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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검은 혁명 - 7. A New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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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017.04.19



(진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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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A New Order

우리 동네는 오늘도 우중충해. 엄마 우산 안 가져갔는데 비는 오고. 나가고 싶은데 내가 있는 방의 문은 잠겨있어. 싫어. 나가고 싶은데. 문은 낡아서 끼긱끼긱 괴물 소리를 내고, 비는 쏴아아, 천둥번개가 우르릉 콰광. 무섭냐고?

아니.
다리 사이로 뭘 질질 흘려가면서 비 맞을 그 여자 꼬락서니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는데.


나는 평범한...아니, 평범하진 않구나. 엄마는 날 혼자 낳았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그러는데, 엄마가 날 낳자마자 내뱉은 말이 '저거 좀 치워버려요!' 였다나 봐. 그러고서 핏덩이인 날 쳐다보지도 않았대. 그래서 욕 좀 얻어먹고, 어디에선 유리병이 날아와서 그 여자 머리를 맞췄다더라. 피가 나도록 세게.

근데 난 그런거 관심 없고...

엄마는 매일 얼굴에 뭘 잔뜩 처바르고 나갔어. 얼룩덜룩하게. 그런다고 예뻐지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항상 나를 때려. 그러면 맞고 있어야지. 멍들고 아프게 맞고 나면 나를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가. 그러면 항상 울었지. 훌쩍훌쩍, 작게. 들었다가는 또 맞을테니까. 이게 익숙해.

집을 나갈 생각? 해본 적 없어. 그도 그럴것이, 나는 아직 큰 사람 키에 맞춰진 의자에는 혼자 앉기 힘들 정도로 어린걸. 혼자선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려빠진 애X끼. 그게 엄마라는 여자가 날 부르는 방식이었어.

아, 내 이름?
아직 없는데. 매일 '야!' 아니면 '이 애X끼야!' 하고 불렸으니까.

그럼 나이?
내가 몇 살인지 난 모르겠고...
다만 한 가지. 내 엄마라는 여자는 푸념할 적에, 질리지도 않고 매번 '내 나이 스물 둘에 벌써 애엄마라니...' 라고 지껄이더라고.

그러고 보면, 항상 엄마는 나에게 말했어. 너는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그게 나한테 하는 유일한 말이라서,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참 좋았어. 그런데 그러면 엄마가 나를 때렸어. 이 애는 때려야 정상인처럼 질질 짠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흉내를 내줬더니 그건 그거대로 싫대. 저것 좀 치워버리랬어. 혐오스럽댔어. 엄마가, 나한테. 엄마는 내가 간신히 만들어서 뻗어낸 손길을 항상 쳐냈어. 쳐내진 손이 아픔을 남기고 사라져. 나는 누구한테 의지하지? 누가 날 잡아줄까? 나는, 나는.

...내 기분은 지금 어떻지? ...그래. 화가 나고 싫어. 그거였어. 날 쳐내고 싫어하는 저 년이 싫어 미치겠어. 난 이렇게 감정이 있는데, 저 여자는 왜 저러지?


어느 날이었어. 따뜻한 봄이었고. 엄마가 나를 깜깜한 방 안에 넣어버리고 문을 잠갔어. 나같은 거 꼴도 보기 싫대. 왜일까? 난 그냥 꽃을 가져왔을 뿐인데. 엄마가 좋아할 거 같아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희망의 숲에서 예쁘고 향기좋은 꽃들을 꺾어다 줬을 뿐인데.

너무너무 슬프고 무서웠어. 바들바들 몸이 떨렸어. 그래서 막 울고 소리쳤어. 깜깜한 방에서. 그게 전부였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그랬더니 엄마가 소리치더라. '이 애X끼야! 입 안 닥칠래!' 하고.

울지도 못하고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신기한 걸 봤어. 꼭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반짝이. 그걸로 문을 찔렀어. 몇번, 또 몇번. 계속하니까 문이 부서졌어. 그대로 도망쳐 나왔어.

그 여자가 화를 내면서 날 잡으려 했어. 무서웠어.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어. 내가 칼을 잡고 던져서 여자 머리를 맞췄거든.

