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타칸 | 빛의 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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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신전 전투 하루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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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일이 어쩌다 이리 꼬인 거지... 난 그냥... 친구들과의 일상이 좋았는데... 막사에 앉아 손목과 발목에 감긴 쇠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하니 마치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 죄수 맞으려나? 인간 상태여야 온전한 힘을 사용하지 못하니 반강제로 폴리모프한 상태인 난... 빛의 군 한가운데에 스스로 와서 잡혔다. 다크닉스가 말한 대로 변절한 다크닉스에게 실망해서 전향하고 싶다고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스파이로 활동할 것인가, 아니면 이중 스파이로 변할 것인가. 일단 여기서 감시와 경계만 받고 있긴 한데... 다크닉스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라파엘을 죽여야 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내가 죽겠지. 고대신룡을 도와 다크닉스를 제압, 봉인 아니면 죽인다 해도... 내가 다크닉스를 공격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네... 이런 쇠사슬과 감시, 원하면 뚫을 수 있고, 바로 라파엘의 목을 취해 돌아갈 수 있지만... 내가... 내가 그걸 어떻게 하지...? 하하... 나 진짜 무능하구나... 만약 다크닉스를 따라 스파이로 활동한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면...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가 관건. 들키면... 무조건 죽는다. 여기서 그냥 대놓고 빛의 편에서 싸운다면... 위태롭겠지. 다크닉스를 만나면 죽을 확률이 높으니.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공을 세워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거지? 난...
" 결정했다... 섀도우 포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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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리로 끌려오는 도중 봐 두었던 라파엘의 막사에 설치한 섀도우 포탈로 이동했다. 샤악. 몸을 구속하던 쇠사슬은 그림자 속을 지나올 때 같이 오지 못한 터라 난 자유로웠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라파엘의 침대를 바라보던 도중, 뒤에서 라파엘의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 왜 온 거야?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 군데군데 보라색 자수정으로 장식되고 어깨는 화끈하게 파버린 얇은 연보라색 드레스와 아무 무기도 없는 비무장 상태, 그리고 입가에 걸려있는 옅은 미소. 예쁘... 아니, 넌 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구나... 온화한 너의 목소리를 듣자 굳었던 내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고 살의가 가득 담긴 부릅 뜬 붉은 눈동자의 힘이 빠졌다. 아니야, 난 선택을 했잖아. 해야만 해. 난 이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에 섀도우 대거를 감춘 채 소환했다. 쿵! 순식간에 라파엘을 덮친 난 그녀의 양팔을 위로 올려 왼손으로 붙잡고 대거를 목에 들이댔다. 라파엘이 조금의 주의를 기울였다면 내 손끝이 미세히 떨린다는 것을. 설렌다면 설렐 자세였지만 내 눈엔 오직 그녀의 보석 같은 두 눈만이 들어왔다. 라파엘은 눈웃음을 지으며 분홍색 입술로 말했다.
" 죽여. 그래서 네가 살 수 있다면. "
그녀의 예쁜 두 눈은, 죽음을 각오한 눈이었다. 난 대거를 든 채 망설였다. 해야 해. 난 해야만 해. 난... 난 이걸... 해야만... 하지만 결국 사고의 끝에 다다르자 깨달았다. 난 애초부터 망설인 게 아니라 내 행동의 답을 알고 있었다는 걸.
" 하아... 난 못해. 나는... 나는 너를... "
" 응, 나도 사랑해. "
하, 이제 기뻐서 날뛰어야 하는 건가? 네게서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었지만 난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리고 내 선택은 그 날과 변하지 않았다.
" 자, 찔러. 너에게 죽을 수 있다니, 그래도 마지막에는 너와 함께구나. "
대거를 떨어트리고 양팔을 벌린 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파이 짓은 도저히 못하겠고, 라파엘을 죽이는 건 더욱더 못하겠어. 그냥 여기서 죽으면 더 많은 생명을 죽이진 못하겠지. 하아... 그냥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죽는 운명이었던 건가, 난. 죽음에 관해선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언제나 느끼고 있긴 했다. 멀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항상 가까웠던 죽음을. 어둠의 전사란 그런 자리였으니. 하지만 이제... 진짜로 죽겠지. 차가운 대거가 내 심장을 파고들어 갈가리 찢어놓을 거란 생각이 들자 내 입에서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 개 같은 다이즈. 멋있는 삶은 바라지도 않고 죽을 때만이라도 좀 멋있게 죽게 해 주지. 젠장. "
" 푸핫! 너 안 죽어.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건데,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닐 텐데? "
얘 좀 봐라? 자기 목숨으로 흥정을 하네? 어쩌면 내가 이래서 네게 마음을 뺴앗긴 걸지도... 하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이게 뭐냐... 그냥... 다크닉스의 봉인을 돕는 게 최선인 건가. 그게... 결국 내 길인 건가... 지금까지 어둠 속을 걸어왔는데... 다이즈가 그린 내 길이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 끝에 라파엘 네가 있었으면...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기왕에 시작한 거, 제대로 하는 게 맞겠지.
" 고대신룡에게 데려다줘. 할 말이 있어. "
" 너 또 막 고대신룡 암살하려 하고 그런 거 안 된다? "
" 아니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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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
하아... 이걸 안 믿네. 뭐, 나라도 믿기 어렵겠지만... 일단 천천히 증명을 하자.
