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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영속(永續) - 제 1장. Twisted fate

0 엘다르
  • 조회수573
  • 작성일2014.03.17

[PROLOGOS]





한때 천사였던 그대, 눈 감고서

내 얼굴 바라보지 아니한다.

한때 내 것이던 그대, 다문 입술

내 부름에 답하지 아니한다.


내가 조급히 부르짖을 것을 알고도

일어나 날 맞이하지 아니한다.

보답 없는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용서하지 아니한다.

그대 위해 흘린 피도 보람 없이

죽음이 앗아가 내 것이 아닌 그대

내 그대 뒤를 따라갈 수 없으니

그대의 형제들과 친구들을 보내어


돌로 메운 무덤 속에서도 영원히 기뻐하게 하리라.




오늘 공연의 클라이막스가 될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오엔은 루밀 차를 휘휘 저었다. 알싸한 차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처음 머금을 땐 달콤하지만 뒷맛은 쓰디쓴 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시오엔은 그 극소수에 속하는 이였다. 그도 딱히 쓴 맛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였으나, 그저 어느 순간부터 즐겨 마셨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더라. 시오엔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지만 기억해내려 애쓰는게 딱히 의미있을 것 같지는 않아 금세 관두고 말았다.



적당히 저어진 차를 양손에 모아 쥐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창밖에는 언제부터 왔는지 모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회빛 하늘은 도시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듯 끝에서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 꼴을 보아하니 단시간 안에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우중충하고 끈적한 날씨에는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나오기는커녕 집에 틀어박혀 벽난로 앞에 모여앉아 수다나 떨 것이고 고상하신 귀족님들은 오늘 어디어디 귀족영애와 승마를 하러 나갈 수 없어 괜한 하인들에게 벌컥 짜증이나 낼 것이었다.



하지만 창밖은 놀랍게도 엄청난 인파와 마차들로 정신없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타는 합승마차나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소형 마차가 아니라 대부분 풍채 당당한 사두마차들이다. 대로로 이어지는 길은 좁은데 밖에서는 마차꾼이 소리치고, 안에서는 창 열고 내다보는 귀부인들의 불평에, 신경이 곤두선 말들의 울음소리, 지나가는 마차에 물벼락을 맞은 재수 없는 이의 고함소리까지 아수라장의 극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작 그 사태를 근본적으로 만들어낸 시오엔, 아니 ‘시엔’ 본인은 그저 그 꼴을 관망하며 키득댔다.



‘시엔’ 은 5년 전 느닷없이 나타난 제국 초유의 천재 소년배우로서, 2황자 라핀제스의 반란으로 인해 2년 남짓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제국을 뜨겁게 달구어 전체가 들썩이게 만든 화제의 인물이었다. 삼류 극장이었던 카스틴을 단숨에 초일류 명문 극장으로 급부상시킨 이 사상초유의 소년의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아주, 아주 많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권을 사고, 암표상들이 진을 치며 귀족들까지 보러 오는 공연은 단언컨대 제국 역사상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 전에도 배우는 많았고 음악회니 연극이니 공연할 것도 많았지만, 볼 사람은 보고 말 사람은 마는 그런 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해서 공연의 내용은 대부분 형편없는 것이었다. 완성된 스토리도 없이 그저 광대처럼 사람들을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고 관객이 난입하여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주연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려 아무렇게나 대사를 내뱉고는 낄낄거리며 막장으로 끝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해 시엔의 데뷔와 함께 모두에게 화제가 되는 인기 공연, 반드시 그가 나오는 걸 봐야하는 인기 배우, 귀족들의 옷값을 호가하는 값비싼 의상과 소품들, 자기 집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연극을 보는 귀족들. 그 모든 것이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제국 예술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소년 -이제는 청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 은 그런 엄청난 공연을 2시간 앞에 두고 있는데도 긴장하는 기색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나른한 표정이었다. 마시지 않고 그저 손에 쥐어 따뜻함만을 즐기던 루밀 차를 단숨에 넘기고는 거울 앞에 섰다. 반짝이는 실버 블론드가 아무렇게나 물결쳐 흘러내리고, 흘러내린 은실 사이로 녹지 않는 만년설과 같은 벽안이 언뜻 보였다. 조각같이 흰 뺨과 이어지는 날카로운 턱선이 마치 그를 섬세한 유리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시오엔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저 감흥 없이 바라보다가 옆에 펼쳐진 수백 벌의 옷으로 만들어진 숲의 끄트머리에 걸쳐진 검은머리 가발을 골라 썼다. 빛이 방울져 흘러내려 그 자체가 빛이 나는 듯 했던 실버 블론드가 칠흑같은 폭포 속으로 감춰졌다. 거울에 비춰지는 흑발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오엔의 입술이 언뜻 일그러지듯 비틀렸다. 7년 전 자신의 어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고 그의 등을 배신이라는 비수로 난도질한 그 아이도 이와 같은 먹빛 머리를 갖고 있었다. ...라핀제스. 잇새로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오래된 이름이 튀어나왔다.