사람은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칼을 던져서 사람을 찌르는 게 제일 좋은 일이야. 그걸 왜 이리 늦게 깨달았는지 모르겠어.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이 가졌던 금색 동그란 조각들을 가져다가 가게에서 빵이나 물, 우유따위의 먹을 것하고 바꾸지. 여기가 돌아가는 건 대충 알아. 손에서 던져진 칼이 빨간 물을 보이면, 사람이 쓰러지고 노란 반짝이가 나오지. 그러면 오늘도 한 끼 해결인거야.

가끔 하얀 반짝이가 떨어지는 날은 운 좋은 날. 그러면 보석은 달 세개가 그려진 간판을 단 집으로 가져가. 그럼 노란 반짝이로 만들어주거든. 오늘도 일을 끝내고 평소처럼 돌아섰는데, 누가 내 옆에 있더라.

"누구야? 사람은 왜 죽이는거야? 살인자도 아니고."

살인자. 아마 새로운 이름이겠지?


메시아 - 상급 - 계급인 알타이르 벨라트릭스 나이트쉐이드의 하루 일과는 미치도록 단순했다. 바로 순백의 마을과의 친선을 위한 활동. 그 미치도록 한가한 업무에 갇혀 무료한 - 물론 하도 해달라는 것이 많아서 한달 전 쯤에야 한가해진 것이지만 아무튼 - 시간을 보내던 그를 본 칼라이아가 뭘 좀 맡길 심산으로 자신의 연구동으로 불러오기 전까진.

그가 그 곳에 처음 당도해서 본 것은, 현재 제작 과정에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였다. 그녀는 그것을 '궁극의 병기, 데모크라틱'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를 부른 것은 그 일 때문이 아니라고도 했다. 

"내가 보여줄 건 따로 있단다, 메시아 씨."
"...알겠습니다."

조금 더 그녀를 따라가자, 수많은 방이 있는 통로가 나오고, 그 중 한 방의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곱게 꾸며진 방과, 그의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이었다.

"인사해. 로디아야."
"..."

로디아라고 불린 여인은, 우울한 혹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굳이 그렇게 정규 복장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로브의 정규 복장을 살짝 손만 본 채 입고 있어서 드러난 부위라고는 손과, 옆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인 목과 머리카락 약간 뿐이었으니까.

"왜 그래? 겁이라도 먹은 거야?"
"ㅁ...무서워..."
"걱정 마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가 손을 뻗자,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차차 번져나가더니 이내 처음으로 그에게 들릴 소리를 만들어냈다.

"싫어요!"

그 소리와 함께, 로디아를 기점으로 하는 충격파가 앞으로 나아가며 그 앞에 있던 알타이르를 강하게 밀어냈다. 쾅 하고 밀려 벽에 부딪힌 그가 머리를 매만지며 주섬주섬 일어서자 그녀의 표정이 공포로 점점 더 얼룩진다.

"크으...아야야..."
"저...저리가..."
"로디아, 사람 말을 좀 들어라, 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아...아니에요? 제...제가 잘못했나요?"
"어엄-청 많이. 이 사람은 내 직속 부하란 말이야..."
"죄...죄송해요!"

칼라이아가 상황 설명을 위해, 그녀를 밖으로 불러내려 했지만 그녀는 뭐라 웅얼거리며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조심 뒤로 물러서며, '밖은 위험해요!' 따위의 소리를 하며 방 안에서 전혀 나오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분위기인 방 안에서는 오르골 하나가 고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오르골 소리가 좋네."
"아...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에요. 칼라이아님이 주셨어요."
"고맙지?"
"네. 브로치 주신 것보다 더요."
"그리고 말이야. 저 사람이 앞으로 너를 돌봐주게 될 거야. 그런 의미에선, 신고식 한번 격하게 치뤘지, 벨라트릭스?"
"...알타이르라고 불러주십시오...애초에 그건 중간 이름 아닙니까..."
"확 벨라라고 부르는 수가 있어!"
"...예, 예."

그녀는 로디아에게 짐을 싸 두라고 일러둔 후, 바깥으로 알타이르를 불러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애 귀 봤어?"
"예. 물갈퀴 귀..."
"저 애는 처음으로 성공한, 프로젝트 올림피아의 알파 타입이야."
"프로젝트 올림피아요...? 아직 안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아이, 그러니까 프로토타입 외엔?"
"티에레 하르디움이라는 보물을 찾아냈거든."

티에레 하르디움. 그 또한 풍문으로만 들은 이야기였다. 검은 로브가 한번 멸해지기 전에, 그 당시의 흑마법과 과학 기술들을 전부 적어뒀다는 거대한 책. 그녀가 지금, 그걸 구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의심이 간 그가 재차 질문했다.

