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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나의 영원 (4)

11 L/Vag
  • 조회수645
  • 작성일2018.11.09
1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mode=read&b_no=21039&type=writter&server=asia&keyword=L%2FVag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의 존재 뿐. 그 외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컴컴한 숲과 텅 빈 적막밖에 없다. 이곳 자체가 원래 그렇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한가운데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에 두 마리의 용들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가 듣고 싶으냐?" 늙은 용이 침묵을 깨고 돌연 물었다.

이어서 투덜거리는 뿌루퉁한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어린 아이의 것이였다. "싫어요. 할아버지는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해주잖아요. 그 이야기는 이미 열 번은 더 들었거든요?"

"그럼 어쩌겠느냐. 기억하는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는데."

늙은 용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불만스러운 아이의 태도가 제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야윈 앞다리를 들어 아이의 머리를 꿍 쳤다. 아이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그를 쏘아보았지만 무시만 당할 뿐이였다.

"듣기 싫어도 좀 들어라. 이제 이 세상에 이 얘기를 기억하는 용들은 우리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돼." 그는 아이의 불만에 개의치 않고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에는 왕이 다섯 마리였단다. 그들 중 다른 왕들은 각각 붉은 전사, 푸른 현자, 금빛 군주, 그리고 검은 책사라고 불렸지. 하지만 그 중 가장 위대한 왕은 단연, 하얀용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인—"

"—하얀 여안이죠? 이미 다 아는 건데." 아이가 지겹다는 듯 빈정댔다.

"…그래, 맞다." 늙은 용은 잠시 아이를 째려보다 고개를 젓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섯 왕들은 모두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휘하에 있는 다섯 부족들 역시 평화롭게 살아갔다. 특히 하얀 여안은 늘 책임감에 억눌려 지내던 다른 왕들과 달리 평화로운 삶을 가졌었지. 그런데 어느 날, 금빛 군주가 미쳐버린 게야."

"정말이지…맨날 들은 이야기지만, 금빛 군주가 미쳐버린 이유는 항상 납득이 안 되네요."

"아무튼! 금빛 군주는 말 그대로 모든 걸 가진 강력한 왕이였어.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안하고 고결한 삶을 누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더군. 그 와중에 가장 아끼는 친구였던 하얀 여안이 찾아와서는, 그가 최후에는 어둠에 집어삼켜져 영원히 잊혀질 것이라고 알려준 거야."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조금 움츠러들었다. 붉은 모닥불이 늙은 용의 격양된 목소리에 맞춰서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금빛 군주는 지레 겁을 먹었단다. 다른 용이 그렇게 말했던 거라면 그냥 헛소리겠지만, 말한 주체가 신묘한 통찰력으로 유명한 하얀 여안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리고 그건 그의 가장 친한 벗으로써 금빛 군주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였고.

"하얀 여안의 의도는 그가 정해진 끝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였지만, 도리어 금빛 군주를 끝없는 불안감에 빠지게 만들었어. 그는 졸지에 불안감에 미쳐서 자신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냈지. 자신이 역사 속에 영원히 남도록 모든 부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정신나간 방법을!"

아이는 어느새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채 늙은 용을 뜷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용은 내심 흡족해하며 웃었다. 좋은 이야기꾼은 아무리 질리는 이야기라도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다.

"금빛 군주는 자신을 따르던 부족인 황색용들 대부분을 이끌고 금빛용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다른 부족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머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지. 군주의 계휙이 성공으로부터 딱 한 발짝만 남아있던 그때, 마침내 하얀 여안이 나서서 그를 저지했단다."

"그래서요? 둘이 싸웠나요?" 아이는 긴장한 나머지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캐물었다.

"싸웠고말고. 무려 초대왕 두 마리가 서로 싸웠던 역사적인 전투였어. 비록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투라지만…아무튼, 그만큼 치열했단 거다." 늙은 용이 앞발을 불 위로 들어올려 휘휘 내젓자, 모닥불이 일렁거리며 반대편의 나무들 위로 위협적인 그림자를 지웠다. "전투는 무려 사흘동안 밤낮으로 이어졌고, 이대로는 서로만 더 괴로워질 거라는 걸 직감한 하얀 여안이 군주를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났지."

