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렇듯 클라이드의 하루는 예배로써 시작되었지만, 대주교가 사라진 지금은 달랐다. 해방군이라는 정체불명의 세력과 타락한 신성력을 쓰는, 감옥을 다 뒤집어놓고 간 누군가, 그리고 이 곳의 치안까지 신경써야 하는 그로써는 예배같은 것은 안중에도 넣을 수 없었다. 메르헨의 목소리가 그가 잡무를 보다가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방을 울렸다.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사제님!"
"으아잇, 깜짝이야. 왜?"
"큰일 났어요! 이상한 생명체가...!"
"그게 뭐 어쨌는데?"
"몇 마리가 슬럼가를 지나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슬럼가쪽 피해는 있대?"
"아...아니요.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빈민한텐 손을 하나도 안대고 그 안에 들어갔던 귀족들의 하인만 해쳤다고 하더라구요. 가봐야 하지 않아요?"
그 말에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귀족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아질 것을 고려한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그가 침착하게 메이스와 성수를 가방 속에 챙겨넣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한, 신성력이 담긴 긴 장갑도. 그가 메르헨을 앞질러 문을 나섰고 메르헨이 레넬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크르르르..."
척 봐도 괴악한 생김새이긴 했지만 용을 닮아있긴 한 그 일곱 괴물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듯 사람들이 그 괴물들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 같은지 마구 도망쳤다. 혼란을 증폭시키는 그들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클라이드의 눈에 비쳤다.
"미치겠네..."
그가 괴물 중 하나를 먼저 공격했다. 신성력을 담은 메이스를 강하게 휘둘렀지만 끄떡도 않는 그 괴물들이 한마리가 공격받자 그를 공격한 클라이드에게로 향한다.
"크륵?"
"크르르르...크아아아!!!"
"뭐야, 괴물 주제에 동료애도 있어?"
클라이드가 뿌린 성수가 그들 중 하나를 덮었지만 그것 역시 그들이 입고있는 갑옷에 하얀 빛만 더할 뿐 쓸모라곤 없었다. 레넬이 보다못했는지 어쨌는지 그것들 앞에 기사 모형을 소환해 공격하게 했지만 부드러운 외피만 가볍게 베일 뿐 빛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릉...?"
"빛이 통하질 않아...?! 뭐야, 저것들!"
◇
"크노첸. 밥먹자. 옳지. 잘 먹는다. 먹고 마을에 나갈까?"
셀린의 첫 드래곤, 크노첸이 드블랑 다리를 먹는 동안 그녀가 외출 준비를 했다. 아버지 몰래 산 간편하고, 서민적인 옷을 입은 그녀가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빗질하고는 하나로 질끈 동여맨 그녀가 문을 살짝 열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파악한 그녀가 입에 고기를 아직 물고 있는 크노첸을 들고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완전히 나왔다. 경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다녀오십..."
"시끄러워!"
그녀의 품에 안겨서도 고기를 뜯어먹는데에 열중한 크노첸이 그녀를 보지 못하는 동안, 그녀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경비에게 소리쳤다. 자기가 나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죄...죄송합니다..."
경비의 처진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녀가 대문을 나섰다.
남은 성기사들도, 클라이드와 메르헨도 그들을 막을수만 있을 뿐 한마리도 해치우지는 못했던 찰나, 셀린과 크노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셀린에게 도망치라는 신호를 주었지만 괴물을 본 셀린은 겁에 질린 것인지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계속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괴물들은 그녀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도...
크노첸이 본능적으로 적의를 느꼈는지 나름 꼴값을 한답시고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릉거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러 마리의 괴물들이 3개의 붉은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괴물 하나가 울림이 잔뜩 끼어있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괴물의 괴성과는 소리가 주는 느낌부터 달랐다.
"선구자의 재목이여, 예언이여, 모든 것을 바꿀 이여. 너를 낙원에서 보기를 청하노라. 나 카데스가 이 흉물의 입을 빌어 말한다. 돌아오라. 너는 본디 네 오라비와 같은 나의 백성이다..."