"정말로 그 책을...?"
"사실 예전에 누가 본떠놓은 사본 한 장. 하지만 말이야, 이 한장만으로도 알파타입의 제작에 성공했다고. 맞아. 네가 저 소심한 알파타입 여자애를 좀 돌보면서, 관찰도 좀 해줬으면 해. 용인이라는, 유전학적으로 인간과 드래곤의 경계를 허문 종족은 아마 처음 만드는 것일 테니까. 그 여자애, 봤지? '싫어요' 하고 소리 한번 지른 걸로 사람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괴물이야. 다음 작들이 너무 기대돼. 맞아, 이런 자료도 있어."

그녀가 동영상을 틀자 영상이 재생되었다.

로디아의 주변을 수많은 죄인들이 둘러싸고 있다. 칼라이아가 그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듯, 그들이 전기충격에 괴로워하고 신음한다. 바르르 떨던 그녀는 귀를 꼭 막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녀가 계속 조용히, 칼라이아가 있는 공간으로 소리를 전송하는 스피커에게만 들리게 속삭인다.

"그...그만. 그만해...그만...싫어...싫은 소리가 나...저...저리 가...!"

괴로워하는 소리가 이어지자, 그녀가 크게 소리친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느끼는 고통과 절박함이 그대로 배어나는 소리였다. 

"그만! 듣고 싶지 않아! 아아아아!"

그러자 장치의 스피커는 삐이이이 하는, 괴로움을 자아내는 소리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죄인들도 괴로운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들이 하나하나, 머리가 없는 시체가 되어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유리창은 피와 살로 도배를 한 것 처럼 보였고, 이내 모든 죄인이 사망할 때 까지 삐이이이 하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공포를 숨과 함께 내뱉는 소리를 끝으로 영상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문자 그대로, 괴물같은 능력이로군요."
"다만 단점이 있어. 저 녀석, 오르골을 항상 끼고 다니는데, 그 이유가 예쁜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나봐. 거기에 한번 갇히면, 억지로 빠져나오게 하긴 힘들어. 그 안에 갇히는 거지, 한 마디로."

아마 지금도 갇혀 있을껄? 이라고 덧붙이고는, 그녀가 문을 열고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슬슬 출발 준비 하자고!"
"..."
"로디아! 니 방 옮길꺼니까 준비해!"
"아...네."

여행용 가방과 문제의 오르골을 든 그녀가 조심스레 문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듯 사박사박, 조금씩 옮겨진다.


한번 화를 폭발시키고 났더니 그나마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클라이드가, 메르헨이 걱정되었는지 그에게로 다시 향하려 발길을 돌린다. 그러고 보면, 뭔가 하나 급히 들려서 들어간 것도 같다. 가만히 생각하며 서있던 그 때, 레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캬우우-"
"아, 너냐? 메르헨 용."
"갸아- 아? 킥킥. 그릉."

기묘한 소리를 내고 나서는 헛기침을 하고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모습에 클라이드가 픽 웃는다. 그러더니 이내 레넬의 옆에 있던 벤치로 가서 푹 앉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레넬을 바라본다.

"너는 글자 쓸 줄 모르지?"
"크...캬악!"
"알아, 원래 못 쓰는 거. 그 기묘한 와이번이 특이한거고."

그가 고개를 끄떡끄떡 하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는 다시 심심해졌는지, 레넬을 계속 귀찮게 군다.

"야. 니 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그...그르으..."
"말해봤자 나야 못 알아 듣겠지만서도. 그럼 한가지만 더. 내가 영웅이 어울릴 거 같냐, 아님 악당이 더 어울릴거 같냐?"

용은 그저 고개만 갸웃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됐어- 너랑 얘기를 한다고 이러고 있는 내가 모지리지. 주인은 병실에 있다. 너는 못 들어가겠지만 말이야."

킥킥대며 들어가는 그를 향해 용은 캬악 하는 소리를 한번 내고는,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런 용을 한번 돌아본 클라이드가 병실로 되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왼쪽 팔이 어디론지 도망가버린 테오도르. 그리고 굉장히 냉랭한 메르헨의 표정과 냉랭한 분위기, 그리고 냉랭하게 굳어있는 공기였다.

"사, 살아있었냐...? 모지리야! 죽은 줄 알았잖아!"