"그리고 여안은…"

"그 대가로 전투에서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채 쇠약해졌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지, 친우를 죽인 죄책감이라는 게. 그리고 그의 부족은…우리는, 왕의 결속을 잃고 붕괴되어 뿔뿔이 흩어진 거란다. 하지만 비록 흩어졌더라도,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절대 잊으면 안 돼."

"뭐예요?" 막상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는 김빠진다는 것 마냥 숨을 픽 내뱉었다. "순 엉터리. 결국 여안이 괜히 나서서 약해지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떠돌이 신세로 살아갈 일은 없었을 거란 거잖아요. 그런 왕은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낫죠."

"무슨 무엄한 소리를…" 늙은 용이 들쭉날쭉한 이를 드러내며 그르릉거렸다. "너같이 생각하는 용들만 잔뜩 있던 탓에 그분이 잊혀진 거야! 우리는 그놈들과 다르다고.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던 운명마저 버리고 친우를 구원하려 했던 게 그 분이시다. 그분의 백성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를 판에 그분을 잊으려 해?"

"하지만…하지만 할아버지도 힘들지 않아요? 다른 부족의 용들은 전부 살 땅이 있는데 우리만 땅 없이 힘들게 살고…"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거센 바람이 울부짖으며 덮쳐왔고, 모닥불이 위태롭게 깜빡거리다 간신히 형체를 유지했다. 두 용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옹송그리며 모였다. 이윽고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거침없던 늙은 용조차 반박할 말이 없는 모양이였다.

"…그래도 잊으면 안 돼.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분을 잊는다는 건, 우리가 스스로 그분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늙은 용은 헤질 대로 헤진 날개로 아이의 작은 몸을 감싼 채 누웠다. 언뜻 모닥불이 비친 그의 비늘은 비록 색이 바랬지만 분명한 하얀색이였다.

"기억해라. 만약 그분이 죽었더라도,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는 이상 그분은 영원해."

-

"…낌새가 좋지 않아요."

텅 빈 도서관 한가운데에 앉은 붉은 용이 중얼거렸다.

"낌새는 무슨 낌새. 한낱 책벌레 주제에 내 일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그의 옆에서 발톱을 다듬던 거대한 용이 신경질적으로 그릉거렸다. 그의 발톱은 작은 창문으로부터 새어들어오는 햇빛을 받자 강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한낱 책벌레가 아닌 왕실 사서입니다, 오그림 님." 붉은 용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그의 옆에 앉은 상처투성이에 매서운 용을 마치 유치원생인 것마냥 취급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는 당신의 일은 또 뭐가 그리 대단하죠? 장군씩이나 돼서는 제 딸이나 잃어버리고. 그래서 그 딸 찾는다는 게 일은 무슨 일입니까?"

한입거리도 안돼는 놈, 오그림이 숨죽여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걱정되는데 불길한 얘기 좀 그만해라, 일렉사. 지금 수색에 전혀 진전이 없단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비우고 직접 뛰어다닐 수도 없고…"

"진짜로 낌새가 좋지 않은 걸 어떡합니까? 당신 딸을 납치한 범인 말입니다. 제가 읽은 책이 몇인데, 하얗고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용 따윈 존재할 수 없다니까요?" 일렉사는 마침내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오그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초록빛 시선이 사뭇 진지했다.

"잘 들어봐요. 마법 중에 은신 마법이라는 게 있긴 한데, 일단 엄청난 고위 마법이라서 웬만한 대마법사가 아니면 못 쓰는 기술입니다. 마법이란 게 애초에 푸른용들의 전유물이라 다른 부족의 용들은 못 쓴다고요."

"알고 있어. 다른 건? 뒷조사 좀 해놓으라니까 알아본 게 겨우 그 정도냐?"

"…그럴 리가." 사서의 침착한 목소리는 핏대가 제대로 선 얼굴과 대비되었다. "하얀색 용에 대한 것 말인데, 어딜 찾아봐도 자료가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합법인 서적들 내에서는."

"책도 합법이랑 불법이 있어?"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헛기침 소리. "아무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자료가 없다잖아."

"자료가 있을지 없을지 누가 알아요? 아직 금지된 서적들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오그림은 열심히 발톱을 깎던 앞발을 멈추고 눈을 굴려 일렉사를 노려보았다. "그 금지된 서적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오그림의 태도에 일렉사는 은근히 놀란 듯 보였다. 그는 천천히 책을 내려놓았다.

"안 따지시네요? 법을 어기는 건 절대 안된다고 또 떼쓸 줄 알았는데."

