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Ep.01: 경계
거대한 신전의 기둥 뒤편은 언제나 서늘했다. 속성별로 쪼개진 구역의 결계들이 일주일에 단 한 번 임시로 맞물리는 날, 용의 신전은 온 종족이 한데 엉키는 거대한 해방의 공간이 되었다. 갓 부화를 끝난 어린 용들의 호기심 어린 울음소리와 수백 년을 살아온 원로들의 호탕한 포효가 높은 석조 천장을 두드렸다. 노점마다 구워대는 고기 냄새와 달착지근하고 찐득한 과일 술의 향취가 자욱하게 번져 나갔다. 어른 용들은 서로의 잔을 부딪치고 오랜만의 안부를 묻는라 바빴다. 그 떠들썩한 활기 속에서, 훈련생 딱지를 달고 있는 두 용은, 그저 풍경의 일부처럼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북적이는 인파의 꼭대기, 가장 높은 제단 옆 잔디밭에는 뻣팎하게 날을 새운 하얀 가죽 갑주를 입은 백룡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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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감싸는 하얀 갑주가 목덜미 비늘을 꽉 죄어와 숨이 턱 막혔다.
“백룡, 날개 깃을 내리세요. 빛의 후계자가 축제의 소란에 휩쓸려 꼬리를 천박하게 흔드는 것만큼 보기 흉한 것은 없습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원로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다정함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비늘을 파고드는 송곳 같았다. 조금만 눈동자를 굴리거나 날개를 조금만 흔들어도 어김없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차가운 정화 마법. 그것은 다친 곳을 치료해 주는 온기가 아니라, 감정과 생각을 강제로 표백해 버리는 통제였다.
가식적이고 오만한 원로들 같으니라고.
저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빛의 용들을 대표할 흠 없는 인형 하나가 필요할 뿐이었다. 잔소리를 마친 원로가 이내 다른 구역의 원로들과 호탕하게 술잔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따뜻해지기는커녕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신전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수많은 용들이 엉켜 춤추는 광장 한복판, 불꽃이 튀는 화로 옆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 가죽 끈을 대충 몸에 걸친 채, 아무렇게나 걸어 다니는 조그만 덩치.
흑룡이었다.
그 아이의 주위에는 규율도 억압도 없어보였다. 어둠용들의 어른들은 고기를 뜯고 소리를 지르느라 그 애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가식적인 미소를 지을 필요도 없고, 기분이 나쁘면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려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 통제된 신전의 그늘에서 박제되어 가는 나와 달리, 거친 모래바닥 위에서도 날것의 생동감을 뿜어내는 동생의 존재는 눈이 시리도록 강렬했다. 비참할 정도로 그 자유가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하지만 흑룡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좋은 대접을 받으며 온실 속에서 예쁨만 받고 자란 나약한 공주님. 번지르르한 갑주 속에 숨은 겁쟁이. 내 마음 속에서 도사린 구차한 시기심을 들키는 순간, 그 아이는 분명 나를 혐오하고 한심해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앞발 끝이 바닥 흙을 짓이기며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약해 보이지 않으려면, 누나답게 더 차갑게 굴어야 한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날개깃을 바짝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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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화로는 뜨거웠지만,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은 지독하게 시렸다.
“고귀한 혈통값을 해라. 진정안 어둠의 전사는 분위기에 취해 꼬리를 늘어뜨리지 않는다. 약해 빠진 꼴을 보이면 당장 도태될 줄 알아.”
스승은 내 조그만 흠집 난 어깨를 툭 치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지더니, 이내 어둠의 용 원로들과 뼈째로 고기를 씹어 삼키며 웃음판에 끼어들었다.
지독하게 끔찍하고 징글맞은 원로들 같으니라고.
속으로 거칠게 욕을 짓씹으며 콧감을 홱 뿜었지만, 그들의 안중에서 나는 진작에 지워져 있었다. 사흘 전 훈련장에서 구르다 찢어진 날개 축지와 비늘 틈새로 진물이 배어 나와 감아둔 붕대가 눅눅하게 젖어 들었지만, 누가 하나 괜찮냐고 어둠 용들의 지역은 그런 곳이었다. 강한 혈통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었으면서도, 정작 살아남는 것은 온전히 어린 나 혼자의 몫이었다. 매일 밤 아픈 몸을 웅크린 채 홀로 상처를 핥으며 버티던 기억들이 축제의 소음 속에서 웅웅거렸다. 사방에서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 화려한 축제는, 내게 그저 가장 시끄러운 지옥에 불과했다.
고개를 돌려 인파 너머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신전에서 가장 높은, 햇살이 부서지는 잔디밭 위에 홀로 고결하게 서 있는 하얀 비늘을 발견했다.
백룡이었다.