약간이나마 기뻐보이는 표정이었던 클라이드의 표정을, 메르헨이 바로 굳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빠지시겠다구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내 의견은 존중해주길 바래. 너보다 몇 년 정도는 연장자니까 말이지. 넌 지금 기댈 곳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종교에 미치고 있다고."
"하지만 제가 의지할 곳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종교에 빠져서 자신을 잃는 사람이야. 그 무방비 상태의, 딱 봐도 폐인인 남자를 베려고 했던 건 옳은 일이 아니었어. 그 누가 봐도!"
"이단은 사라져야 한다구요. 우린 정의고 그들은 악이에요! 우린 정의를 위해 뭉쳤고, 정의의 조직이에요."
"그래. 그건 맞..."
"악은 전부 죽여버리는 정의의 조직이죠."

안그래도 냉랭한 대기를 더 냉랭하게 굳히는, 그의 차가운 말투와 목소리, 그리고 살벌한 내용에 모두가 얼어붙고 말았다. 으레 그렇듯 클라이드만 빼고.

"...띨띨아. 너 사람 생명을 은근히 드래곤 먹이 값으로 보는구나?"
"그들은 단지 악일 뿐, 인간도 뭣도 아니에요."
"허. X미. 이런 정신나간 놈을 다 보겠네."
"클라이드님. 그만 둬요. 더 이상 저 녀석의 생각을 막을 길도 없고 하니..."

포기. 그의 눈빛은 분명 그랬다. 클라이드가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거리고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쳐 가까스로 진정한 셀린을 다시 깜짝 놀라게 했다.

"좋아. 살인마가 되든 광신도가 되든 네 멋대로 해! 대신 내 지시에 따라,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네 안의 정신나간 신이 뭐라고 지껄이던 나불대던 간에! 알아들어? 알아듣냐고, 이 정신나간 광신도 새X야!"

클라이드 입장에서, 지금의 메르헨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존재였지만 이용해먹을 가치는 있었다. 바로 저 신을, 그리고 복수를 향한 터무니없는 열정과 저 광신적인 모습.

사실 광신적인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그로써는 심각한 아이러니였지만, 그는 그 모습을 확실하게 이용해 먹으려고 생각했다. 처음에 진지하게 협력을 요청, 아니 요구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메르헨도 그닥 달갑지 않은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반대입니다. 클라이드 사제님."
"...왜? 얘가 광신도라 그래?"
"저희들끼리 가는 게 어떨까 하구요. 전력 손실인건 알지만, 성기사들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손실을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리야. 마을에 더 폴른인지 뭔지 하는 정신나간 놈 하나 못 들어오게 막는것만 해도 벅차서 뻥뻥 뚫려. 거기다가 성기사 하나를 갖고 놀다가 질리니까 반으로 쪼개버리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감옥을 다 엎어놓고 간 흑마술사인지 전 사제인지도 있어. 걔네들은 신경쓸게 너무 많으니까, 동원은 힘들지."
"그렇다면 저희와 협력중인..."
"성십자단을 동원하기에도 힘들어. 이 암살에는 영 재주가 없는 수습 꼬마 녀석 하나 고용하는 데에 든 돈이 생각보다 작지가 않다고. 미안한데, 이번 한번만 참아주면 안되냐? 이건 그쪽이 알다시피 이 국가의 명줄, 아니 생명이 달린 일이니까..."

테오도르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근처에 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걸쳤다. 셀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래 걸렸을 그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그는 병동 밖으로 나가버렸다. 더 이상 메르헨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메세지. 망연자실한 채 밖을 바라보는 클라이드가 메르헨에게 다시 화풀이를 시도한다.

"잘 한다. 모지리 X신 새X야. 덕분에 꽤 괜찮은 전력이었던 저 성기사가 관둬버렸잖아. 대체 내가 돌아오기 전에 무슨 말을 지껄였길래 저게 저러는거야?"
"단지 그들이 선할리 없다고 말한 것 뿐이에요."

침묵. 클라이드가 으레 그랬듯 메르헨의 머리를 콱 쥐어박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난끼라거나 애정 표현이라거나 하는 것은 반푼어치도 없었다.


