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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테제 - 0. Prelude
2021-06-04 16:58:34
그 세계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실종사건이었다.
누가 학교에 며칠째 등교하지 않고 있다,
누가 회사의 연락도 받지 않고 무단결근을 했다,
누가 심부름을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것이 며칠째, 몇달째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영상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내고는 곳곳에 알리기 시작했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내용의 글/그림을 믿지 마라.'

그러나 자기 앞에 갑자기 뚝 떨어진, 소원을 이뤄준다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인 사실은, 그 유혹이 아주 극소수에게만 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불행인 것은, 그 중 하나가 본성을 감추고 살던, 끔찍한 악인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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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은 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입사한 것이 아닌, 신생 공단의 공장에서 늘 그렇듯 기계부품처럼 일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상사의 욕지기를 받아내고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를 갉아먹어가고 있었다. 근무가 끝나면 술을 마셔야겠다, 그녀는 생각한다. 갉아먹힌 부분을 채우는 데엔 그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상사 되는 남자의 욕지기가 끝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찾아오자, 늘 그렇듯 그녀의 공장 입사 동기, 김유빈이 다가온다. 사교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사람을 밀어내는 유지연의 천성도 무시하고 냅다 들이밀기 일쑤였고, 유지연은 그런 그녀를 오늘도 적당히 받아주려고 했다.

"얘, 지연아. 있다가 술 한잔 안 할래? 너 단체로 깨지면 매일 한 잔 하잖아. 오늘은 나도 끼자. 응?"
"...그러든가."
"너 또 욕먹었다고 우울해져 있구나? 기분 풀어, 얘. 안주거리로 쟤나 뜯자고."
"그런거 아니야. 지금 좀 화나서 그래. 농담 아니고 진짜로."
"하기사 화 날 만도 해. 지들이 납품일 헷갈린거 우리한테 왜 그런대?"

사실...유지연은 우울해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적의와 증오에 휩싸인 채였다. 다만 그녀가 그녀가 '일말의 이성'이라고 이름지은, 사회적인 이익이니 불이익이니 하는 이모저모를 과하게 따져대는 탓에, 평소에 그것이 우울처럼 보일 뿐이었다. 사람을 가능한 한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천천히 죽이는 상상을 그 누구보다 자주 한다는 것을, 제 눈 앞의 순진해빠진 단발 여자는 모를 거라며 지연은 속으로 실소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류의 실소를 잘 들키는 편이 아니었다.

"일단 좀 쉬자. 진짜 갑자기 그래서 놀라가지고...맞다, 너 안 체했니? 너 놀라면 자주 체하잖아."
"나한테 되게 관심 많네."
"난 모두한테 관심 많은거 너도 알잖니."
"그래, 그래. 다행히 이번엔 안 체했어. 한 쪽 귀로는 몰래 노래 듣고 있었거든."

지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가 옷 안쪽으로 넣어 숨긴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거친 기타 소리와 드럼이 들려오는, 메탈 음악이었다. 어느 국적의 노래인지 모를 가사도 함께.

'Radio, Meine Radio.
Ich lass mich in den Äther saugen,
Meine Ohren werden Augen...'

"그러는 것도 재주다 얘. 맞다. 너 블루투스 스피커 가지고 다니는 걸로 노래나 듣자."
"그러시든지."
"빌린다~"

유빈이 지연의 사물함을 뒤적이기 시작한다...아니, 사실 뒤적일 것도 별로 없었다. 지연의 사물함엔 입고 온 옷과 그녀의 가방, 그리고 신고 온 신발 외엔 그녀의 상비약인 탄산 소화제밖엔 없었으니까. 아마 그녀의 가방을 뒤지며 나온 소리일 것이다.

