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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영속(永續) - 제 2장. Memento mori
우르릉.
우레 소리가 천지사방을 뒤흔드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둠을 갈라내는 번개는 검처럼 날카로이 솟구쳐 올랐고 그 빛의 칼날들은 휘돌아 치며 사방을 내리찍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영이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을 멈추고 젖은 옷을 툭툭 털어내었다. 역시 황태자궁과 자신의 궁은 너무 멀다. 아이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더니 이제는 너무 많이 들락거려 외워버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종과 경비들을 조심스레 피해 걷기를 한참, 결국 목적하던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아주 뿌듯했다. 이렇게 몰래 찾아올 때면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못된 드래곤에게 납치된 공주님이고 자신은 그를 구하러 온 용사인 것 마냥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실없는 망상에 헤실헤실 웃던 아이는 이내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 를 부르며 화려한 문을 똑똑, 두드렸다.
“형님, 문 열어주세요. 저 라핀제스에요.”
안쪽이 부산해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살짝 열렸다.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던 듯 한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는 시오엔이 놀란 표정으로 야밤에 쳐들어온 작은 불청객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저렇게 비가 오는데 여기까지는 어찌 온 거고?”
라핀제스는 머쓱한 듯 배시시 웃으며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비를 최대한 안 맞는 곳으로 돌아 왔다고는 해도 바람에 날리는 비는 어쩔 수 없었는지 약간 젖어 있었다.
“오늘 낮에 시녀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더니 잠이 안 오는 걸요. 밖에 천둥번개까지 치니까 더 무섭기도 하고 자꾸 생각나서... 형님, 저 좀 재워 주세요.”
“그러니까, 같이 자자고?”
시오엔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더니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렇게 곤란한 듯 반응해도, 비 맞은 강아지마냥 애처로운 눈으로 올려다보면 이내 졌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신이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것을 영악한 라핀제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속셈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잘 맞아 들어가 주었다. 바보 형님. 라핀제스는 작게 키득대었다. 물론 티나지 않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날에는 시오엔이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며 그 섬세한 생김에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주먹으로 자신을 매우 예뻐해 줄 것이었다.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선 안 되고말고. 열리는 문에 라핀제스는 히쭉 웃었다.
방 한켠에서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덕에 훈훈한 시오엔의 방은 굉장히 넓었다. 라핀제스는 이 방이 신기했고, 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비단 호화스럽거나 넓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적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방도 정도가 덜할 뿐 충분히 크고 화려했다. 그러나 자신의 방은 이 방과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그 곳은 아주 싸늘했다. 미 친듯이 가구를 채워 넣고 벽난로에 장작을 처넣어도, 저 북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만년설의 황무지처럼 그저 황량하기만 하였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 - 공물로 바쳐진 몸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였으나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어머니든,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갈원하지만 사랑은커녕 동정 한 톨도 얻어내지 못하는 자신이든 - 의 슬픔과 분노가 묵은 먼지처럼 켜켜히 쌓여 숨이 막혔다. 외로움이 썩어가는 쇠사슬과 같이 몸을 칭칭 감아대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런 곳에는, 한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걸. 라핀제스는 중얼거렸다.
구름같이 하얗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날렸다. 달큰한 크림 케이크에 몸을 파묻은 것 같은 기분에 배부른 고양이가 갸릉거리는 듯한 소리가 절로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는 라핀제스 옆에 반쯤 기대 누운 시오엔은 이전에 읽던 내용을 마저 읽으려 책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허나 뒤척거리다 대뜸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라핀제스 탓에 그의 작은 노력은 그나마도 무산되고 말았다. 유려한 아미가 치켜 올라갔다.
“형님. 아무래도 잠이 안 와요. 노래 불러 주세요. 응?”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라핀제스의 이마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네가 귀신이나 천둥번개 따위, 무서워하기는커녕 신경 쓰지도 않는 녀석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알고도 재워주는 이 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지는 못할망정, 노-래?”
“...미안. 하지만 내 방은 언제나 춥고 외로운걸요. 혼자 있기 싫어서 그랬어요.”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조적인 표정으로 쓴웃음 짓는 동생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시오엔은 괘씸한 마음에 꿀밤 한 대 더 때려주려던 손을 멈추었다. 라핀제스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어미에게도 아비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이의 부탁에는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그가 유독 자신에게만 약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 동정이라도 상관없어. 나에게 관심 가져줘. 사랑해줘.
시오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만이야. 라핀제스의 눈이 반달처럼 예쁘게 휘었다. 응.
그대의 금발에선 바람 냄새가 나오
흙도 물도 아닌 바람의 냄새라오
낮은 곳에서 비둘기처럼 속삭이다가
높은 곳에서 매처럼 나는 바람이라오
달 이울고 별 저물어 흐린 밤에도
발아래 수천 겹 바람 밟고 간다오
하늘 땅 맞닿은 세상 끝 이르도록
하늘 뱃길 가는 하늘 뱃사람이라오
황태자인 그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노래 부르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핀제스는 지금 이 안온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뜻모를 우월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시오엔은 평소 대화할 때조차 상대를 녹일 것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곳에서 대사를 읊고 노래하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에 빛을 불어넣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비단 노래할 때만 발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의 곁에 휘장처럼 둘러쳐져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런 시오엔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라핀제스의 유일무이하다시피 한 즐거움이었고 심지어 일종의 사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형님.”
“왜.”
“성군이 되십시오.”
시오엔의 표정이 희한한 것을 본 마냥 묘하게 변했다.