꿈에 헤로디아는 누군가를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용을 만났다. 아모르의 옥좌에 앉은 붉은 비룡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는, 갑작스레 입을 열고 저주의 말을 쏟아붓는다. 그녀는 그 용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아델과 엔타르를 버리고 그 쪽 사회로 가니 속이 시원한가, 반려자를 버린 인면 수심의 여자, 젖먹이 때부터 아들을 밀어낸 매춘부?"
"그, 나는."
"감히 변명을! 사형! 네년은 사형이다!"

그러고는, 멀찍이로 떨어져 내려가는 느낌. 그러다가는 꿈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잔재는, 그녀를 붙들지 못하고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떨어지는 것만 기억났을 뿐.

'떨어지는 꿈은 키 크는 꿈이라던데...'

다 자란 자신이 무슨 이런 꿈을 꾸나 싶은 마음에, 오르골을 튼다. 으레 그렇듯 오르골은 맑고 깨끗하지만 슬프고 기괴한 소리를 낸다. 소리가 들리자 공작이 깬 듯 부스스 일어난다.

"오르골 좀 끄지."
"잠을 설쳐서요. 잠이 들기 시작하면 닫을께요."

이곳에 와서 부유한 삶은 받았지만, 댓가로 행복을 잃었다. 한번 밖에 외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창문 너머를 내다보니 해가 산 허리에 걸쳐져 있다. 그러고보니 옷을 사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골을 덮자 그가 나를 바라본다.

"잠은 좀 드나?"
"아니요. 그것보다, 옷을 사지 않은지 꽤 된거 같아서. 산책도 좀 필요하고요."
"그럼 나가보도록 해. 난 한 10시 쯤 일어나지. 피곤해서 말이야."

분명히 어젯밤에, 돈 계산이 무언가 어긋났던 것이리라.

"다녀올께요."
"...그래. 하암-"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우연히 손에 잡힌 검은 옷을 입고는 슬슬 걸음을 옮겨서, 광장 방향으로 향한다.
주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불여우라는, 나를 향한 비난이겠거니 하고 자리를 옮겼다. 빈민가에 들어서자, 술이 덜 깬 한 남자가 내게 술병을 집어던지며 소리친다.

"X년! 나가 X져라!"

병은 간신히 피했지만, 심장이 너무 두근거린다.
격한 박동을 억누르고 간신히 도착한 옛 집. 세월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갈라진 나무 벽이 안쓰러워 보인다.
문을 열자, 그가 보인다. 책상에 엎어져 자고있는 모습.
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바짝 마른 몸을 간신히 덮고 있는, 그의 새하얬을 가운은 이미 온통 찢어지고 해져서 거적이라고 하기에도 힘들 정도였다. 그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제야 입을 연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아무튼 어서 오게. 무슨 일인가?"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마음을 잠시 눌러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 된 벽시계는 내가 도망쳐 나온 시간, 12시 30분 경에 맞춰진 채 멈춰 있다. 몸서리쳐지는 것을 애써 누르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그는 이미 자신을 놓아버린 듯,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셀린의 지금 키 높이보다 조금 낮지만 거의 비슷한 위치다. 분명 헛것을 보는 거다. 무언가가 내 등을 타고 기어오른다.

그 아이를 두고 왔더라면. 그랬다면 그도 이렇진 않았을까?

"이 아이가 내 딸, 셀린이라네. 제 엄마를 닮아 얼굴이 고와. 이 눈썹만 나를 닮지 않았어도 아마 엘피스 제일가는 미녀가 되었을텐데 말일세. 그렇지 않나?"
"그...그러게요."

두려움이 나를 옥죌 무렵, 그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자네...사라져버린 부인을 닮았어. 그것도 아주 많이. 새삼 옛날 생각이 나는군. 오르골을 하나 줬었지..."

오르골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붉은 용의 소리. 용은, 증오와 분노가 끓어넘치는 눈을 하고는 창을 통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르르르르...크르르르...크아아아아악! 캬아아아!"

용이 곧 작은 불덩이 하나를 나에게 토해냈고, 그 모습에 놀란 전 남편이 불덩이를 향해 컵 속에 든 물을 뿌렸다. 치익. 사라지는 불덩이. 그러고도 용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나를 향해 제 이빨을 들이밀어 날 물려고 용을 쓴다. 내가 들어왔던 문으로는 제 팔을, 정확히는 날개 약간을 들이밀어 마구 휘둘러댔고. 집안에 얼마 남지 않은 집기따윈 상관없이, 내가 죽기만 하면 상관 없다는 모습이었다.