장군은 심란한 표정을 한 채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법 좀 어겨도 뭔 상관이야. 루사가 납치됐다고."

"평소엔 일 때문이랍시고 딸은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넌 제발 입 간수 좀 잘해라, 엉?"

"—네, 잘 알겠네요." 사서는 겁먹기는커녕 태연하게 빈정거릴 뿐이였다. "아무튼 금지된 서적을 읽어보려면 푸른용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그림은 이마를 짚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책쪼가리 좀 읽는다는 게 남의 땅까지 찾아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인정하긴 싫었지만 싸우는 것 외엔 배운 게 없는 자신으로썬 이해할 수 없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훤히 보이네요. 금지된 서적들은 전부 오세란 왕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뭐? 그냥 푸른용도 아니고 왕?" 오그림이 황당해하며 뒷목을 잡았다. 왕이라는 건 그조차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용들 사이에서 거의 신으로 추앙받는 초월체가 록티무이고, 그런 그가 세운 직책이 곧 왕이다. 탄생부터 높은 위세를 지닌 자들이니만큼 만날 수 있는 것부터가 행운이였다.

"괜히 금지된 게 아닙니다. 보관보다는 봉인에 가까워요. 어찌나 위험한지, 보관하는 오세란 왕 그 자신조차도 열람이 금기시되고 있죠."

"왕 자신조차도 보면 안되는 걸 우리가 어떻게 봐?"

일렉사는 둥근 안경을 고쳐썼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내야죠." 그가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그날 처음으로 오그림의 얼굴에 진심인 분노가 떠올랐다. 그의 안면이 뒤틀렸고, 발은 그가 일렉사의 코앞에 멈춰설 때까지 사서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코에서 연기와 같은 콧김이 쉭쉭 뿜어져나왔지만 일렉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차분히 책을 덮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냐?"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허리를 꼿꼿히 펴고 팔짱을 낀 채 일렉사가 대답했다. "오그림 님처럼 저도 일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서라고요, 그것도 왕실의. 그런 제가 귀한 여가시간마저 쪼개가면서 당신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드리는 건데, 너무 많은 걸 기대하시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이데아 여왕님한테서도 직접 도움을 받으셨다면서요."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여전히 험상굳은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그림의 모습을 보며, 일렉사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그의 가슴팍을 발톱으로 쿡 찌르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대한 용의 턱 밑까지 머리를 치켜들었다.

일렉사는 잠시 그 자세로 오그림을 노려보다 고개를 홱 돌렸다. 의미없는 기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하려던 것처럼 보이던 그가 갑자기 밖으로 향하자 오그림은 서툴게 그를 불러세웠다.

"어디 가는 거야?"

"따라오세요. 만나야죠, 오세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일렉사의 모습에 오그림은 기가 찰 대로 찼는지, 이번엔 아무런 반항 없이 잠자코 그를 따라나섰다. 도서관 밖의 돌로 된 홀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했고, 지붕도 없는 하늘 아래에서 햇빛을 잔뜩 받은 바닥이 맨들맨들하고 따뜻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모두 각자의 일을 하러 간 것일 터이다.

각자의 일. 오그림은 머리 위의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할 일 역시 남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가봤자 왕을 만날 수 있을까." 그가 중얼거렸다. 반은 혼잣말이였고, 반은 스스로를 향해 겨냥된 질문이였다.

"거 답답하네. 루사 찾을 거에요, 말 거에요? 찾을 거잖아요. 그럼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든 일단 걸어보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

"그래, 맞지. 맞긴 한데…왕을 만난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잖아."

"맨날 얼굴 보면서 예삿일이 아니긴. 제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일렉사가 성질 사납게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이데아 여왕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하기야 오그림과 그녀는 업무 때문에 자주 마주치는 관계였지만, 그건 그녀를 보좌하는 장군으로써 당연한 일이였다. 그런데 부족들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데다가 급조된 평화 협정은 붕괴 직전인 지금 판국에 다른 부족의 왕을 만난다? 가능성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자칫하면 시도하기도 전에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짓거리다. 평소의 이성적인 오그림이였다면 이런 계휙 따윈 실행에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관철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끔은 조금 감정을 싣어 과감하게 부딪히는 근성도 필요하다. 물론 흥분한다고 모든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발치에서 발만 동동 구를 순 없으니까.