카데스가 말한다는 내용. 거기에 분노한 성기사 하나가 괴물에게 달려들었지만, 괴물은 그 기사를 뿌리치고 셀린에게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녀는 그 손을 뿌리쳤고, 카데스가 깃들어 있는것으로 보이는 괴물이 놀라며 물러섰다.
"왜지? 왜 나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냐. 네 오라비를 잊었느냐? 괴로움에 빠져 자신을 놓은 자는 어쩔 셈이냐? 서둘러 돌아오라. 그러면 그들은 살 수 있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 둘의 생을 내가 보장할 수 없느니라."
그들이 셀린에게서 괴물의 시선을 떼어내기 위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지만 그들은 외상도, 반응도 없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크노첸이 괴물을 향해 불을 확 뿜어냈다.
"캬아아아-!!!"
"크르아아아!!!"
그들의 몸이 불에 타서 손상되는 것을 본 클라이드가 힌트를 얻었는지 성기사 하나에게 명령을 내린다.
"거기 너!"
"서...성기사단 4소대 소속 마엘..."
"관등성명은 집어치우고! 기름 최대한 많이 가져와! 잘- 타는 놈으로!"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성기사가 뛰어가는 동안, 메르헨은 셀린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걱정되기 때문일까.
"셀린! 셀린! 괜찮아?"
"난 괜찮아!"
메르헨의 발걸음은 괴물들에게 막혀버렸다. 괴물이 쳐내는 손에 의해 멀찍이 날아간 그가 기침을 콜록댔고 그것이 멈추자 이번엔 그를 쳐낸 괴물만이 입을 열었다.
"심판이 머지 않았다. 무지한 존재여,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동심이여. 썩은 뿌리는 버리고 내게로 오라.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용과 함께 내게 오라. 그리하면...캬아아!"
입을 열던 괴물이 왜인지 몰라도 갑작스레 하던 말을 멈추고 굉음을 질렀다. 광장은 이미 그들만의 싸움터로 변해있었다. 메르헨이 그녀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그 때, 특이한 갑주를 입은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괴물들과 성기사들의 시선을 끌었다. 테마리였다.
"여- 일은 개판 되어가나보지?"
괴물들이 그녀를 보자 입을 모두 똑같이 열었다.
"Khas Arashad..."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고, 너흰 물러나. 내가 알아서 상대할테니까."
그녀가 들고 있던, 보랏빛으로 빛나는 날을 지닌 특이한 검을 자신만만하게 휘두르며 그들을 도발했다.
"하, 표정이 왜들 그래? 겁이라도 잡수셨나? 응? 난 연약-한 아가씨랍니다- 다가와요...단 네 목숨줄은 보장 못하지만 말이지?"
성기사 하나가 달려들어 그녀를 대적하려 했지만 검술 실력에서부터 상대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입가에 여유만만한 미소를 띄며 몇 합을 주고받던 중, 한 마디가 침묵 사이를 흐르고 나자 성기사가 반으로 갈라졌다.
"시시해!"
그 모습에 경악한 자들은 더는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 앞에서 동료가 반으로 쪼개진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무예에 놀랐기 때문도 있으리라.
"한꺼번에 덤벼보라고. 이 따위 시시한 놈들 뿐이면 말이야. 몇이 덤비든 다 곱-게 썰어줄께."
"저게...!"
"워워. 진정들 해. 쓸데없이 휩쓸리지 말라고."
"하? 냉정한 녀석도 있...나 했더니, 그때 그 사제놈이잖아?"
"그래. 그 사제놈이 지금 여기 멀쩡히 살아있는게 꼬와?"
"말은 잘- 하네. 마음에 들었... 응?"
그러던 그녀가 셀린을 잡아놓고 아까 그 자리에서 조금 물러난 채 가만히 서 있는 괴물 무리를 보더니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들! 빨리 안 데려가고 거기서 뭘 멀뚱하니 서있는 거야? 물러나라고 정말 물러나만 있냐? X신같이! 제대로 안하면 다 국으로 끓여서 늙으신 분들 식사로 줘버리는 수가 있어! 빨리빨리 움직여!"
"그르륵...죄...송..."
"자꾸 나불대면 그 주둥이를 꼬매버리는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이브 뭐시기를 만든거야, 이렇게 명령을 못 알아들어 처먹으면!"
