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로 걸어가는 고신을 따른 엔젤이 슈퍼 밖에 있는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집어 오는 것을 놀랍도록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 정도의 사이가 되었던가, 엔젤이 집어 들고 온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태어나서 아이스크림을 처음 본다는 용처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슈퍼 주인을 깨우듯 요란하게 계산대 위로 아이스크림 두 개와 라면 두 개를 올려둔 엔젤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오백 원짜리 달랑 하나만 가져온 고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지 않은 것이다.
고신은 좁은 부엌 구석에 있는 버너에 불을 올리고 나서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물을 담았다. 항상 혼자 끓여 먹던 것이 버릇이 돼서 두 개를 끓일 때 물 양은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몰라 뒤를 힐긋 돌아보곤 그냥 대강 수도꼭지를 잠그고 버너에 냄비를 올려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자주자주 머릿속에 두문분출 하던 그 애가 제 눈 앞에 또 거짓말처럼 와 있고 그 애와 함께 집에서 라면을 먹게 되다니. 고신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냄비 안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 때 머리채를 한 번 잡았어야 했는데, 뺨을 한 번 갈겼어야 했는데 싶다. 그렇지만 그 때로 돌아가도 어이없게 웃었을 것이다.
넌 왜 나한테 안 쫄아, 그러니까 내가 너를 왜 무서워해야 하는 거냐고, 같은 대답이었을 테니까. '
조그맣게 기포가 올라오기에 대강 라면을 부러뜨려 스프까지 탈탈 털어 넣으며 돌아섰다.
엔젤 : "발인은 잘 했어? 안 울었어? 그거 되게 슬프다던데."
고신 : "별로 안 슬프던데."
엔젤 : "야. 되게 슬프단 말 처럼 들리는데, 그 말."
고신 : "....."
엔젤 : "할머니 있잖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뜬금없는 말에 비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그런 말을 그렇게 스크류바를 돌리며 할 건 뭐야. 고신이 웃자 엔젤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스크류바를 빼고 쳐다보기에 고신은 더 웃었다. 진짜 특이한 애다. 그런 주제에 반장이라고? 고신은 다시 돌아 냄비 안의 딱딱한 라면을 저었다. 좋은 곳? 거기가 아무리 좋은 데라도 거지같은 꼴 안 당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 돈이 있어야 한다고. 돈이 있으면 어디에 가도 좋을 거야.
고신은 생각했다. 갑자기 할머니 부재가 고신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할머니는 지금 고신의 어깨 위에 있나, 생각하고 나자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다, 아니야. 할머니는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나쁜 짓도 안 했으니까 구천을 떠도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엔젤 : "너 진짜 자퇴할 거야?"
고신 : "어."
엔젤 : "너 그 오토바이 타는 애들, 걔네랑 놀러 다니려고 그러는 거지?"
고신 : "아닌데."
엔젤 : "그럼 왜 자퇴를 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어디라도 취업이 된 댔어."
고신 : "좆같은 학교 안 가고 말지."
엔젤 : "말 하는 것 좀 봐. 넌 왜 그렇게 험한 말을 써?"
고신 : "내 말하는 게 뭐, 시발."
엔젤 : "또 봐."
고신 : "좆같은 학교가 왜."
엔젤 : "아, 진짜 너. 말 좆같이 한다."
엔젤은 주눅이 들지 않는다. '말 진짜 좆같이 한다' 라고 마치 고신의 말을 인용하듯이 어색하게 말해버리고는 다시 스크류바를 입 안에 넣고 돌렸다. 다 끓어 넘치기 시작한 라면에 불을 아예 꺼버린 고신이 허둥대는 동안 엔젤은 태연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엔젤을 밀치며 상체만 방 안에 집어넣고 방구석에 세워진 반상의 다리를 폈다. 구석이 찌그러진 반상 위에 닦지 않은 김칫국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 행주를 던지듯 올리고는 또 그 위로 라면 냄비를 올렸다. 기울어진 냄비를 엔젤이 바로 잡으려 맨 손으로 만지다 뜨거워하며 귓가로 옮긴다.
