘피스에 놓을거였으니까."
"아이고, 네-"

그들의 대화가 종지부를 찍을 무렵 테오도르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부실한 갑옷 탓에, 한쪽 팔이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메르헨이 깨어난 것은 석양이 뉘엿뉘엿 질 때 즈음이었다. 셀린이 걱정이 많이 되었던 듯 그를 끌어안았다. 다독여주는 손길이 꽤나 부드럽다. 클라이드야 뭐 늘 그렇듯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고...

"사제님, 왜 그래요?"
"옆구리가 시려워서."

그의 그 한마디를 조금 엉뚱하게 이해한 라이츠가 그의 옆구리에 꼭 붙는다.

"이제 따뜻하죠? 헤헤."
"떨어져...그 시려운게 아니야..."
"에이. 그게 아니면 뭔데요-"
"떨어지라고, 징그러우니까! 아악!"
"힘내요-"

그 말을 하면서도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라이츠를 떼어내기 위해 그가 안간힘을 쓴다.

"떨어져엇-! 징그럽다구-!"
"싫어요-!"

그 둘의 치열한 공방이 막을 내릴 무렵, 메르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테오도르 씨는요?"
"..."

전원이 침묵에 빠졌다. 이걸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하나...

"죽었어. 무너진 천장에 깔려서."
"그렇구나..."

생각보다 무덤덤한 반응에, 셀린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클라이드도 그가 조금 이상했는지 비슷한 내용을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앞선다.

"...포기해버린 거에요...?"
"야, 띨띨아. 왜 그렇게 덤덤하냐?"
"그 사람은, 아모르님 곁으로 돌아간 거니까. 분명 그 분의 축복속에 영생을 누리게 될테니까요."
"허! 이건 또 뭔 개또라...아니, 크흠. 뭔 헛소리야? 이게 마취제 한방 맞더니 정신을 라테아로 관광보냈나?"
"말 그대로요. 경전에도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순간 그의 뺨을 한대 강하게 친것은, 의외로 클라이드였다. 셀린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들었었지만, 살며시 손을 내려놓았다.

"이야,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더니. 진짜 근본없는 놈 중에 최고다 너. 언제부터 그런 개 병...크흠! 웃기는 사상을 품은거야? 사람이 죽으면 애도가 기본 아냐?"
"모든것에 우선되는 건, 아모르님의 말씀이어야 해요."
"야. 내가 너였다면, 그런 X신X끼 X병떨면서 개지X하는 소리는 안했을꺼다, 적어도 남들 앞에선! 이 근본없는 새X야!"
"경전은 덜 읽으셨나봐요? 거기에도 나오잖아요. 선인이 죽으면 라테아로 향하니 너희는 그 자의 죽음을 애곡하지만 말고 그가 라테아로 향함을 축복하라고."
"하. 이거 진짜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하는 말에 필터가 없구나? 광신도라고들 하지, 너같은 놈을. 광신도! 이게 불 속에서 신이라도 영접했나, 아니면 마취제를 맞더니 돌았나. 좀 생각하고 지껄여!"
"그만 두죠. 이야기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요."

먼저 폭발한 쪽도 물론, 클라이드였다.

"너 이 X같은 X끼! 한다는 말이 그 따위밖에 안돼? 너같은 X끼를 믿고 들여놓은 내가 바보 모지리 X신이지. 진짜 내가 17년 평생을 살다가 처음 본다, 너같이 지X맞은 X끼는. 너같은 놈을 내가 살던 곳에선 '고대주니어한테 잡아먹힐 X끼'라고 그러지! '아모르의 성수에 튀겨죽일 놈'이라고도 하고! 이 근본없는 새X야!"

메르헨이 그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마녀인 언니를 잃고 저주를 퍼붓던 소녀의 모습이었다.

'X자식! 언니를 괴롭혀서 그런 소릴 하게 만든거지? 찢어죽일 자식! 고대주니어한테 잡아먹힐 X끼! 아모르의 성수에 튀겨죽일 놈! 나가 X져버려!'
"크...클라이드 사제님, 설마..."
"뭐! 이 찢어죽여서 신전에서 사육되는 용들 간식으로 줄 X끼야!"

그의 거친 말에 심하게 놀라 바르르 떠는 셀린의 모습이 안쓰럽다. 라이츠는 벌써, 메르헨이 꺼낼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엘피스로 치지도 않는 어두운 자들의 도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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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는 이름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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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성장배경은 캐릭터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클라이드가 그런 경우입니다. 메르헨은 한가지 큰 경험이 영향을 크게 준 것이고, 클라이드와 아델레온은 성장배경이 조금씩 천천히 영향을 끼친 경우입니다. 물론 라이츠는 천성이 그렇고, 과거도 빈민가 치곤 밝으니 논외.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 소설의 인물들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뜬금없이 캐릭터 붕괴나 설정 붕괴를 일으키진 않을거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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