괴물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러고는 행가래라도 할 듯 팔을 쭉 뻗어서 높이 들어올려 셀린이 크노첸을 꼭 끌어안은 채 다리를 버둥거리며 당황한 목소리를 내게 만들자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어? 어어? 야! 내...내려놔!"
"꺄아! 꺄!"
"야!! 나 납치하고 있네 하고 동네방네 홍보할 일 있냐? 아이고, 이 돌대가리들아. 칼라이아한테 말 좀 해놔야겠네 이것들? 낮춰서 들어! 그리고 성채로 돌아가! 빨리 움직여! 다치진 않게 하고! 느려 터진 것들!"
그녀가 그들이 있었던 고대신룡 석상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것들 때문에 화도 났겠다, 그 무리에게 화나 풀 심산으로 검을 들었던 그녀가 순식간에 맥빠진 표정이 되었다.
"어럽쇼? 한 놈도 안 남았잖아? 재미없게..."
기름을 막 들고 오던 성기사, 마엘이 그 곳에 당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보지 못해 김도 빠지고 흥도 깨진 그녀가 그제야 기름을 들고 오던 마엘을 보자 한숨을 푹 쉬었다.
"야, 가라, 가. 김빠져서 상대도 하기 싫다. 에비, 에비!"
"...?"
"아, 가라고-오-! 말귀가 먹었나...꺼져! 꺼지라고! 아아아악!"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할 것이 있다."
"애들? 나도 몰라. 돌대가리들이랑 푸닥거리 하는 동안 없어졌어. 그러니까, 에비! 내가 살려줄 때 가라? 나중에 빌지 말고?"
"아니, 그게 아니고..."
"흐음?"
그가 질문 내용을 꺼내자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마치 그 질문이 콩트라도 되는 듯이.
"아하하하- 야, 너 디게 재밌는걸 물어본다? 마음에 들었어. 특별히..."
"대답이나 해!"
"아이고, 무서워라. 제가 특, 별, 히 대답 해드리죠. 네네."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다만 그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돌아선 그의 뒤에 테마리가 소리쳤다.
"성기사님이 그 주문은 알아서 뭐에 쓰려고 그러나? 응? 니 같잖은 생명이라도 연장해 보시려고? 아하하하하- 재밌네, 재밌어. 나중에 만나자고! 꺄하하하하하-"
◇
클라이드와 무리가 더럽게 늦는 그 성기사를 대신해 기름을 한 병씩 들고, 그들이 갔으리라고 예상되는 곳을 찾아 헤맸다. 한참을 조사하던 중에, 희망의 숲 방향에서 기묘한 짐승의 소리가 났다. 그들이 그 짐승 소리를 쫒아 희망의 숲으로 향하자, 그 괴물들이 그녀를 마치 보물상자라도 되는 양 소중히, 모두가 힘을 합쳐 들고 있는 모습을 찾아냈다.
"아하, 찾았다."
셀린은 저항할 수 없이, 양 팔과 다리를 모두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잡히고도 모자라 몸통까지 괴수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뭔가 셀린의 등에 취급주의 스티커라도 붙어있어서 저러는 듯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 중 하나가 일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캬아아아아-!"
"드...들켰어요, 사제님!"
"전원, 전투준비! 아모르님의 이름으로!"
메르헨을 제외한 모두가 무기에 기름을 붓자 메르헨이 성냥을 클라이드에게 넘겼다. 메르헨은 불을 아직 심하게 두려워하는지라 잘 숨어있다가 셀린을 빼내라고 당부한 그들이 괴물들을 상대할 준비를 마쳤다. 클라이드가 휘두른 메이스의 불길이 괴수의 팔을 핥고 지나가자, 그 자리가 새카맣게 타들어갔고 고통에 찬 괴성이 울릴 때, 클라이드가 팔의 탄 자리를 강하게 내리치자 빠지직 소리가 나며 괴물의 팔이 기이한 형태로 꺾였다. 한 놈이 그렇게 당하자, 이 동료의식 있는 괴수들이 전부 반응했고 결국 셀린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흔히 이야기하는 '공주님 안기'로 받들고 있는 한마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전투에 동참하게 되었다. 성기사들과 클라이드가 먼저 그들을 공격했고 그들도 만만하게 당하지는 않으려는 듯 나름대로 진형을 이뤄 상대했다.