"크아아악! 크아아아아! 캬아아악! 캬아아아아아! 크르아아아아! 캬악, 캬악, 캬아악! 크아아악!"
"이그나이트, 그만, 그만! 집안이 엉망이 되잖니! 셀린이 네 손톱에 긁힐 뻔 했어!"
"그륵? 그르륵, 캬우우우......"
"옳지...착하지. 집 안에서 그러는 거 아니란다. 셀린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알았니?"
"......키이이익."

셀린. 그 한마디에 용은 공격을 멈추고 슬픈 눈으로 돌아왔다. 스윽, 용이 얌전히 머리와 팔을 빼냈고 문에 공간이 남게 되자, 바로 집 밖을 나왔다. 분노와 눈물이 눈에 꽉 찬 용이 바닥에 끼적이는, 휘갈겨 쓴 악필이 내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고 후벼팠다.

'헤로디아 더러운 년 왜 여기 왔어 엔타르 가진거 아델 가져온거 다 뺏으려고 왔지 금쪼가리에 보석에 몸 갖다 팔아버린 창년 나 다 알아 모를줄 알고 개같은 년 나가 죽어버려 쓰레기같은 년'
"이그나이..."
'주둥이 닫아 X년아 너 아델 비뚤어지게 했어 엔타르 미치게 했어 망할 년 아델 마을에 가면 도둑놈 불여우 아들 소리 들었어 그거 아델 심장 후벼팠어 알아 엔타르 셀린 잃고 두번째 업적 잃으니까 무너지기 싫어서 자기 직접 상상 속 셀린 만들어냈어 알아 알고있냐고 버러지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쓰레기보다 못한 년 지금 엔타르 만든거 너야 지금 아델 만든거 너야 너야 너라고 버러지년 너 하나 때문에 착했던 아델 비뚤어졌고 예쁜 셀린 배너티 공작 장신구 됐고 누구보다 착하고 성격 좋았던 엔타르 미쳐버렸어 왜 아직 살아있어 너같은 찌꺼기년 죽어야 돼 X져버려'

버티기 어려운 거친 말들이 이어졌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쓰여지는, 마지막 한 마디.

'X같은 화냥년 길바닥 쓰레기처럼 돈 필요하면 아무한테나 가서 다리 벌린 년 당장 꺼져 나 불 뿜으면 여기 사람 집 다 타니까 너 여기서 안태울 뿐이야 돈에 환장하고 발정난 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용이 써내는 무시무시한 저주에 쫒겨 그대로 도망치듯 달려나왔다. 뒤에서 그 용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하고 빈민가를 빠져나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자, 누군가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분명 과거 그의 물건이었던 왕립 마법공학대학의 후드를 뒤집어 쓴, 아니 그의 후드 안에 들어가 있는 소년 하나가 나를 보고 있다. 후드로 가려진 눈에서는 분명한 푸른 빛이 느껴진다. 바짝 마른 몸의 소년이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안녕."

소년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지만 그대로 다시 달렸다. 내가 지금 사는 곳 즈음에 도달해서야,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길을 되돌아 나가려는데, 그 소년이 다시 눈에 띄었다.

소년이 다가와 내 손에 지갑을 들려주었다. 내가 그렇게 모질었는데도, 선한 성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거, 떨어뜨렸어. ...엄마."

그 한 단어가 왜 이리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재앙을 불러오는 아이'를 두고 나온 것일 뿐인데도.

"요즘 잘 지내, 엄마?"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으레 그렇듯 그들이 나를 극진히 모신다.

"어서오세요, 배너티 부인!"

그 말에 정신이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소년이 나를 빤히 보다가는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사라져버린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옷을 몇 벌 고르고 그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다이아 몇개를 계산대에 내려놓는다. 으레 그렇듯 잔돈은 필요없다는, 하도록 강요된 말을 꺼내고는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딸애는 요새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아마 영웅 일 때문일 것이다.

내 아이가 무사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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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망상증.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망상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병이며, 심할 경우 환각까지 보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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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전부, 어쨌든 뭔가 켕기거나 말 못할게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중에는 쓰레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중 최고 독설가는 이그나이트입니다(...)

또한 현재, 남들 한번쯤 다 써보는 차원이동물을 계획중입니다. 물론 평범하게 정의의 편이 되엇다! 같은 건 아니고, 하나의 악인극이 될 예정입니다.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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