“... 노래가 마음에 안 들었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라핀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작은 양 손을 펼쳐들었다.
“나, 명색이 계승권을 가진 2황자라 대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황제 자리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아요. 이 손에 들리는 건... 시클라멘 황후 마마와 형님,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줄 사랑과 또 받을 사랑이면 그것으로 족한걸요. 나는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 라핀.”
“형님의 신하로 오래오래 일하다가, 나중에는 노래에 나오는 사람처럼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바람이 되고 싶어요. 책에서만 봤던 바다도,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사람뿐이라는 신비한 곳인 동대륙도, 사막도 설산도 모두 이 두 눈에 담을 거예요.”
“너의 뜻대로 될 거야.”
나직한 대답이 귓가를 일렁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 형님, 제가 그리할 수 있게 꼭 성군이 되십시오.”
“그래.”
“꼭이요.”
“응.”
넓게 자리한 창문 밖 하늘에 어렴풋이 붉은 여명의 띠가 드리워졌다. 새벽이 가까워왔다. 은빛 머리카락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라핀제스가 늘 좋아했던 맑은 하늘빛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서늘한 흰 손이 이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나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주위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방 안에 어스름이 내렸다. 밤이 오는 것처럼, 자신이 무릎을 베고 누운 형의 모습도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으려 애를 썼으나 잡히지 않았다. 곧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
찰박.
끈적한 액체가 발 밑에 엉겨붙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녹슨 쇠붙이의 비릿한 냄새가 날카롭게 코끝을 찔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따뜻한 방 안에서 형님의 무릎에 누워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뭐지. ...꿈?
아까보다 높아진 눈높이에 당황한 라핀제스는 이내 왠지 모르게 묵직한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손에는 하얀 검이 날서린 이빨을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많은 이의 피를 맛본 듯 귀기어린 붉은 칼날을 따라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아, 설마 이건.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겪었던,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그것이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을 보았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라핀제스는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면 마주칠 장면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다음은...
눈물젖은 하늘빛 눈이 충격과 증오로 얼룩져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에게 안겨 방금 전까지 라핀제스가 누워있던 무릎에 눕혀진 그녀의 치마는 연한 분홍빛이었다. 거기에 누가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처럼 빨간 무늬가 도드라져 흩어져 있었다. 정말 이상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칠 듯 그 생각에 자신을 옭아매는 마음 속 손이 있었다. 막 꺾은 장미 꽃잎 흩뿌린 듯이, 돌아버릴 것처럼 아름다워서.
“네가, 네가 어떻게 이따위 짓을! 어떻게 어머니를...!”
자신을 권력의 도구로만 생각하던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황후 시클라멘은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숨기고 주지 않는 달콤한 과자들은 시클라멘님의 치마를 잡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하면 쉽게 손에 쥐어졌었다. 마음이 여려 아무 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을, 내가 어떻게 해칠 수 있겠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미 친듯이 소리치고 싶었으나 절규는 입 안에서만 맴돌 뿐 꿈속의 자신은 석상처럼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오엔의 턱 끝에 맺힌 눈물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공교롭게도 눈가에 떨어진 방울에 마치 시클라멘이 우는 듯하였다. 살아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해 주세요. 이 모든 것이 나를 놀리려고, 재밌게 해주려고 하는 연극이라고 말해 줘요.
“황위가 그렇게 탐이 났었나. 하하, 솔직하게 얘기나 하지 그랬어. 나는 병 신같이 네가 한 말을 다 믿었지 않았나.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꿈 많은 2황자라니, 가당치도 않지. 말도 안 돼지.”
거짓말이 아니야. 한번도 바란 적 없어.
시오엔은 눈을 감고 차가운 시클라멘의 이마에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좋은 꿈을 꾸라는 다정한 굿나잇 키스처럼, 또는 결의를 다지는 숭고한 맹세의 입맞춤처럼. 고개를 들어 다시 마주친 그의 눈은 북풍같이 그저 싸늘하기만 하였다.
“절대로 잊지 않겠어. 지금 이 순간을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눈물을 머금어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라핀제스를 똑바로 직시했다. 숨이 막혔다.
“너의 죄는 운명의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나 시오엔은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마침내 독이 든 업의 잔이 네 앞에 돌아왔을 땐 결코 피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라핀제스 아델레이트.”
“나는...!”
제발 꿈에서라도 그게 아니라고, 오해라고 해명하게 해 줘. 다급하게 외쳤으나 다시 세상이 빙글 돌며 일그러졌다. 이내 그의 정신도 암전하듯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흐,으...”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검은 머리를 타고 미끄러졌다. 그 빛을 쥐어채기라도 할 마냥 날카롭게 솟은 뼈마디를 가진 손이 붉은 이불을 찢어져라 움켜쥐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는 비틀대며 일어났으나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그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속삭이며 키득대었다. ㅡ네가 받을 벌은 평생토록 그렇게 사는 너 자신이야.
라핀제스는 머리를 싸쥐며 나직이 말했다.
“아아, 제발 조용히 해.”
그러자 목소리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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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월요일 격주연재가 되어 버렸어..! 이게 다 월공 때문입니다 여러분.
음음. 저 -네가 받을 벌은 평생토록 그렇게 사는 너 자신 - 이라는 말은 영화 \'홀리 모터스\' 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꽤나 난해한 영화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오타지적& 날카로운 비평 사랑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댓글로 달아주세요:D
cf. parodos ; 코러스가 입장하여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합창부에서 독창 또는 합창으로 부르는 곡.
cf 2. 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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