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연과 운명의 실과 끈
누군가의 인연은 잠깐 스쳐 지나가버린다.
누군가의 운명은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안경을 쓴 갈색 머리의 젊은 남성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잔디에는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 붉은 피 위에는 죽어가는 흑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소라노시타 유키하라.
머리 위의 별 모양 핀이 포인트인 예쁘장한 아이였다.
그런 예쁜 아이가.
지금은 피로 뒤덮혀 간신히 입을 떼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마코토라는 남자에게 익숙한듯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코토의 눈에 잠시 경련하듯 슬픈 빛이 일었다.
그러다 이내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정색하듯 말했다.
피식.
유키하라는 다 죽어가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말했다.
"냉정하네. 평소의 힛짱이야."
마코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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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년 전.
월의 종족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안녕."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린 마코토는 깜짝 놀랐다.
애써 침착한 듯 뒤를 돌아보니 까만 흑발의 아름다운 성인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넌 누구니? 침략자?"
당연히 침략자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는 순간 살해당할 테니까.
"...방문자입니다."
마코토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하하하하! 웃기시네~볼에 묻은 그 피 좀 닦고 말하던가! 하하하!"
'이런.'
상대를 죽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그는, 자신에게 피가 묻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민망함에 볼을 문질렀지만 이미 말라붙은 피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며 생각을 읽은 듯,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나는 침략자도 상관 없거든..
아, 나는 소라노시타 유키하라야. 너는?"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은 빛이 나는 듯 했다.
"....히노 마코토입니다."
나지막이 이름을 말하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애칭을 만들어 붙였다.
"좋아! 잘부탁해, 힛짱!"
마코토와 유키하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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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달 후,
유키하라와 마코토는 꽤 친해져 있었다.
오늘따라 유키하라가 더 앳돼 보였지만 마코토는 기분 탓이려니 했다.
대화를 하는 도중, 유키하라가 갑자기
결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힛짱, 나 말이야...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난 사실, 저주에 걸렸어."
마코토는 당황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조용히 경청하기로 했다.
"그래서요..?"
"점점 어려지는 저주.
미안, 처음 듣지?
난 내가 어쩌다 이런 저주에 걸렸는지 몰라.
성인이 된 이후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버렸거든.
나는 이대로 나이를 거꾸로 먹는거야.
점점 어려져서, 점점 작아져서
다시는 이 하늘을, 나무를, 너를..
영영 못 볼지도 몰라.
난 그동안 계속, 친구를 찾고 있었어.
이럴 바에야 차라리 친구를 하나 만들어서
그 친구의 손에 살해당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그러니 부탁이야, 힛짱.
날 죽여줘."
히노 마코토는 마지막 말에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죽여달라니,
사실 마코토도 유키하라가 처음으로 사귀는 친구였다. 그래서 더욱 떠나보내기 싫었다.
유키하라는 마코토의 눈에 띈 슬픔을 읽어내곤 한숨을 쉬었다.
"알아.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웠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줄게.
준비가 되면 말해줘.
대신, 그때까진 더 친구처럼 지내자?"
유키하라는 다시 평소의 웃음을 머금었다.
마코토는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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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하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뿌연 하늘 뿐이였다.
그녀는 과거 회상을 마쳤는지 조금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하지..그걸 어떻게 잊겠어. 하하."
마코토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라,
..벌써 가는거야? 힛짱.."
유키하라는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마코토를 불렀다.
"여기서 시간을 끌 순 없습니다."
기계적이고 차가운 말투.
유키하라가 좋아하던 말투였다.
"냉정해라..
응...역시 후회는 하지 않아."
마코토의 발소리는 멀어져만 갔다.
유키하라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편안해질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였다.
".....뭐야..
울지 않겠다면서.."
돌아가는 마코토의 볼에 눈물이 타고 흘러내렸다.
윽...
'마지막까지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코토는 잠시 멈춰서 목놓아 울었다.
이제 그와 그녀의 세상은 끝이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마코토의 머리를 쓰다듬고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역시 나도 후회는 하려나."
때는 10년 후,
노을이 아름다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