게다가 일렉사도 생각해둔 게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미련한 책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아는 게 많아서인지 이런 쪽에선 나름 유능한 녀석이다. 지금은 그라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오그림은 날개를 펼쳤다. 일렉사는 벌써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새하얀 태양 아래로 검게 드러난 그의 몸은 윤곽만 붉게 드러나 있었고, 그게 마치 끄트머리만 밝은 색으로 남겨놓은 먹으로 그려진 그림 같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 보면 알게 될 것이고, 가보지조차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게 되리라.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친 펄럭임과 함께 거대한 붉은 용이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벌써 먼저 출발했던 일렉사보다도 더 높은 고도에서 날고 있었다.

"덩치가 큰 용은 보통 비행이 힘든데, 그걸 단순 힘으로 상쇄해 버리다니…역시 뇌까지 근육인 근육덩어리."

높이차가 꽤 있어서인지 일렉사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일단 오그림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아대는 놈의 말버릇이 거슬렸다.

"좀 닥쳐."

오그림이 그의 옆으로 활강하며 내려온 뒤 거칠게 내뱉었다. 일렉사는 묘하게 기분나쁜 웃음을 흘렸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벌써부터 저 먼치에 푸른용들의 본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새하얀 성의 지붕이 구름 사이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밑을 보니 강과 작은 호수들이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고, 강을 따라 시선을 흘려보내자 저 앞에 훨씬 더 많은 강줄기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용들의 땅은 푸른용들의 것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도 굉장히 가깝고, 풍경도 꽤나 비슷하기 마련이다. 녹색의 숲과 평원은 이미 익숙했지만,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저 수많은 물이다. 푸른용들은 물을 좋아하고 그것에 매우 익숙하다. 그들 중 한 마리를 잡아다 날개를 잘라놓고 바다에 던져넣어도 살아나온다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니까 말 다했다.

"왕궁은 이미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서 가는 길은 외워두고 있다. 꽤 가까이 왔으니 이제 슬슬 앞서 가도 되겠지?"

"네? 뭘 앞서서…"

거의 폭발음에 가까운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오그림의 날개는 공기를 가르는 칼날 그 자체였다. 뒤를 돌아보자 일렉사는 이미 보이지조차 않는다. 바람이 매서운 속도로 옆구리를 타고 뒤로 불어갔고, 시야는 이미 온갖 것이 뒤섞여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이 정도 거리는 저 굼벵이 놈도 따라잡을 수 있겠지. 오그림은 넓은 날개를 낙하산 삼아 펼쳤다.

바람이 날개를 강타하며 피막을 짓이기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더한 것도 경험해본 그의 입장에선 큰 문제가 아니였다. 공기의 흐름이 멎어갔고, 눈앞의 광경이 점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귀 안으로 때려박혀지던 미칠 듯이 시끄러운 소음이 잦아들었다.

"느려 터진 책벌레 녀석." 그는 마른 입가를 슥 핥으며 혼잣말했다. "발 맞춰주느라 힘들었네."

괜히 여왕의 간택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만한 힘이 있으니 믿어주는 것이다. 몸은 우락부락하고 상처가 없는 곳이 없는데다 덩치까지 무식하게 큰 탓에 그를 자칫 아둔하다 여기는 용들이 많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뺀질이들일 뿐이다. 이랑 발톱은 장식으로 달고 태어나서는 상부에서 명령만 내려대는 뺀질이들.

수 쌍의 날개들이 펄럭이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오그림은 눈을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여섯 마리 쯤 되는 푸른용 경비병들이 일제히 그의 주위로 날아올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신원을 밝히십시오." 그 중 한 마리가 말했다. 전부 똑같은 검푸른빛 갑옷을 입고 입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어 지금 말한 용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마리의 덩치가 독보적으로 큰 것으로 보아하니, 그 용이 아마 경비대장이고 지금 말한 것도 그일 듯했다.

"뭔 신원을 밝히라는 거요?" 거대한 붉은 용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 땅에 날 모르는 자는 한 놈도 없을 판에."

그 대장격 되던 경비병의 투구가 무언가 따지려던 것처럼 덜컥거렸지만, 이내 다시금 평정을 찾고는 엄중하게 일렀다. "사전에 방문을 알린 적이 없다면 그 누구도 왕성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게 당신이라 해도."

"나도 당신들 시간 끌 생각 없으외다. 들여주기만 한다면 금방 돌아가겠소."

