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천히, 감미로운, 청명하고 떄묻지 않은, 소녀의 감성처럼 약하지만 굳센, 그런 감정을 담은 1악장이 흐르고. 저절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즐겁고 신나는, 2악장이 흐른다. 소년의 작은 손가락은 건반위에서 춤춘다. 조금 긴 앞머리로 한 쪽 눈을 가린, 고동색 머리를 지닌 아이는 그의 실력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을 완성해내고 있었다. 클라이 막스, 엄청나게 빠른 손눌림으로 화려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년. 무대의 마지막은 언제나 빛나고, 아름다웠으니까. 소년은 어느새 5년 전, 그 아이가 되어 무대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은 언제나 초라해져있던 5년 전. 연주가 끝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떄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류 하빈. 여자 이름같다고 놀림받을 떄도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철없던 어린 시절의 일. 꿈쩍않고 자신이 작곡한, 그 악보를 뚫어져라 보고있는 소년은 18살의 다 큰 아이였지만, 아직은 부모의 울타리가 필요했고, 사랑에 집착하는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너무 빨리 현실을 알아버린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공허해보였다. 텅 빈, 아무것도 없는. 살아갈 의미가 없는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피하게 만들었고 결국 하빈은 외톨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빈\'이 있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 \'빈\'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아이였고 항상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였다. 하빈의 슬프고 우울한 표정에도 빈은 그를 다독여 주었고 웃는 얼굴로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하지만 하빈은 웃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편안을 지니고 있었을 뿐, 그것을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빈은 항상 하빈의 곁에 있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옆에서 조용히 감상하였고 밥 먹을 때는 같이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으며, 잘 때는 자장가를 불러주기 일쑤였다. 그것이 5년 째 반복되었다. 어릴 떄의, 5년 전 자신은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기었다. 끝나지 않는 루프의 무한반복,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틀어박혀 울고는 하였다. 그것이 1년 쨰 되는 날 그는 빈에게 마음을 열었다. 빈은 그제서야 하빈을 향해 활짝 웃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하였다.
이상하게도, 빈의 웃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어느날 하빈이 빈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듯이 말하였다. 그러자 빈은 대답하였다. 나는 울거나, 슬퍼할 수 없어. 너도 웃지 않으니까. 그 말에 하빈은 납득되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무표정, 하지만 빈의 입꼬리는 항상 올라가 있었다. 아마 빈은 매일 좋은 꿈을 꿀거야. 하빈이 그렇게 말하자 빈은 되물었다. 그럼 하빈이는 매일 무표정이니까 악몽만 꿔? 대답할 수 없었다. 5년 전에는 늘 악몽만 꾸었지만 그를 받아들인 후에는 가끔씩 그랬으니까. 하빈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니, 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빈은 또 한번 활짝 웃고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네가 웃지 않았음 좋겠는걸.
하빈은 유난히 피아노에 재능이 많았다. 그래서 5년전까지만 해도, 방에 틀어박혀 고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가장 행복한 소년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따뜻해졌고 얼굴은 항상 웃음으로 가득하였다. 하빈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법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피아니스트는 꿈이 아니었고 취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ㅡ그를 버리고 나가버린 악독한 두 인간은ㅡ그는 하나의 돈벌어다주는 기계이자 이용해먹기 쉬운 도구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순수하고 어린 아이었으니까. 하빈은 사랑받고 싶었고 그래서 부모의 비위에 최대한 맞추었지만 결국 그는 5년 전, 유난히 햇살이 맑던 날, 두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
빈은 커튼을 걷었다. 햇살이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오자 하빈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이게 무슨 짓이냐, 라고 빈을 꾸짖었다. 하지만 빈은 태어나서 상처란 받아본 적 없는 듯한 얼굴로 창문을 열어재꼈다. 시원한 바람이 훅, 끼쳐들어왔다.
\'너랑 같이 있을때는 햇살도, 바람도 못 쐬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거짓말 마, 빈. 넌 햇살도 바람도 필요없잖아. 하빈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중얼거리자 빈은 하하, 그런가. 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하빈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고 활짝 웃었다.
\'하빈- 그러니까 밖에 나가는 게 어때?\'
\"싫어.\"
\'에엑ㅡ? 왜?\'
\"...밖에는 죽어도 안나가...\"
우울한 표정을 짓는 하빈에게 빈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 밖에 나가자. 빈은 확고한 눈빛으로 쭈그려 앉아있는 하빈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누굴 닮아서 고집 하난 저렇게 센지 모르겠어. 하빈은 찡그린 표정으로 빈을 보았지만 빈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할 수 없나. 밖에 나가긴 정말 징그럽게 싫었지만 이제 날 기억하는 사람도 없겠지, 라고 생각한 하빈은 빈에게 힘없이 알았다, 라고 대답한 후 5년 째 그자리에 있던 그의 아버지가 입었던 패딩을 느릿느릿 걸치고는, 신나서 팔딱팔딱 뛰는 빈을 앞장세우고는 그 뒤를 천천히, 아주 느리게 쫓았다.
겨울바람이 찼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하빈은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빈은 추우면서도 뭐가 좋다는건지 신나서 방방 뛰었다. 하빈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뱉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 사라졌다. 쓸쓸한 표정의 하빈을 본 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어느새 그의 옆에 서서 똑같은 행동을 하였다.
\'나는 입김이 나지 않네.\'
\"그러게...\"
영혼없는 목소리로 하늘을 바라보는 하빈의 눈동자에 다시 공허함이 어렸다. 외로워, 외로워, 외로워. 구름이 껴있는 겨울 하늘을 보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찬 바람이 그의 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맑지만 텅 빈,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 혼자, 소년은 서 있었다. 하늘에서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자, 주변을 둘러보는 빈. 마치 세상의 모습을 머릿속에 기억하려는 듯, 그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빈은 하빈을 향해 활짝 웃으며, 작게 \'다시만나자\' 라고 말하였다.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연기로 변해 하늘로 사라졌다.
\"...가버렸어.\"
또, 올해도 이렇게 지나는구나. 이제는 가면을 벗어도 될까.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작게 중얼거렸다. 새벽바람이 찼다. 거리에는 하나 둘씩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제서 하빈은 돌아갈 때를 느끼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어느새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쳤다. 그 바람에 그의 모자가 벗겨졌고, 그의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그의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제 내 모습을 가리는 건 끝났으니까. 하빈의 눈동자는 더 이상 텅 비어있지 않았다. 빛나는 금빛 눈동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더없이 잘생긴 외모. 흘긋흘긋 바라보는 시선에도 소년은 그저 앞으로 걸어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외로운건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너는 류하빈일 뿐이니까. 어디선가 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