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이 바뀌어 장마철이 왔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습한 공기는 피부를 끈적하게 만들어 기분좋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옷깃을 적시기 시작한지도 한참이 되었지만 굳이 비를 피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이내 몸을 불려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마치 눈물 같다, 고 라핀은 생각했다. 자신답지 않게 감성적인 비유라고 멍하니 되뇌이면서.
언젠가 바닥을 기어다니는 괴물이 있다고 라핀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치 하수구의 오물덩어리같은 흉측하고 시꺼먼 그것은 그림자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삿된 생각이라고 접어 누르던 어린 날 그것은 언제나 발 밑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그것이 지금 제 발 밑에 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제 몸을, 제 정신을 좀먹어가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들이 마비 된 것처럼 무뎠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었다. 깊은 숨과 함께 기침을 토해내자 시야가 트였다. 질척거리는 바짓단이 무겁게 따라 올라왔다. 발 밑의 그림자에 숨은 괴물이 질컥질컥 따라오는 것 같았다. 라핀은 차가운 눈가를 비볐다. 어지럽게 부서져 널린 감정들이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눈가가 젖어들었다. 머릿속에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다 들어 앉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괴롭히는 것 같았다. 괴로운 기분을 느끼며 라핀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발 아래에 괴물이 시꺼먼 입을 벌리고서 잡아 끌어내리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이 끔찍한 기분이, 제 발 아래의 괴물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넷...
제 어깨에 닿은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란 라핀은 가볍게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에스텔의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 맴돌았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라핀, 내 말 들었어? 괜찮아?”
“아, 음, 괜찮아. 그보다 뭐라고...?”
“나 결혼해.”
발 아래에 시커먼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기회를 엿보며 음흉한 혓바닥을 낼름거리던 그것이 몸을 칭칭 죄어 올랐다. 귓가에 대고 그것이 낄낄거리며 박장대소했다. 또 뺏겼구나. 평생 너의 것이라고는 결국 하나도 없어. 불쌍한 라핀제스.
“날 보고 웃는 푸른 눈이 아름다운 사람이야. 바라만 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
“...그렇군.”
라핀은 에스텔이 말을 끝낼 때까지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서서히 깨어나는 사람처럼 겨우 대답했다. 어딘가 콱 막히는 느낌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꿈속의 자신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애써 호선을 그린 입술은 붉게 젖어 반짝였다. 에스텔. 지워진 얼굴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부연 얼굴이 가슴속을 꽉 메워 터질 것 같았다. 숨쉴 수 없는 고통에, 귓가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에 그는 절박했다. 흘러나가야 할 감정들이 고이고 고여 썩어들기 시작했다.
“엘로윈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때에 식을 올렸으면 좋겠어. 아마 그때면... ”
“에스텔. 아무 말도 하지 마.”
처음 보는 순간부터, 빛의 일족에서 태어났으나 붉은 눈의 새까만 몸을 갖고 있어 불길하다며 손가락질 받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던 그 순간부터였을까. 수많은 사람들에 섞여있어도, 어쩌다 고개를 들어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눈을 마주하고,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렇게 끌렸고 그렇게 다가갔고, 그렇게 그녀의 영혼 근처를 맴돌다 결국 이렇게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사람들의 기대, 모든 것을 형에게 빼앗겼어도 평생 단 하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녀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행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살아가고 싶었다. 힘들고 외로운 이 삶에 단 하나 내려온 구원에 감사하며 살고 싶었다. 내면이 무너지고 부서져 내렸다. 조각조각 다 부서진 심장의 파편들이 발 아래에 자박자박 밟혔다.