계속 불에 태워서 상처를 입혔지만 그들은 어딘가가 부러지든 베이든 타든 별로 전투력에는 영향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가지, 그들도 지치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 그녀를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뭔가 말을 조잘대는 괴수. 클라이드가 잠시나마 가만히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울리는 목소리. 카데스였다.
"네 가족이 널 기다리고 있다. 대체 왜 낙원을 거부하는 것이냐. 내가 흉물의 탈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이냐? 아니면 아모르가 나를 증오하기 때문이냐? 전자라면 내 탈을 바꿔서 나타나주고, 후자라면 아모르를 직접 부수리라. 나는 실존하는 신, 카데스다...어허. 거기 어린 용아. 못하리라 비웃지 마라, 후일 크게 혼이 나리라..."
그 뒤, 보통의 상식과는 다르게 정면에서 기습했다. 당황한 괴수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그가 기름이 잘 타고 있는 메이스로 괴수의 무릎을 정확하게 후려치자 불이 무릎의 피부를 태웠고, 그 지점을 다시 후려치자 괴수의 무릎이 반대로 꺾이며, 단말마같은 비명과 함께 괴수가 땅 위로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셀린이 부드럽고 깨끗한 풀 위로 떨어졌다.
"메르헨!"
"예!"
괴수가 일어나지 못하는 동안 셀린을 데려온 그가 셀린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하도 신줏단지 모셔지듯 모셔져서인지 다친 곳도, 심지어 흙이 묻은 곳도 하나 없었다. 품에 안긴 크노첸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네. 괜찮구나."
"쟤네들, 절 신줏단지 모시듯이 들고 왔다니까요. 그것도 엄청 천천히."
셀린을 잘 숨긴 그가 나름대로 풀숲인 척 하고 잠복해 있던 레넬을 불러냈다. 레넬의 포효가 그들의 시선을 잠시 끈 동안 성기사들이 그들의 피부를 조금이나마 태웠고, 레넬이 불러낸 기사들의 검이 그 부분을 베자 내피까지 깔끔하게 절단되며 그들의 전투를 어렵게 만들었다. 괴수들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후퇴했고, 셀린을 지키는데 성공한 그들이 거의 동시에 주저앉았다.
"으아아아- 힘들어어-"
"저것들이 천천히 움직여서 다행이야. 빨리 움직였으면..."
말을 중간에서 끊은 클라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셀린을 잃어버렸겠죠..."
그들이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던 성기사 하나가 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성기사가 본 곳에는 눈을 가린, 긴 백발의 소녀가 있었다. 처음 보는 종류인 검은 용이 그녀와 함께였다. 용이 그르릉거리자 그녀가 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안돼, 사일. 우린 그냥 저것들을 가져오러 온 거야. 싸우려면 나부터 물어."
◆
항상 적막이 흐르는 이 곳의 배경은 아마 유타칸 사람에게는 익숙치 못할 풍경일 것이다. 불이 탁 켜지며 수술대 비슷한 것과 주위의 기계들을 비췄다. 불이 전부 들어오자 칼라이아가 자판들을 두드렸다. 자각자각 하는 소리가 하얀 벽에 부딪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며 울린다. 기계들이 윙윙 돌아가며 자신이 멀쩡함을 알린다. 백색의 수술대가 대리석 바닥과 잘 어울리며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위에 색이 있는 국물이라거나 하는 것이 떨어진 듯 붉은 흔적이 남아있다. 비어있는 그 위에 유리아가 다리와 오른손이 끈으로 묶인 채 앉혀있다.
"이거 놓지 못하겠어요?!"
과거의 미모가 아직 남아있는, 하지만 세월이 쓸고간 흔적이 있는 유리아가 악을 쓰는 모습이 애처로워보일 정도로 칼라이아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날 이렇게 잡아다가 뭐에 쓰려고 이러는 거죠?!"
"시끄러워! 나불대기는 하무트급이야. 파르신이랑 면담이나 해! 특별 면담 요청이 들어와서 입을 안막고 있는 거니까."