그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그림은 주위를 샅샅이 흝어보며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경비병들은 그저 이 상황이 곤란하기만 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허세가 아닌 진짜였다. 수많은 공성전을 치르며 악명을 널리 떨친 붉은 거룡은 이미 전설 속 영웅도 부럽지 않을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장군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자그마치 군대 하나를 혼자 거느리고 있는 터라 보복의 가능성도 충분했다. 경비병들에겐 마법이라는 거대한 이점과 자신들의 땅을 수호한다는 정당한 명목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오그림을 꺾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상대는 전투 상성은 무시하고 명목은 변명으로 여기는 앞뒤 분간이 없는 괴물이였으니까.

"누굴 만나려는 겁니까?"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와 오그림과 마주섰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결의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그래. 왕을 만나러 왔소."

그의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경비병들은 여전히 차가운 투구 뒤에서 표정 하나 없이 오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왕을 순순히 만나게 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였다. 일단 무력으로 뜷고 보는 수밖에.

오그림이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그때, 왕성 입구에서부터 푸른용 한 마리가 뛰쳐나와 황급히 경비대장의 곁으로 날아왔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는 무언가를 대장은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들어 오그림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해 보였다.

"왜 그러는데?" 슬슬 답답해진 오그림이 물었다.

"전하께서 들어와도 좋다고 하십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뜬금없이 왜? 단순히 왕이 지조가 없어서인 거라 하기엔 많이 이상했다. 애초에 이족의 장군을 그냥 들여보내줄 정도로 안일한 자였다면 금서의 보관만큼 중요한 임무는 맡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 누군가가 손을 써둔 건…?

"거 봐요. 내가 생각이 있다니까요?"

바로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가 말했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경비병들 뒤에서 날고 있는 일렉사가 보였다. 그가 정말로 어떠한 대비책을 준비해뒀다는 점은 치켜세워줄 만했지만, 어깨가 축 처진 채 헥헥대며 힘없이 날개를 펄럭이는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오그림은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속도는 좀 느리더라도 발을 맞춰주는 게 나았을려나…

"자초지종은 됐고 그럼 일단 문부터 좀 열어주시오. 이러다 애 죽겠다."

일렉사의 강렬한 눈총이 등 뒤로 느껴졌다. "누구 때문인데…"

경비병들은 머뭇거리며 땅으로 내려가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오그림과 일렉사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가 그들을 따라 풀 위에 발을 딛었다. 새하얀 벽돌로 지어져 있는 큰  성벽은 그 높이만으로도 압도적이였다. 거대한 문은 전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쪽에 있는 성도 그렇고, 푸른용들은 하얀색을 이상하리만치 좋아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비병 한 마리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아무런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 거대한 크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온갖 꽃이 즐비한 호사스러운 정원이 보였다. 투박한 붉은용들의 성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였고, 뭔가 알 듯 말 듯한 꽃들이 많았지만 화초에 관심이 없는 오그림으로써는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건 무리였다.

그 와중에 일렉사와 경비대장은 그새 친해지기라도 했는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통 은방울꽃 천지네요. 봄에 피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아직도 피어 있는 거죠?"

"마법을 사용해서 피워두고 있는 겁니다. 이 많은 꽃들에게 전부 마법을 거는 건 일반적으로는 무리지만, 전하께서 직접 걸어둔 거라 가능한 거죠. 게다가 그분이 이 꽃을 워낙 좋아하시다 보니."

"누구와는 다르게 미적 감각이 좀 있는 왕이군요."

…역시 내 얘기인가. 오그림은 만발한 꽃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못 들은 척 앞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자신의 흉을 보겠답시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던 침입자들 중 하나와 합세하다니, 이 경비대장도 여러모로 비범한 용인 듯 하다. 여러모로.

"오그림 님. 그보다 우리가 어떻게 왕의 허가를 받은 건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니, 전혀." 오그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보나마나 자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냈는지에 대한 자랑과,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그걸 해냈는지에 대한 한탄이겠지. 보장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의 성격상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거부를 듣고도, 일렉사는 그러든 말든 제 할 말만 계속 나불댔다. 