단 한 번도 진흙탕에서 굴러본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하고 고결한 누나. 다칠 일도, 피를 흘릴 일도 없이 그저 조용히 꼬리를 말고 서 있기만 해도 천계의 용들이 알아서 우러러보고 모셔주는 완벽한 존재. 늘 다정한 빛과 온기 속에 둘러싸여 자란 누나의 모습은, 상처투성이인 내 눈을 멀게 할 만큼 눈부셨다. 나처럼 비참하게 생존 투쟁을 벌이지 않아도 되는 그 삶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질투가 나 속이 뒤틀렸다. 나도 딱 한 번만 저렇게 걱정 없는 온기 속에서 푹 자보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는 나를 괴물 취급 하겠지. 진흙탕과 피비린내 속에 구르는 지저분한 놈이라고 혐오할지도 모른다. 이 외롭고 구걸하는 듯한 속마음을 들키면 분명 비웃을 게 뻔했다. 기죽지 않으려면,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야 했다.
일부러 날개를 크게 파닥이며 누나가 있는 제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목덜미 비늘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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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잔디밭을 밟고 올라와 내 앞에 섰다.
가깝게 다가온 흑룡의 몸에는 조그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굵은 붕대가 앞발과 날개 축지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 꺼칠한 붕대 틈새로 붉은 핏자국이 어렴풋이 비쳤다.
저 붕대 아래에는 얼마나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는 걸까. 마계의 잔인한 원로들이 아직 날개 짓도 서툰 내 동생을 저 지경으로 내몬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날개를 넓게 펼쳐 그 다친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저 조그만 앞발을 내 앞발로 감싸 쥐고, 천계의 따뜻한 빛 마법으로 붕대를 다 녹여주고 싶었다. 앞발 발톱 끝이 미세하게 쥐가 난 것처럼 찌르르 떨려왔다. 닿고 싶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내 조그만 움직임을 감지한 흑룡이 흠칫하며 목을 뒤로 뺐고, 그 순간 우리 사이에 흐르던 기류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여전하네, 천계의 공주님. 비단침대에서 자라 그런지 비늘에서 광택이 난다?"
흑룡의 주둥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가시 돋친 비아냥이었다. 녀석의 긴 꼬리가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 꼬리끝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뻗으려던 앞발을 바닥에 강하게 디디며 몸을 뒤로 물렸다. 발톱이 잔디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 같은 겁쟁이가 무슨 자격으로 다정한 말을 건넨단 말인가. 저 차가운 폭풍 속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하게 살아남은 흑룡에 비하면, 나는 원로들이 씌워놓은 화려한 껍데기 속에 갇힌 가짜일 뿐이었다. 이런 내 위선적인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은 동생을 모욕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미움을 받는 게 나았다. 마음에도 없는 날카로운 대답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말을 꼭 그렇게 삐딱하게 해야겠어? 매사 그 모양이니까 밤낮 피를 흘리고 다니는 거야."
내 말에 흑룡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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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차가운 음성이 고스란히 귓가를 찔렀다.
역시나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는 나를, 밤낮 다치기만 하는 미련한 놈을 혐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붕대가 감긴 앞발을 슬그머니 꼬리 뒤로 숨겼다. 비참함에 온몸의 등 비늘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한 걸음 물러서는 내 꼴이 너무 우스워서 오기가 났다. 작은 날개가 수치심으로 부르르 떨렸다.
저 완벽하고 고결한 얼굴로 내뱉는 말들이 하나하나 내 비늘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칠 걸 그랬다. 누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대가가 고작 이런 조롱 섞인 훈계라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내가 괴물이 아니기를 바랐다. 나를 밀쳐내지 않고 따뜻한 날개 깃으로 감싸 쥐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앞의 하얗게 빛나는 누나는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있었다. 나 같은 더러운 어둠에게 내어줄 온기 따위는 한 줌도 없다는 듯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고 미워서 이 공간을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구르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신경 꺼."
내뱉은 말과 달리,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며 떨렸다. 한 번만 다정하게 쳐다봐 주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누나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고,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던 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갈게."
짧게 뱉어내고 휑하니 뒤를 돌았다. 축제의 소음이 다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며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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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검은 뒷모습을 보며 백룡은 바닥을 딛고 있던 앞발의 힘을 서서히 풀었다. 잔디밭에는 깊은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신전 광장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용이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화려한 마법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원로들의 웃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눈부신 대축제의 한복판에서, 돌아선 두 어린 용의 머릿속은 지독하리만큼 닮은 자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렇게 완벽한 백룡은 내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나 같은 지저분한 동생은 생각도 안 할 거야.
저렇게 자유로운 흑룡은 내 억압 따위는 상상도 못 하겠지. 나 같은 나약한 누나는 생각도 안 할 거야.
모두가 환호하는 대축제의 밤, 서로의 진짜 현실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모른 채, 어린 남매의 진심은 오늘도 장벽의 소음 속으로 닿지 못하고 엇갈려 흩어졌다.
끝
안녕하세요
정말 아주 오랜만에 돌아오게 된 실버윙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많은 작품을 연재하면서 완결화를 적었던 기억은 한두번에 불과하다 보니 글도 안 써지고 아이디어도 퍼지더라고요.
그렇게 마지막 글인 5월 3일을 뒤로 2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저를 기억해주신 분들이 있을 거라고 바라진 않지만 이번에야말로 완결을 위해 최대한 열심히 노력할 테니 염치 없지만 한 번만 더 응원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작가의 말을 적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글을 연재 중이신 분들은 대부분 모두 저보다 훨씬 글을 잘 쓰시겠지만, 그래도 봐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재작을 봐주시길 바라며, 오래만에 복귀글을 올립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