벽처럼 하얀 문이 열리며 파르신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한쪽 눈 외엔 드러나지 않은 모습. 유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심히 당황한 듯 보였다.
"당신이 왜 여기에...!"
"알 거 없어. 내 소식은 받아봤나? 유리아."
유리아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관심이 없었나 보군. 응?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됐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당신은 신경도 안썼겠지. 다 알고 있다고."
그가 냉담한 눈빛으로 묶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에 그녀가 움찔했다.
"난 이미 아모르를 포기했다. 아모르에게 선택받은 민족? 하. 집어치우라고 해라. 머리는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병들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데가 없이 상하고 멍들고 맞아터져도 그들은 제 죄를 깨닫지 못할것이다. 분명히."
"무...무슨 그런 저주스러운 말을...! 그렇다면 아모르님께 간구하면 되잖아요!"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도 그는 보지 않고, 빌고 또 빌어도 네가 모시는 그는 듣지 않았다. 손이 피투성이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지. 내 기도는...닿지 않았다."
유리아가 할 말을 잃기라도 한 듯 소리치던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책 속의 한 구절같은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나를 이리 만든 자들과 나를 외면한 모든 것들에 대한 댓가는 네 고통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와 네 주변, 그리고 아모르의 모든 것들을 지옥 속에 던져넣을 것이며, 심판받게 할 것이며, 끝으로 영원한 고통의 침상에 던져 밤낮없이 고통받게 할지니...그것은 태중의 아이와 산모, 심지어 노인이라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예외란 없어."
"그...그만 둬요!"
"내 기도는, 일방적인 것이 되어선 안된단 말이다. 네 신, 아모르는 내 기도를 단지 일방적인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게 만들었어. 네년도 그런 신에게 아직까지 기도를 하고 있나?"
그녀가 더는 보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그가 그녀의 고개를 억지로 자신을 향하게 돌려놓고 속삭였다.
"내게서 감히 눈을 돌리지 마라. 아직 가르침이 끝나지 않았다."
"그...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그녀가 묶이지 않은 왼손을 올려 그의 뺨을 올려붙였고 그가 충격에 빠진 듯 맞은 자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고 그가 거의 완전히 묶여있는 그녀를 잡아 바닥에 집어던졌다.
"무엄한 것. 어디라고 손을...!"
"야, 조심해! 카데스님께 바칠 소중한 친교제물이니까!"
그가 노기를 가라앉히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칼라이아가 유리아를 낑낑대며 들어올려 수술대 위에 도로 앉혀놓았고 줄을 풀었다. 그러자 탈출하려 드는 유리아를 파르신이 다시 땅에 메다꽂으며 제압했고 콜록거리며 힘을 못쓰는 그녀를 칼라이아가 금속 고리 같은 것을 채워 수술대 위에 묶었다.
"콜록...큭...이거 놓으란 말이에요! 대화로 해결할 수 없나요? 네?"
"미안한데, 나랑 파르신은 평화주의자가 못되는 사람이라. 거기다가, 예언도 있고. 그렇지, 파르신?"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풀어줘요! 더 높은 이와 대화하겠어요! 어서요!"
"야. 나도 최고 직위에 있는 사람이야. 카스의 검 칼라이아라고. 방패나 두루마리 정도면 니 말 듣겠네. 그 늙으신 분들은 싸움을 하시기엔 원체 늙으셔서 말이야."
기계들이 그녀를 관찰하는 양 주위를 맴돌았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그 기계들 중 하나에서 초록빛이 나와 그녀를 훑었고 곧 자판과 연결된 화면에 무엇인가를 띄워낸다. 그녀가 되돌아가 자각자각 하는 소리를 내며 자판을 두드리자 곧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거미 다리와 비슷한 구조의 다리 4개가 달린, 인간의 상체를 단 무언가. 그녀가 몇가지를 추가로 입력하자 기계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자, 의식을 시작해볼까!"
"사...살려줘요! 살려주세요! 뭐든지 다 할테니...제발!"
"흠, 그럼 너, 제물이 되어라. 이걸로 요구사항 끝!"
"꺄아아악!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칼라이아가 유리아의 발악을 흘긋 보고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서 파르신이나 쓸 법 한 말을 전해주었다.