"제가 미리 전령을 보내서 전부 털어놨죠. 당신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것부터 그 범인이 비늘이 하얀 용이라는 사실까지 전부. 그러니까 들여보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요?"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오그림은 윽박지르려던 것을 애써 참으며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남들의 궁전에서 추태를 부렸다가 그기 이데아 여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쓴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부족들은 당장 전쟁이 시작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붉은용들과 푸른용들은 국경을 공유하는 탓에, 수백 년 전의 대 금빛용 전쟁 이래로 마찰이 잦았다. 그 빈도는 두 부족이 오래 전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적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에게 붉은용들 내부의 실정을 곧이곧대로 알려준다? 굳이 같은 붉은용이 아니더라도, 많은 용들이 그 결정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해서,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그 안에서 이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제 푸른용들의 왕이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알게 된 이상, 그가 그 정보를 이리저리 제 입맛대로 뒤틀어서 이용할지도 모르는 셈이다. 왕의 직위는 한때 명예를 중시하는 자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허울뿐인 규율에 얽매이는 왕은 한심하다 치부되고,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는 왕만이 진정한 지도자라며 칭송받는 시대인데. 지금 자신의 꼴을 그가 발설할지 누가 알겠는가?

왜 자신의 통행을 허락해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재수없는 왕이라면 새로 얻은 제 약점을 쥐고 저를 해코지할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교묘한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잘못된 길에 놓이게 할 속셈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자기 땅에 멋대로 들어온 붉은용들을 순순히 도와준다' 는 결과의 반열에도 끼지 못했다.

일렉사는 고서를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자신이 그 옛날의 평화롭고 나른한 시절들에 머물러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오그림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다 생각이 있다는 그의 말을 신뢰한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 용은 성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흰 성벽은 어찌나 윤이 나는지 표면에 흠집 하나 없었고, 문 양옆의 창문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위치해 있었다. 이런 쓸데없이 완정한 성을 지은 걸 보면, 푸른용들의 왕은 이상한 결벽증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막상 와보니까 오지 말걸 그랬나 싶어지네요, 은근히."

"네가 제안한 거잖아." 오그림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말했다. "말을 했으면 그 책임을 져."

성 안은 바깥의 정원만큼이나 밝았다.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푸른용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개중에서는 아예 앞으로 나서려 하는 이들도 보였다. 거의 모두가 오그림을 알아본 듯했고, 그만큼 심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여왕 없이 혼자 성까지 들어온 적은 지금이 거의 처음이였다. 불필요한 적개심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의 태도가 중요하다.

경비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성 밖으로 잽싸게 날아 사라졌다. 알아서 처신하라는 건가. 오그림은 허리를 곧게 펴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용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매우 어려웠다.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른용들의 왕이라. 막상 들어와보니 이 넓은 성에서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붙잡아서 길을 물어보기도 뭐한 것이, 딱히 푸른용들과 말을 섞는 게 내키지도 않았다. 저렇게 대놓고 의심하며 무례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는 더더욱.

정처없이 성 안을 들쑤시고 다니면 성과는 커녕 구경꾼들만 더 몰려들 게 뻔했다. 내키든 않든,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였다. 오그림은 최대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곳의 주인…그러니까 오세란 왕을 찾고 있다만."
"그분을 왜 찾고 있나? 붉은용들같은 야만인들을 만나고 싶어하실 분이 아니신데."

오그림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몰아붙였다. 수많은 푸른용들 사이에서 호리호리하고 비쩍 마른 용 한 마리가 거만하게 걸어나왔다. 비늘은 진흙에서 한바탕 뒹군 것처럼 거무죽죽한 남색이고, 눈은 살얼음처럼 희번득거리는 데다가, 볼 게 뭐가 있다고 몸 곳곳을 보석으로 우스꽝스럽게 치장한 꼴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일렉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괜한 시비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을 그가 웬일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왕이 허락한 알현입니다. 자신이 들어야 할 내용을 지금 당신에게 먼저 불어버리면 그분의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겠죠?"

상대의 말과 같이 생긴 그 얼굴이 흉한 우거지상을 지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중간에 꺾여 올라간 그의 꼬리 끝이 분노에 치르르 떨렸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는 다시 그림자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그나마 친절해 보이는 푸른용 한 마리가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오른편의 통로로 들어가라고 일러주었다. 오그림은 짧은 감사인사를 건넨 뒤 곧잘 통로로 향했고, 일렉사는 찝찝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 그를 뒤따랐다.

"웬일로 나섰냐, 네가."

