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어어, 망할 숙취...망할 숙취..."
"아, 깨어났군. 이방인이여."
숙취에 몸부림치던 여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자기 방에 침대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이..."
"바구니, 아님 변기통, 어디야."
"그...이름..."
"화장실! 나 토한다고, 농담 아니고 진짜...흡. 토한다고!"
"저, 저쪽일세."
하얀 형체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간 그녀가 문을 닫은 뒤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냈고, 그 소리가 끝나고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 물 트는 소리, 그녀가 물을 잠그고는 숙취에 대해 푸념하는 소리를 끝으로 화장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망할 숙취...그렇게 퍼마시는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자네 이름이 뭔가?"
"이름? 명찰 봐. 근무복에 안 보이냐?"
그녀의 근무복에 있는 이름은 올이 전부 뜯어져나가 알 수 없다는걸 모르는 듯, 그녀가 가슴팍의 명찰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네."
"뭐?"
그제사 제 명찰을 확인하는 그녀. 정말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그니까 내 이름이...뭐였지? 으, 머리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아파. 숙취 해소제 없어?"
"그동안은 아이들만 와서 그런 건 준비되어 있지 않네만, 이게 도움이 될 걸세."
하얀 형체가 내민 것은 어떤 하얀 액체였고, 그녀가 벌컥벌컥 그걸 들이키고는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웩."
"다들 파프노 주스는 입에 맞다고 하던데, 특이하군. 그럼 조금 쉬고 있게. 여보, 이 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주시오. 스스로 나오기 전까지."
그녀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잠깐 생각에 잠긴다. 파프노...그건 분명 게임 드래곤빌리지에 나오는 음식 이름이었다. 빛 속성 드래곤 먹이. 그래서 빛속성이라곤 꼴랑 둘만 키우는 자기는 한 50개 정도 쌓아놓고 사는...
"...파프노?"
그녀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주위를 둘러본다. 노란 장판에 전기매트 하나, 옷장 하나, 좁아터진 욕실 겸 화장실 하나 덜렁 있는 자기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방은 고급스럽고...또 그녀에겐 너무 밝았다. 그녀는 숙취가 날아가버린 듯 방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검, 금속 숄더가드, 드빌 도감에 나오는 거랑 똑같은 알, 그리고...맛대가리는 더럽게 없지만 숙취해소엔 끝내주는 '파프노 주스'. 설마 내가 지금..."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인지했다. 자신이 드래곤빌리지 세계관의 세계, 유타칸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주변에 있는 건...고대신룡의 우상이었다.
"이거 좀 봐라? 역겨워 죽겠네. 나가야겠다."
나가야겠다며 그녀가 택한 길은 창문이었고, 그녀가 제 소지품이 든 가방과 함께 조심스레 5층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은 다행히 크게 집중되지 않았고, 그녀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는 빛의 영향이 미치지 않을 것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완전히, 제멋대로라는 표현이 맞는 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빈 소원이었기에.
그녀가 뒷골목을 돌고 돌아, 으슥하고 황량한 도시의 외곽으로 향했다. 아주 으슥해서, 어둠이나 혼돈, 그림자 속성 드래곤 외엔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곳으로. 그녀가 한 전단에 관심을 보였고, 그 전단을 뜯어간 뒤 방향을 바꾼다. 그녀가 뜯어간 것은 한 드래곤의 현상수배 포스터였다. '메사이어'. 다크닉스 소속의 드래곤을 보호한다는 죄몫을 가진 다크나이트였다.
.
.
.
"그니까, 여기 나온 메사이어를 찾는다..."
"저리 꺼져, 고대신룡 앞잡이야! 이거나 먹어랏!"
얼굴에 여러 종류의 드래곤이 앞발 또는 꼬리로 뿌리는 모래만 다섯번을 넘게 먹었을까, 이 꼬마 서펀트 드래곤이 뿌리는게 얼굴에 모래맞기만 여섯번째라고 생각한 그녀는 이내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사실 평소 상태이고 그녀가 '일말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녀가 굉장히...굉장히 좋아하는 속성인 어둠 속성에 속하는 드래곤에게 그녀가 폭력을 가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소원의 위력은 강력했고 그녀는 도망치는 서펀트 드래곤 해치의 꼬리를 잡아챈 뒤 손으로 들어 공중에 높이 띄웠다.