고신은 젓가락을 던지듯 엔젤 쪽으로 놓아주고 슬리퍼를 벗고 방 안으로 몸을 들였다. 어색하게 문 앞에 걸터앉은 엔젤이 상을 질질 끌며 고신을 따라 아예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고신은 마침내 길고 긴 작업 끝에 완성된 풍경화인 듯 구경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엔젤은 익숙하게 고신의 맞은편에 앉아 다시 그 냄비 손잡이를 만지려고 한다. 고신이 그 손을 저지하며 라면을 퍼서 그릇으로 옮기자 엔젤도 역시나 고신을 따라 라면을 그릇 안으로 담았다. 설익은 라면 가닥이 다닥다닥 붙어 잘 씹히지도 않고, 사실 뭘 씹는 지도 무감각해지는 느낌에 그런 라면이 다 비워지도록 둘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고신이 벽에 기대서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멀찍이 벽에 앉은 엔젤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보았다. 연기 속의 엔젤의 모습을 마주하자 고신은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꿈에서 한 번 엔젤을 만난 것 같기는 하다. 하도 특이하니까, 이상한 애니까, 제게 주눅을 들지도 않고 꼽주려 하는 말에 조곤조곤 다 반박하던 애였으니까. 화를 냈어야 했는데, 정말 다른 애들한테 하듯이. 근데 그런 시도를 할 맘이 들긴 했나, 생각해봤다.
아니, 그런 적 없다, 절대로. 고신은 연기를 당기며 배 쪽으로 떨어지는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시도는 개뿔 그런 생각조차 한 적도 없던 것 같다. 왜? 예뻐서? 주눅 들지 않아서? 왜지? 근데 예쁜 거랑 주눅 들지 않는 거랑 뭔 상관이야. 엔젤이 내민 건 흰 봉투였다.
엔젤 : "반 애들이랑 조의금 좀 모았어. 장례식장에서 줬어야 했는데 그 땐 너무 경황이 없어서. 덜 모았거든."
고신 : "....."
엔젤 : "그리고, 내일은 학교 와."
고신 : "야... 내가 학교를 가든 말든 너랑 뭔 상관이야."
잠시 장례식장에서 봤던 것처럼 엔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신 역시나 그 때처럼 눈길을 피했다.
엔젤 : "그냥, 반장이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고신 : "뭐?"
엔젤 : "몰라. 짝이라서 그런가, 신경 쓰여. 됐어? 무튼 애들이 왜 널 무서워하고 피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한 살 많은 게 뭐라고 같은 학년인데, 하는 짓도 웃기기만 한데, 뭐가 무섭다고."
고신 : "너 존나 특이해."
엔젤 : "내가 아는 용 중에 니가 젤 특이한데. 고등학생이 담배나 피고. 야 근데 너,"
고신 : "나 뭐,"
엔젤 : "담배 피는 모습 되게 좋다."
고신은 훅 하고 연기를 내 뱉고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담배를 서둘러 재떨이에 비벼 껐다. 존나 이상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되는대로 행동한 것이다. 좋다는 말은 데빌에게도 들었고 그 무리 중 누군가에게 또 들었던 것 같다. 그 말에 당황한 적은 없다. 고신은 ㅈ다신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엔젤의 두 눈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피해버렸다.
애꿎게 라이터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 어색한 시간을 휘발시키려 했다. 신경이 쓰인다는 엔젤의 말이 더 신경이 쓰인 고신이다.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게 따뜻한 관심을 받기 위해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 때는 고신도 착하게 말하고 착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할머니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 봐 주리라 믿었지만 고신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다른 아이들에게는 놀리기 쉬운 가난한 애에게 그럴만한 명분이 되었다.
근데 고신의 배경을 싹 지운 엔젤이라는 애가 제게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나도 사실은 니가 신경이 쓰이긴 해, 라는 말을 집어 삼킨 고신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라이터를 놀리는 동안 엔젤이 그런 고신에게로 다가왔다. 늘 고신에게 당하던 모든 아이들처럼 고신이 몸을 움츠리며 벽에 딱 붙었다. 그렇게 다가와 나란히 앉은 엔젤이 대뜸 고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고신이 고개를 뒤로 빼자 웃으며 입을 연다.
엔젤 : "학교 올 거지?"
고신은 거짓말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주술을 외는 마술사와 그 주술에 홀린 누군가가 되는 기분으로. 고신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을 믿지 못해 두 뺨을 쓰다듬었다. 눈 앞의 엔젤이 풀썩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서 조심스럽게 치맛단을 정리하고는 부엌으로 발을 내딛는다.
고신이 슬그머니 엔젤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신발을 꿰어 신는 엔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 다시 학교로 가는 걸까,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선 고신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엔젤이 신경쓰였다. 고신은 이 불쾌한 감정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런 채로 웃는 엔젤이 홱 하고 등을 돌려 미닫이 문을 열자 끼이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고신은 부엌 쪽으로 머리만 문 밖으로 내었다. 고개를 끄덕인 건 실수라고 변명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싶다.
마치 겅중겅중 사이를 뛰어넘고 친해진 듯 이상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였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학교 온다고 했다 너? 내일 봐. 손을 흔들고 멀어지는 엔젤을 보며 고신은 입만 굳게 닫았다. 아니, 안 갈 건데, 라고 대답을 하지 못한 건 다 끄덕인 탓이라고 고신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