라핀제스는 제국에 볼모로 바쳐진 공녀의 소생이었다. 아버지인 황제는 황위다툼을 걱정하여 황태자인 시오엔 이외의 자식을 만들고 싶지 않아 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공녀는 임신을 했고 그는 축복받지 못하는 아이로 태어났다. 은발 벽안의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흑발 적안인 공녀만을 꼭 빼닮은 덕분에 황제의 씨가 아닌 것이 아니냐, 는 의심을 받으며 그에 더해 외가인 공국의 뒷받침도 받지 못해 은연중에 멸시를 받는 그를 황후인 어머니는 안타까워했었다. 그러했던 어머니 덕에 자신과 그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양 친형제처럼 자랐다. 반짝이는 붉은 눈으로 자신을 쭐래쭐래 잘 따랐던 그는 마치 자신에겐 시오엔과 황후가 전부라는 것처럼 굴곤 했었다. 형님이 황제가 되면 자신은 일등 신하가 되어 형님께 충심을 바쳐 보필할 것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던 라핀제스의 얼굴은 이제 짙은 밤안개 속 별빛마냥 희미해졌다. 오로지 세월이 갈수록 빛이 바라지 않고 진해지기만 하는 선홍빛 증오만이, 오늘과 같은 비가 오던 그날 밤 궁을 물들였던 어머니의 피처럼 선명하기만 하였다.



그리 왕이 되고 싶더냐. 거울 속 청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가증스러운 얼굴로 라핀제스 자신의 손에 드는 것은 그저 베풀 사랑과 받을 사랑이면 족하다며 자신을 기만하던 그의 손에 최후에 들린 것은 수많은 이의 피에 절은 왕홀과 자신의 피가 담긴 성배였다. 그래, 배신의 잔은 달콤하더냐, 사랑스러운 동생이여?



시오엔은 거울 옆 탁상 위에 올려놓은 흰 가면을 집었다. 혹여나 공연을 보러 오는 귀족들 중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염려하여 쓰는 것이었다. 눈빛이나 표정 연기가 매우 중요한 배우들에게 있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꽤나 치명적인 자충수였으나, 그것은 적어도 시엔에게는 아무런 단점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얼굴을 가린 천재 배우’ 라는 신비로움이 더해져 가면 속 얼굴은 굉장한 미남일 것이다, 엄청난 화상이 있어 가리고 다니는 것이다, 하며 뭇 사람들의 관심과 추측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번이라도 시엔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많은 귀부인들의 애달픈 마음을 비롯하여.



하얀 가면이 서늘한 아미와 눈가를 가렸다. 유려하게 치솟는 붉은 입꼬리와 우아한 턱선만이 준수한 미모를 내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가면의 감촉에 시오엔은 가만히 손을 올려 그것을 쓰다듬었다. 이걸 쓰는 건 5년째인데도 역시 익숙하지 않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곧 가면따윈 벗고 당당하게 대전을 활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태자 전하.”

“... 언제 왔어?”



대외적으로는 배우 시엔의 개인하인이지만 사실 황태자 시절 시오엔의 호위기사이자, 현재 반란군을 총괄하고 있는 최측근 하켄이었다. 어지간하면 발소리도 기척도 내지 않는지라 지금처럼 소리없이 들어와 대답할 때엔 항상 놀라곤 했다. 그 모습에 하켄은 빙긋 웃었다.