"으, 으앙! 내려줘! 이 고대신룡 앞잡이야! 날 그 놈들한테 갖다바칠 생각이지!"
"정정부터 하자. 첫번째, 난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고대신룡 별로 안 좋아했어. 둘째, 아직 앞잡이 아니고 할 생각 별로 없어. 그리고 세번째, 난 인신매매 취미는 엔간해선 없어. 한번만 더 메사이어 위치 물었을 때 대답 제대로 안 하면 날개 한짝씩 뽑아버려서 서펀트 드래곤이 아니라 그냥 서펀트로 만드는 수가 있어. 농담 아니고, 날개 뽑고 나면 네 방울이 그 다음일거고 그 다음은 니 머리통이야. 제대로 대답해야겠지요, 우리 어린이 친구?"
"히이익...!"
겁에 잔뜩 질린 채 제 손에 있는 서펀트 드래곤 해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자, 그나마 내가 어둠 속성 친구들을 되게 좋아해서 이 정도로 '권유'만 하는 줄 아세요. 네가 뭐 딴 거였으면 잡자마자 바로 사지 중 하나부터 뽑았어. 네 경우엔 아마 날개겠네. 자, 바른대로 불을래, 뱀이 될래?"
"아, 알았어! 살려줘, 살려줘!"
"착하기도 해라. 어느 쪽이니?"
"나...날 따라와. 네가 메사이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메사이어는 절대 안 쓰러지니까 꿈 깨시지!"
"알아. 걔 안 쓰러지는 거.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뭐? 네 이름이 뭔데?"
그러고보니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름이라..."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가 무언갈 떠올린 듯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까딱였다.
"마이네하스. 그래, 그게 내 이름이었어! 마이네하스!"
"마이네하스? 메사이어가 가끔 말하던 그게 너야?"
마이네하스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메사이어가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조금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자기가 제일 애정을 들인 용의 얼굴 보러 가는게 급선무였으니까.
서펀트 드래곤이 마이네하스를 안내한 곳은 오래 전에 폐쇄된 번화가였다. 일전에는 꽤나 번화했겠다 생각했지만, 지금 이 곳에 남은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어딘가에 쓰인 듯 찢어지고, 부서져있는 상태. 옛 번화의 잔해를 뒤로 하고, 그녀는 서펀트 드래곤이 이끄는 대로 큰 건물의 지하로 향했다 그 큰 건물은, 광고판이나 이것저것을 보았을 때 백화점이었을 거라고 그녀가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지하의 창고에서, 그녀는 익숙한 장신구를 찬 다크나이트를 보았다. 빨간 동전만 100개를 넘게 잡아잡순 묘안석, 별 생각 없이 얻고 보니 옵션 하나는 끝내주게 나온 유타칸의 바람, 그리고 당시 남은 골드를 탈탈 털어 마련한 작은 이그니스.
"무슨 일이니, 하네?"
"이 사람이 널 찾아. 고대신룡 짭새는 아닌데, 날 위협했어!"
"어린 용을 건드린 걸 보면...잠깐."
그는 제 앞의 인간 여인을 보더니, 아는 얼굴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테이머가 여길 어떻게? 보통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던데."
"야...부화시킨지 좀 오래 되긴 했지만 목소리 들으면 되게 늙은 것 같네. 아무튼, 뭐 받기 전에 창문으로 나왔거든. 아무튼, 실물로 보는건 처음이네, 메사이어."
"창문이라. 하하. 고대신룡이 지금쯤 널 찾는다고 눈에 불을 켰겠어. 첩보원감이라고."
"난 걔네 짭새 안 해. 난 고대신룡 싫거든."
"내 테이머라 그런가, 말이 좀 통하네."
제 테이머를 단박에 알아본 그의 웃음이 투구 너머로 보이는 듯 했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의 테이머와 몇가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의 나이가 40세가 넘었다는 것, 유타칸의 시간은 그녀가 살던 곳의 10배 속도로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어둠, 혼돈, 그림자 속성의 용들이 이 황량한 곳에 모여사는 이유.