"절망하라. 허락할테니. 그리고 살아있는, 그래서 감정을 느끼는 이 순간을 만끽하라. 그 쾌락은 오래 가지 않을것이니. 그 시련을 인내하고 감내하라! 또한 카데스 님을 경외하고 찬미하라! 그리한 뒤엔, 모든 영광의 주체이신 그 분의 천사가 되어 유타칸의 호국신과 싸워야하니라! 그것이 네게 주어진 소명이요 운명이며 배교자인 네년이 회개할 유일한 방법일지니, 그에 순응하고 실존하는 절대자이신 그 분을 섬겨라!"
천장의 밝은 빛이 시야에서 명멸하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보는 그녀의 귓가에, 파르신의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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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아모르력 19년 태양의 달° 6일
(태양의 달° : 신성왕국 유타칸의 달력으로 7월.)
날씨 맑음
오늘 성기사가 왔다가 엄마랑 얘기하고 갔다. 우리는 벽장에 꼭꼭 숨어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아빠가 벽장 문을 열더니 성기사들이 엄마를 데려갔다고 했다. 나랑 리키랑 카미는 펑펑 울었다. 성기사들이 밉다. 저번에는 카딘네 아빠도 데려갔다고 했다. 카딘네 아빠는 아직 안왔다. 왜 사람들을 잡아놓는 걸까? 그래도 오늘 아델 오빠가 과자 나눠준건 좋았다.
날짜 ㅇ(선이 마구 그어져 지워져 있다.) 카데스력 15년 안개의 달° 4일
(안개의 달° : 낙원의 달력으로 3월.)
날씨 바깥날씨 몰라요. 낙원은 항상 똑같애.
오늘은 살바도르 할아버지랑 그림을 그렸다. 살바도르 할아버지가 그린 다크닉스는 정말로 멋있었다. 우리도 용을 그렸다. 나는 블레이드 드래곤을, 리키는 쉐도우 드래곤을 그렸고 카미는 아무래도 저네르를 그린 것 같았다. 그리고 책도 읽었다. 언니랑 카딘네 아빠하고 놀기도 했다. 언니가 우리한테 사탕도 주고 과자도 줬다. 오늘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언니랑 더 놀았으면 좋겠다. 언니는 바쁜거 같다.'
살바도르가 알리시아의 일기장을 덮었다. 그러고 나서, 칼라이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칼라이아. 날세. 살바도르."
"아, 예예.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그는 알리시아의 소원을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거요? 당근 되죠!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럼 만나는 시간을 주 4회로 늘릴까요?"
"혹시 매일은 안되겠나? 여기서 같이 계속 있게 하면 더 좋고."
"아, 마침 마리아도 그걸 원하고 있는 참인데. 몇가지 테스트만 하고 그리로 보낼께요."
"무슨...?"
그가 의구심을 품었다. 그녀에게 할 테스트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혹 그녀가 늘 말하던 전투용으로 개조하는 것일까?
"아, 그 애 소원으로 자기 가족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줬는데, 그게 본인이랑 호환되는지 테스트 중입니다. 아직까진 잘 쓰고 있어요. 아마 내일 쯤 끝나서 모레 쯤 그리로 보낼 거 같네요."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완전히 병사가 되진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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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으로 온전한 절반을 얻을 것인가?
전쟁으로 파괴된 전부를 얻을 것인가?
- 아키에이지 초창기 포스터의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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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Chapter : 4. Under the Fallen wings
저도 할로윈 이벤트 할겁니다. 하고말고요.
아마 검은 혁명이나 사도외경의 외전 이야기 격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깨알 설정 : 낙원은 인공태양을 껐다 켰다 하는 수준으로 낮밤을 구분하고 애초에 지하이기 때문에 날씨가 따로 없습니다. 있다면 맑음이나 있을까요. 날씨 란에 '낙원은 항상 똑같애' 라고 쓰인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드빌 2의 종교와 신 설정을 살짝 비틀고 흔히 여러분이 아는 그X스 로X 신화(왜요 그 오르페우스 락스타된 그거요 그거)와 같은 식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카데스가 인간적일리 없다고 태클걸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