“거울을 보고 계실 때부터요. 거울을 오래 보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보는 이의 과거와 미래를 비추기에 뜻하지 않게 홀리기 마련이지요.”

“뜬구름 잡는 소리 하기는... 그나저나, [은빛 여우]의 대민 지원은 어떻게 됐나?”

“저번 공연 수입의 반을 투입하여 밀과 생필품을 엘른에 보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은 껐습니다만, 제국 남부에서부터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수도에 있는 이들은 딱히 동요하지 않으나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마을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시오엔은 버릇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약재까지 조달하려면 재정이 영 빠듯한데. 군량과 훈련비용도 생각을 해야 해. 일리오스 공작에게만 부담을 지울 수는 없지.”

“재정이야 전하께서 더 열심히 뛰시면 될 일인데, 무에 걱정이겠습니까? ”

“......”



눈을 흡뜨고 노려보는 시오엔은 놀랍도록 선황과 닮아있어 하켄은 흠칫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시오엔을 즐겁게 해주려는 의도였지만 그의 심상찮은 반응을 보니 역시 농담과 자신은 거리가 먼 모양이었다. 난감함에 몸둘바를 모르는 하켄을 흘겨보던 시오엔이 킥, 소리를 냈다. 이내 웃음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하하, 맞는 말이야!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내 무엇을 못하겠어! 목이 터져라 노래할테니 너는 극장 재정은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다시 마주본 시오엔의 얼굴은 그 나이 또래의 청년처럼 장난스러움을 가득 띠고 있었다.


“...전하, 또...! ”

“아아, 속은 사람이 잘못 아니겠어? 이젠 그만 속을 때도 됐을 텐데 너도 어지간하군.”



시오엔이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으나 하켄은 화내지도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은 채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저렇게 놀리듯 말해도 사실은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훤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질 수도, 책임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모든 걸 어떻게든 다 안고 가려는 이였다. 조금쯤은 그 짐을 주변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하련만, 그의 주인은 미련하디 미련하고 또 오만한 자였기에 결코 그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바보같은 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켄 자신은 그 고귀한 오만함에 스스로 무릎 꿇고 그의 발에 입맞추며 경배하는 자였다. 하켄은 가만히 시오엔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못내 신경쓰였던 듯 그는 그 눈빛을 의식하듯 피하며 말을 돌렸다.



“하켄, 시간이 됐다. 준비를.”



간접적으로 외면당한 하켄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붉은 비로드 망토를 시오엔의 어깨에 걸쳤다. 너른 어깨에 걸쳐진 망토는 오로지 시오엔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에게 잘 어울렸다. 비록 가발에 가면을 쓴 채여도 타고난 왕의 위엄은 감추어지지도, 빛이 바래지도 않았다. 하켄은 조심스레 망토를 고정시키며 속삭였다. 지금 이 붉은 망토를 두르고 오를 곳은 무대이지만, 다음은 대전 위일 것입니다. 고운 입술이 위협적으로 호선을 그렸다. 아아, 그래야지.



시오엔은 하켄을 제치고 대기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피에 젖은 실로 공중에 수를 놓는 마냥 망토가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저 멀리 빛나는 무대가 보였다. 본분이 어찌되었던 간에 저곳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전장이었다. 부딪혀오는 타인의 삶과 그에 따른 고통으로 가득한 전쟁터였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면 즐겨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시오엔은 미소했다. 훗날 연전연승하여 마침내 라핀제스와 마주하였을 때, 그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황좌를 비롯한 그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산산히 가루내어 네 심연빛 머리 위로 조롱하듯 흩뿌려 주리라.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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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파란색..! 파랑이 좋겠어..! 그 트페가 아닙니다 하하.

음... 자신의 자리를 뺏긴 황태자 시오엔과 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가지게 된 2황자 라핀제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냥 고신과 다닉의 평행세계 이야기?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그나저나 생각처럼 잘 써지지가 않아 슬프네요. 문장들이 좀 더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는데 원.

오타지적& 비평 환영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십시오.



cf. prologos: 고대 그리스 연극, 특히 비극의 서두, 서사; 보통 등장가 (parodos)에 앞선 개막부에서, 주요 인물이 연극이 시작될 때까지의 이야기의 경과를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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