깨져버린 마음 위에서 라핀은 울었다. 빗줄기와 얽혀 엉망이 된 눈가 위로 축축하게 젖어든 눈물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표현조차 어찌할 줄 모르는 억눌린 울음을 물고서 토해지듯이 번졌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이 가슴을 저몄다. 에스텔은 망연히 서 있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미안해, 미안. 미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하얀 두 손을 뻗어 라핀의 얼굴을 감쌌다. 가는 손끝이 눈 위로 올라앉아 시야를 가렸다. 젖은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덮었다. 온기와 함께 어둠이 찾아들었다. 눈 위를 더듬는 손길에 그는 역설적이게도 위로받았고, 상처받았다. 그래서 도저히 소리 없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에스텔은 라핀이 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젖은 눈가를 제 얕은 손으로 덮는 것으로 그리하도록 두었다. 눈을 덮은 하얀 손 안은 금방 젖은 열기로 가득 찼다. 라핀은 슬픔으로 가득 찬 더운 숨을 내밭았다. 그리고 이내 제 눈을 덮은 에스텔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여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나의 발퀴레.”
하얀 손끝이 바르르 작게 떨렸다.
“이젠 너를 위해 살 수는 없을 테지만.”
꿈속에서조차 너를 잡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내인가.
“네가 있어서 살 수 있게 될 테지.”
.
.
뒷머리에 닿는 차가운 바위의 감촉에 라핀은 잠에서 깨어났다.흐린 햇살이 물결치듯이 칠흑 같은 머리 위로 미끄러졌으나 그는 바위에 머리를 기댄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동굴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울한 하늘과 차가운 바람, 축축한 빗방울. 라핀은 비가 오는 날을 싫어했다. 여지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의 꿈을 꾼다.
‘에스텔.’
사랑했고 사랑했으며 결국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여자.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라핀이 그녀에게서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은 그저 아마빛 머리, 목소리, 엘로윈 꽃 내음, 작고 가냘픈 몸. 그런 뭉그러진 덩어리들이었다. 두통과 울림이 반복될 뿐 그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흩어진 기억 속을 헤매며 부수고 울고 애원하고 분노했지만 끝내 그녀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해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 이제는 망령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으로 이루어졌다. 꿈에서나 한번이라도 보여주려나 해도 지워진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컴컴한 미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나아가고 나아가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입구 없는 미로. 그는 그 속을 수천번 수만번을 돌지만 입구를 찾지 못했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라핀은 마른세수를 했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이미 죽은 그녀가 그리움에 사무쳐서 자신을 죽여 나가는 것 같았다.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기억들이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게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꽉꽉 누르고 닫아도 지우고 잊으려 해도 그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가쁜 숨을 토해냈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을 그리워하며 같은 하늘 아래에 없는 것을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절망 그 자체였다. 보내지 못하는 것은 제 집착이었다.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 그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녀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대로 죽어 버릴까봐 두려웠다. 어떤 감정이라도 좋았다. 어떤 감정이라도 타올라 뱉아 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그 약간의 숨구멍만 있으면 되었다. 그것 뿐이었다. 숨쉴 수 있는 아주 작은 구멍.
마치 짐승처럼 억누른 소리가 가슴 속에서부터 새어나왔다. 흐느낌인지 분노인지 모를 혼돈이 섞인 소리가 바닥 아래로 낮게 깔렸다. 결국에는 죽어가는 헐떡임이 가쁘게 흘러나왔다 사라지자 사내의 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미안해, 미안. 미안. 정작 상대는 들을 수 없는 뜻없는 사과만이 길을 잃은 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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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웹소게에 얼굴 비추는 이실레입니다:D 사실 방학이라 할게 없어서...후후..
음. 아모르의 대행자이자 빛의 일족의 수장인 고대신룡과 빛의 일족으로 태어났지만 붉은눈의 검은 몸체로 인해 저주받았다 불길하다 손가락질 받고 자란 동생 다크닉스, 그런 다크닉스를 동정했지만 사랑은 하지 않았으며 결국 고신과 결혼한 엔젤 드래곤 ㅡ 후에 다크닉스는 폭주하여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여버리게 됩니다 ㅡ 으로 과거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싶었는데 썩 만족스럽진 않네요 \'ㅅ\'...
무심하게 툭툭 던져주는 동정이 당사자에겐 평생의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그런 내용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타지적. 비판 환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