"사물함에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니. 이거 이 누나가 까까라도 넣어놔야겠구만!"
"동갑인데 뭔 누나야. 그리고 너나 나나 여자거든?"
"얘는, 농담도 못하니? 이 기지배야."
"농담 아니고, 지금 농담할 기분 아냐."
"지가 말을 농담같이 하면서. 아무튼 노래 튼다?"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유빈이 제가 듣는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지연의 신경을 긁곤 하는, 발라드 계열의 노래였다.

'안녕이란 두 글자만
끝내 믿을수가 없는가봐
사랑한단 그 말조차
이젠 다 부질없는 거잖아...'

"그 노래 말고 딴 건 없어? 되게 거슬리는데."
"너야말로 몇 번 볼때마다 진짜 특이해. 왜 발라드가 거슬린단거야? 니가 듣는게 오만배는 더 그렇네요. 쿵쿵거리기나 하고."

지연은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애를 끼고 어떻게 술을 마신단 말인가. 술이란 자고로 맛과 향을 모두 음미하면서 마시는 건데, 이런 계집애를 끼고서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실상은 저도 계집애였지만, 지연은 '계집애'라는 것을 멸칭으로 쓰는 것을 크게 거슬려하지 않았다.

"그런 건 가사 때문에 전체적으로 규칙적이지 않고 예측할 수가 없는데다 실상 똑바로 부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음만 높인다고. 내 취향에 토 달거면 술 얻어먹으려고 따라오지 마. 이거 농담 아니다."
"아, 아이. 그러지 마라, 야. 한번만 봐주세요, 물주니임~"
"참 내. 알았어, 알았어."

이내 딱딱했던 지연도 그녀의 애교섞인 앙살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졸지에 술약속이 생겼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혼자 술을 진탕 마시면 주인이 꼽주는 걸 얘로 막는다는 이기적인 이유밖에 없긴 했으나, 어쨌거나 받아들인것에 지연은 의미를 두었다. 오늘도 사교성 좀 나아졌다 생각하면서.

.
.
.

"...그래서 말야, 그 때 내가 그 놈 머리를 잡고 그냥 팍!!! 하려던걸 참았지 뭐야. 니가 맨날 하는 말 있잖아."
"분노는 잠깐이지만 통장 잔고는 영원하리라."
"그래, 그거. 그게 되게 도움되더라 얘. 그러면서 생각이 들었지. 야, 내가 니 덕을 다 보는구나! 하고."
"그렇구나. 아, 나 미안한데, 잠깐만. 게임 출석 보상 받아야 해서."
"어머, 너도 게임 하는구나?"

지연이 핸드폰을 열고 게임을 켰다. <드래곤빌리지>. 그 로고에 유빈이 반응을 보인다.

"어머머. 너도 그거 하니? 되게 의외다. 너 귀여운거 안 좋아할 인상이거든."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맨날 표정 굳히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메탈 아님 테크노랬나? 아무튼 그런 거만 듣는 애가 귀여운걸 좋아할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잖니."
"으음. 그리고 하드코어 테크노 아님 메인스트림 하드코어야."
"아무튼 하드코어라는 거지?"
"...그렇다고 치든지."

유빈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는 괜시리 앞의 생맥주만 홀짝거린다. 켜진 화면에 떠있는, '나쁜 남자'라는 칭호가 눈에 띈다. 얻기 쉬워서 흔히 달고 다니진 않는 칭호, 그리고 흑백에 빨간 색만 눈에 띄는 프로필 사진.

"프로필 사진이고 칭호고 되게 특이한거 달고 다닌다, 얘. 맞다. 친구 추가 안 할래? 내 닉네임 가르쳐줄게. 아니다. 일단 켜면 내가 친구 추가 걸어둘게."
"그러던지. 아님 니가 날 추가하든가."
"그게 낫겠다, 얘. 닉네임이 뭐니?"
"마이네하스."

검색을 해도 안 나오는 지연의 닉네임에 고개를 갸웃 하던 유빈이 지연의 핸드폰을 들여다봤고, 그제사 그녀는 왜 지연의 닉네임이 '마이네하스', 'Mainehass', 심지어 'ㅁrㅇi네ㅎr스'까지 셋 중 그 무엇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닉네임란엔 'Meinehass'라고 적혀 있었다.