" 믿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애초에 내가 거짓 정보를 뿌릴 거였으면 몇 명 죽이고 고문받고 뿌렸겠지. 안 그래? "
" 거짓 정보의 설득력을 높이려 그랬을 수도 있지. "
" 아니 내가 그럴 놈이냐? 그리고 너, 예전에는 띨빵하더니 갑자기 지능이 왜 이렇게 올랐냐? "
아, 진짜 답답하네... 하아... 어, 잠시만. 나 지금 빛의 군 한가운데서 고대신룡 욕한 건가? 진짜 죽었네... 나 오늘 죽을 짓을 왜 이렇게 많이 하지?
" 그래, 믿어줄게. 그러니까 다크닉스가 니 정보를 듣고 내일 바람의 신전으로 온다는 말이지? "
아니 이걸 사네? 그리고 이걸 믿네? 아직도 띨빵하구나... 역시 사람이든 드래곤이든 쉽게 바뀌지 않아... 난 약간 어이가 없어서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 너... 너 내가 진짜로 거짓 정보 뿌린 거면 어쩌려 그러냐? 그럼 너만 죽는 게 아닌데? "
" 마지막으로 믿어보려고, 내 옛친구를. 하지만 이게 거짓 정보라면, 그리고 내가 살아남는다면,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
고대신룡은 내 옆을 지나 어깨를 툭툭 치며 피식 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때 그의 눈에선 마치 지옥불 같으면서도 신성해 보이는 푸른 안광이 흐르고 있었다. 꽤... 강해졌나 본데?
" 그래라, 그래.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다크닉스는 내일 빛의 군의 물자를 실은 후방 군대가 바람의 신전으로 온다고 알고 있어. 본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오겠지. 그러면 우리는 후방 군대 대신 똑같이 본진을 이끌고 가서 승부를 보는 거지. 어때? "
난 천천히 막사 안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정보를 정리하고 작전을 설명했다. 조명이 많지 않아 어슴푸레한 막사는 그리 크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도 많지 않았다. 고대신룡, 라파엘, 엔젤, 각 부대의 참모들 그리고 나. 모두가 수긍한 작전이었고 대성공까진 아니지만 예상 외의 승리를 가지고 와 환호를 받았던 작전었다. 바로 그 날이, 내가 빛의 편에 서서 싸우게 된 날이었다. 절친한 친구인 다크닉스를 배신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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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겐 패배 같은 승리를 한 고대신룡은 오른팔을 버리다시피 하고 돌아왔다. 말 그대로 핏덩이가 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를 오른팔 대신 데리고 온 고대신룡은 그대로 졸도했고 엔젤의 전폭적인 치료를 받았다. 자연치유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엔젤의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신룡은 1주일 만에 손가락 개수가 다시 발가락 개수와 같아졌다. 실로 경이로운 회복이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빛의 수호자님이, 떨어지는 태양을 막아냈다고. 다크닉스와 고대신룡, 그리고 빛과 어둠. 그 팽팽한 것 같던 힘의 균형은,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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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타칸 | 하늘의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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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전사의 눈빛처럼 싸늘한 바람이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망자의 피비린내를 잔뜩 담고 이 상처뿐인 전장을 훑으며 지나가고, 한때는 기운찬 병사들이었던 시체 더미에서 한 덩이 고기를 찾으려 날아든 까마귀들이 그 듣기 싫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제는 굳어버린 피웅덩이 위로 힘없이 처지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닌 이미 죽어 굳어버린 생명체의 흔적만 찾을 수 있는 이 전장에서 유일하게 아직 뜨겁게 뛰는 심장을 가진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 보며 대립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입이 지쳐 기능을 상실해버리기 직전이라는 듯이 천천히 열린다.
" 결판을... 내자, 다크닉스. "
투사체에 비교한다면 날카로운 화살이 아닌 느리지만 묵직한 포탄 같은 그 목소리가 다른 존재에게 부딪혀 떨어진다. 그 목소리가 고체였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났을까. 툭. 소리는 작았지만 효과는 거대했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으니. 맞았으니 반격하듯 다른 존재의 입도 열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 하, 바라던 바다, 고대신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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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닉스으!! "
전투의, 시작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듯이 고함을 내뱉은 첫 번째 존재는 그 다른 존재에게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번엔 마치 떨어지는 운석 같이. 느낄 수 없이 빠르지만 너무나도 느리게 보이고, 우리에겐 작게만 보이지만 절대 막을 수 없는.
" 고대신룡!! "
그 굳어버린 피로 뒤덮인 입으로 똑같이 피가 끓어오른다는 듯 투기 넘치는 고함으로 대답하였다, 그 두 번째 존재는. 아니, 끈적하게 굳은 피로 범벅인 건 단지 입만이 아니고 몸 전체였다. 둘 중 하나의 심장이 다른 자의 손에 뚫리기 전엔 멈출 것 같지 않은 둘의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 태초부터 바꿀 수 없이 다이즈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던 그 싸움이, 가슴이 시리도록 슬픈 둘도 없는 형제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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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팜파오입니다! 약간 쉬어가는 느낌의 21화네요! 다음 화... 벌써부터 걱정이 되지만 설레기도 하네요... 전투씬 진짜 영혼까지 갈아넣는다... 그리고 제목이 약간 바뀐 [ 드래곤 아카데미 ] 1화가 거의 끝났습니다! 의견이 없어서 그냥 썼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자분들 반응이 궁금하네요! 아마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 쯤엔 올라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