"다크닉스는 고대신룡과 아모르에게 반기를 들었고, 대부분의 어둠 속성, 혼돈 속성 용들이 찬동했어.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둠의 수호자. 그가 가진 권능은 본디 고대신룡에게 필적하니까."
"그런데 그림자는 왜?
"그들은 징집되었고, 거부한 녀석들은 가차없이 죽였어. 나는...거기에 찬동하지 않는 용들, 징집을 피하고 싶은 용들을 최대한 모아, 이 곳으로 향했다. 같은 동굴 식구들과 함께."
"세라펠이랑 사타리엘도?"
"응.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온 건...여기다. 이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라는 거지. 이마저도 날 죽이고 그들을 해산시킬 계획이었지만...내가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는 얼마나 튼튼한지 네가 제일 잘 알잖나."
"내가 키우긴 했지. 장비 부가 옵션도 확실히 맞춰주고."
"옛 세대 중에서도 약체라고 무시하면서 덤벼드는 놈들이 픽픽 쓰러지는 걸 본 고대신룡이, 질색을 하면서 그들을 물리더군. 그 다음 여기서 살게 된 거고. 그러고도 성이 안 풀렸는지, 다크닉스의 수하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내 목에 수배를 걸어뒀긴 했지만..."
"내가 누굴 싫어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니까."
마이네하스의 미소가 비릿한 혈향을 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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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룡님! 고대신룡님!"
"무슨 일이지?"
고대신룡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서있었다. 꽤나 급하게 온 듯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차림새도 엉망이었지만 고대신룡은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 자네로군. 무슨 일인가?"
"일전에 데려오신...그 술 취한 자가 사라졌습니다. 창문을 통해 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이 인근에서 식당을 영업중인 주민이 창문을 통해 나오고 벽의 파이프를 통해 내려왔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어요."
"첩보원으로써 소질이 있군, 그 여자...아무튼, 수색을 개시하도록 하고, 이 사실을 자네 여동생을 통해 모두에게 알려주게나. 아, 그리고 고맙네..."
보고를 올린 청년은 제발 자기 이름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기만을 빌었으나, 아모르는 그의 절박한 기도를 듣지 않았다.
"...쌍문동마법사둘리 군!"
"...네. 그럼 전 잠시."
'쌍문동마법사둘리'라고 불린 청년이 고대신룡의 방을 나서자, 그 옆으로 한 소녀가 쪼르르 다가온다. 그러고는 그에게 마구 질타를 가하기 시작한다.
"대체 전에 그 딴 식으로 게임 닉네임 짓는건 누가 처음 생각해낸 거야? 덕분에 나도 오빠도 내 친구랑 오빠 친구 그리고 오빠 친구 동생까지 고생이잖아!"
"미안..."
"으휴, 진짜. 덕분에 이름 불릴 때 마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고. 그나마 나는 '뮤즈'라고 사람같이 불리기라도 하지. 오빤 '마법사'가 뭐냐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쌍문동마법사둘리', 애칭 '마법사'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에게 여자 하나를 찾으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하고선 도망치듯 가버렸다. '뮤즈'는 그를 향해 짜증을 그렇게 부려댔음에도 그 말이 고대신룡에게서 바로 나온 말임을 알고 있는 듯 그 말을 충실히 이행했고, 그녀가 명령을 전할 때 마다 들려오는 그녀의 본명은, 뮤즈의 기분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쌍문동뮤즈도우너 님!"
"내 이름 부르지 말고 당장 가서 일이나 해!"
"네, 넵!"
'쌍문동뮤즈도우너'는, 씩씩거리며 다시 제 갈길을 향했다. 본래 게임 닉네임인 거 같은 그거 말고 자기 이름만 기억났으면 저들이 부르는 이상한 호칭도 고쳐줄거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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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게 처음 온 사람인 척 하려고 했는데 들켰습니다. 망했어요.
사실 소게 말고 소뽐 시절이었으니 소게는 처음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