"잠깐, 이거 메이네하스나 메이네해스 아냐?"
"독일 식으로 읽어서 그래."
"어...아무튼 친구 신청 넣어뒀어. 내 닉네임은 라무르야."

지연은 친구 창을 확인했다. 한글로 정직하게 라무르라고 쓰여있었다.

"라무르?"
"프랑스어 엘 아무르를 좀 변형한거야."
"르 아모르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라모르가 된다고. 모음 하나 차이지만 어감이 틀려."
"아무튼! 의미만 통하면 됐지."
"뭐...그래."
"앞으로 이것저것 도와줄게. 나 생각보다 육성 잘 해놨거든! 너도 육성 잘 된거 있으면 용병으로 올려놔!"
"그래. 과거의 내가 만들어둔 탱커 하나 올려놓을게. 옛날에 키운 거라 품종 자체 별이랑 세대는 딸려도 진짜 변태같은 스킬이랑 장비 세팅이라 몸빵 하난 될걸. 실제로 아직까지 현역이고."
"마침 나 1선 탱커 못 키우고 있었는데! 자주 쓸게! 골드 주머니 비워두셔!"

술자리가 게임 하나 덕에 꽤 화목하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라~디오, 마인 라디오~ 이히 라스 미히 인 디 아테 서겐~ 마이네 오겐 웨 덴 아우겐~"
"얘~ 너 취하면 노래하는구나?"
"노래가 좋아아~ 너도 메탈 들을래~?"
"집에 가서어~ 아, 택시이~ 난 인제 간다~ 지여니 안녀엉~"
"유비니 아안녀엉~"

택시를 타고 떠난 유빈을 뒤로 하고, 지연이 비틀대며 골목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꽤나 으슥한 뒷골목에 있었기에, 그녀는 취했음에도 정신을 꽉 붙들어야 했다.

"나아, 도 알콜 중독 같다니까. 집안 사정 곱창난 마당에 나도 이러면 안되는데에...아니, 사실 내 집안 같은거어...알게 뭐람. 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비틀대다 불이 깜빡이는 전봇대에 잠시 머리를 기댄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전단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떼어 읽었다.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지금 삶이 힘들진 않으신가요?
지금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으신가요?
지금 견디기 어려운 고통속에 있으신가요?
그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전단을 쥐고, 소원을 비세요.
그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어드립니다.'
"소원..."

알코올에 한껏 취한 그녀에게는 하단의 작은 글씨가 눈에 띄지 않았고, 그녀는 냅다 소원을 빌어버렸다.

"누구보다 세져서어, 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원하는거 다~ 하고 살게 해주세요! 나쁜거까지 전부 하면서! 인품 더러운 상사놈들, 기계부품같은 인간들 죽이기도 포함해서어!"

그 말을 마치자 마자, 그녀는 손에 들린 전단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 일대는 전부 CCTV의 사각지대에 속한 곳이었기에 영상 증거는 남지 않았다. 그 전단은, 그녀가 보지 못한 작은 글씨만 남아있다가 이내 백지가 되어버렸다.

'주의사항

저희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소원이 이루어진 상태이나 저희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의 소원만이 현실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머지 여러분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세계를 넘을 때 기존의 기억 중 이름은 지워집니다. 해당 기억상실은 현실로 돌아오면 복구됩니다.

해당 세계에서 사망할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당 전단을 처음 발견한 곳으로 이동됩니다.

해당 세계에서의 이름은 드래곤빌리지 닉네임으로 고정됩니다. 신중히 짓지 않은 닉네임으로 인한 불이익은 저희 책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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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삼아 무언가를 쓰는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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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몇년전에 쓰신 검은 혁명 재밌게 읽던 독자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2021-06-07 14:4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