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빛의 수호자, 아모르의 첫 번째 자손, 사대고룡의 일원, 엘피스와 유타칸의 수호자, 고대주니어랑 엔젤주니어의 아버지, 사랑하는 엔젤드래곤의 남편, 옛 콜로세움 챔피언, 그리고... 백수이다.
백수기 때문에, 나는 할 일이 거의 없다. 고대주니어랑 엔젤주니어, 엔젤드래곤이랑 집에서 지내는 거랑, 간혹가다 가족끼리 먹을거리를 사냥하는 것이랑,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생필품을 사는 거랑, 가끔씩 운동 나가 주고, 마을에 나가는 거 빼고는 하는 일이 없다. 그렇게 지낸 지 굉장히 오래된 덕에, 나는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며칠인지도 모른다. 대략, 사계절만 알아차릴 정도이다.
나는 누워서 배를 벅벅 긁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뉴스만이 나온다. 아들과 딸은 연예 드래곤이 나오는 방송을 보자 재촉하지만, 리모컨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점심을 먹은 지 한참이 지난지라, 슬슬 배고프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더더욱 그렇겠지.
"밥 줘" 내가 말했다. 평소 내 목소리와는 달랐다. 정말, 굼뜨고, 정의롭지 않은 목소리었다. 그런데 불쑥, 휴대전화에서 다크닉스 이름으로 전화가 왔다.
"정의의 사도? 오랜만에 밥 좀 먹자."
"그러자."
"문제 없으면 우리 애들이랑 부인 데려가도 될까?"
"문제없지."
"그래... 저기 어디냐... 6시쯤에 엘피스 분수대 근처서 보자."
나는 아들, 딸들에게 같이 밥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였다. 그러자 딸은 크게 성을 내며 방으로 돌아갔고, 아들은, 나마저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다. 엔젤드래곤은 처음에는 기뻐했다. 신혼부부였을 적, 데이트할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겠지. 그런데 다크닉스도 같이 밥을 먹으러 온다고 내가 밝히니 똥 먹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되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나만이라도 빨리 옷을 갖춰 입고 가야겠다. 어차피 싸우면서 친해진 사이고, 서로 백수인데 딱히 옷을 잘 갖춰 입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 드래곤들도 나를 볼 수 있잖아. 체면을 구기는 게 싫어 옷을 갖춰 입었다.
엘피스 마을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마을 의회 앞에 걸어둔 현수막에 '사대고룡 지원금을 취소하라' '예우 반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저 녀석들, 우리의 업적을 무시하는 건가 싶었다. 마을 의회 앞에서 본 문구에 대해 생각하다가, 검은 색 물체랑 쿵 부딪혔다.
"정의의 사도. 오랫만이야."
"그래... 어둠의 수호자."
근처 고깃집에서 멧돼지를 구워먹으며 이야기했다.
"다크닉스 너는 뭐하고 지내냐"
"아무리 해도 네 삶보단 재미 없을거다."
"왜?"
"넌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예쁜 아내도 있고, 친구들이 아주 많잖아."
"근데 나는 친구가 적어."
"너무 강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내가 오랜 기간 홀로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너무 강하다'라는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엘피스 마을 의회의 현수막. 또 콜로세움 전투사로서의 패배와 은퇴. 그것이 알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크닉스가 계속 말을 걸어온다.
"뭐, 그럼 여자친구라도 소개해줄까~?"
"난 옛날에 아주 선망의 대상이었지."
"아니, 느 여자친구를 묻는 게 아니고..."
아이고. 괜히 헛발을 짚었네?
"뭘 해야 재미있을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걔는 처음부터 '사는 게 재미없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나도 답변을 못 하곘다. 오늘만 해도, 다크닉스랑 밥 먹기 전에 뭘 했었지? 배 긁으면서 텔레비전 본 게 나 아닌가? 그런데 그게 재미있었나? 결코 아닌 것 같았다. 할 것 없이 텔레비전만, 마치 귀신에 홀려 영혼이 나간 드래곤처럼 행동하고 있었었다.
"그러게, 뭘 해야 재미있을까? 이제는 콜로세움에 나가 맹위를 떨치는 것도 힘들어."
"야, 정의의 수호자. 좋은 상대가 눈 앞에 있잖아? 서로 견줄 수 있는 상대."
"그러게... 하하... 견줄 수 있는 상대. 서로 고전했던 상대."
맞는 말이다. 밥을 먹고, 내 돈으로 밥값을 내고, 다크닉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상대의 공격 능력은 어디 가질 않았다. 조금 속도가 느려져 허점이 보이긴 했으나, 반대로 내 몸이 잘 듣지를 않았다. 그래서, 팔팔했을 때 다크닉스랑 대적했을 때랑, 지금의 친선전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크닉스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갈퀴는 속도가 느려지고, 스킬을 쓰는 속도가 느려졌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바탕 공중, 지상을 가리지 않는 싸움에 지쳐 서로 포기해 버렸다.
바닥에 누워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 어떻게 된 일인지 동시에 말했다.
"재미있다."
같은 신의 자손이라 그런가?
그런데 싸움이 워낙에 요란해서 그런지, 주위 마을 사람들, 주위 드래곤들이 우리 근처로 모여든다. 이런, 내 아내도 그 무리에 있는 것 같다. 도망치지 않으면 큰 혼쭐이 날 것 같아 싶어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누라에게 딱 들킨 나는, 며칠간 조용히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여보. 일어나."
"알겠어... 다크닉스랑 한바탕 했는데... 재미있었어..."
"다크닉스랑 같이 살자. 집도 넓은데 왜..."
"안돼요. 안 돼. 할 게 많아진단 말이야."
다크닉스가 말했다.
"고대신룡이가 때때로 저래요. 그냥 무시하세요."
"그래도 잠깐 묵었다 가요. 지금 한밤중이에요."
다크닉스는 어쩔 수 없이 내 집에 묵기로 했다. 오랜만에 격하게 운동을 했더니 잠이 온다. 언능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