"반가운 얼굴은 아니거든요, 저 용. 온갖 엉터리 망상을 책이랍시고 공장 기계처럼 찍어내는 걸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자랑할 게 뭐가 있는지, 제 괴악한 낯짝을 나오는 책마다 싣고 있어서 바로 알아봤죠."

"너랑 내가 마음이 맞을 때도 있네. 말하는 게 끔찍하더군."

일렉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오그림의 등을 꼬리로 탁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는 바깥쪽에 비해서 조금 서늘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차가운 하얀색의 대리석 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 이 성은 온 곳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끔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붉은용들의 돌 성전에 적응되어 있던 둘에게는 아직 불편한 공간이였다.

통로 끝에 뜬금없이 작은 문이 보였다. 우아한 흰색 왕궁과 으리으리한 성문과는 어울리지조차 않는 평범한 나무 문이였다. 외진 곳의 헛간에서나 볼 법한 허름한 문짝 말이다.

오그림은 미심쩍게 문을 두드려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문 뒤로부터 희미한 풀내가 물씬 풍겨왔다.

"이런 데에 왕이 있다고? 길 제대로 알려준 거 맞아?"

"일단 들어가 봐요."

그는 마지못해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좁은 통로를 힘겹게 빠져나왔다. 어깨부터가 틈 사이에 걸려서 쉽지 않았다. 비교적 몸집이 작은 일렉사는 답답하다는 듯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쳐대다가, 그가 마침내 반대편으로 나오자 여유롭게 지나왔다.

짙은 꽃향기가 훅 풍겨왔다. 오그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온 곳의 벽면이 마치 천체 투영관처럼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고, 바깥의 강렬한 햇빛과 가세하여 눈부신 빛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좁은 계단을 제외한 공간은 전부 온갖 식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집채만한 나무가 한 쪽 구석에서 자라고 있는가 하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눈에 띄지조차 않을 정도로 낮게 자라는 이끼도 있었다. 계단은 방 중앙에 지어진 돌로 된 기둥의 꼭대기로 이어졌다.

기둥 위에는 기껏해야 일렉사보다 조금 더 클 정도로 평범한 크기의 용이 서 있었다. 그곳이 햇빛이 바로 드는 위치인 탓에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 고리의 형태로 형체 없는 무언가가 하늘하늘 떠다녔다. 물이였다. 용이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반짝이는 물의 고리는 그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듯 방 끝쪽까지 퍼져나가다, 이내 수많은 물방울들이 되어 식물들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물론 방 가장자리에 서 있던 붉은용들의 몸 위로도 잔뜩 떨어졌고 말이다.

오그림은 예를 차리는 것마저 잊고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한바탕 퍼부었다. 물을 격렬히 탈탈 털어내며 그가 고함쳤다.

"어이, 너! 뭔 짓거리야?"

"아,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지 몰랐네요."

기둥 위의 용은 그제서야 둘을 눈치챘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성치고는 높지만 은근히 낮기도 한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반반한 게 별 소리하고 앉아있네! 몰랐다고? 대놓고 걸어 들어왔는데 그걸 몰라?"

"저기 오그림, 그만 좀…" 그의 옆에 바싹 붙은 일렉사가 초조하게 속삭였다.

"왕 만나러 왔다는데 길 알려줄 놈 한 마리도 안 붙여주고! 정말 어떻게 되먹은 용이냐, 네놈들 왕은? 이럴 거면 그냥 대놓고 만나기 싫다고 말해줬어야 더러워서라도 안 찾아가지!"

"아니, 제발 입 좀 그만 터세요! 보면 몰라요? 저 용이 오세란 본인이잖아요!"

일렉사가 마침내 일갈한 동시에 용이 기둥 위에서부터 가볍게 뛰어내려왔다. 전신을 뒤덮은 그의 짙푸른 비늘이 마치 강철의 표면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눈은 대낯의 바다같이 맑은 초록빛이였다. 오그림이 아는 한, 저런 색의 눈을 가진 푸른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왕족이거나 왕 본인이거나. 게다가 지금 보니 그의 모습이 어쩐지 많이 익숙했다.

푸른용…아니, 푸른용들의 왕 오세란은 웃음기가 만연한 표정을 지으며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정황상 자신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라고 오그림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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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나온 오그림은 1화에 나오는 루사 아부지입니다
겨우 다 써서 올리려는데 비속어가 있다면서 업로드가 안되길래 또 한참동안 찾아서 고쳤습니다 ㅋ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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