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전원 다 모였습니까? 그럼 이대로 회의를 시작…"
"아, 아뇨. 오그림 장군님께서 아직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데아는 고개를 들었다. 오그림? 그가 어째서? 다른 이는 몰라도 그의 지각은 꽤나 이례적이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소집된 인원 중에서도 항시 먼저 도착하던 그였고, 그렇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참석한 줄 여겼는데.
"여왕님, 본래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대로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실의 회의이니만큼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지 않는다면 권위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탁의 맨 가장자리에 앉은 젊은 붉은용 소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친한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양옆에 앉은 다른 군인들이 그를 두둔하는 눈치를 주었다. 이데아는 코로 옅은 연기를 뿜어냈다. 이래서 젊은 용들은 높은 곳에 앉혀놓지 않으라 주의를 주었던 것이였는데, 장로들이란.
"권위성 따위를 회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냐? 군사 회의이니만큼 오그림 장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그가 없다면 내가 지금부터 내는 지시는 누가 군대에 적용할 건가? 소위인 네가 할 테냐?"
곳곳에서 동의를 표하는 웅성거림이 새어나왔고, 용들이 동조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젊은 소위는 자신이 제법 영리하게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모양인지, 꼿꼿이 세운 허리를 숙이고 뒤로 움츠러들었다. 그를 격려하던 두 용들은 가운데에 앉은 이데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못 본 척 딴청을 피워댔다.
그때 조금 과격하다시피 할 정도로 격하게 문이 열어젖혀졌고, 눈이 아픈 빛이 들어와 어두운 회의장의 벽을 긁어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데아 여왕님."
그는 격식을 차린 말투를 사용했지만, 낮게 울리는 동굴 속 메아리와 같은 목소리는 커다란 곰을 연상시켰다. 빛을 등지고 선 거대한 용은 몸에 그림자가 져 더더욱 강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빛이 조금씩 닿은 그의 커다란 형체의 가장자리로 크고 오래된 상처들이 훤히 보였다. 그의 황금빛 눈이 번뜩이며 정체된 회의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무척 흐트러져 있었다. 최근에 그가 보인 이상한 행동들이나 태도와 연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저 때문에 회의가 지연된 것은 아니겠지요."
"지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시간이였을 뿐이다. 오그림, 일단 자리에 앉도록. 회의는 시작할 참이다."
오그림은 그 거대한 체구를 이끌고 원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을 힘겹게 지나와서, 여왕의 옆에 있는 그의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웬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자신의 지각을 어디 한번 지적해보라는 듯이 형형하게 회의장의 용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봅시다."
장군의 매서운 기세는 다른 용들을 불안감에 자리에서 꾸물거리게 했지만, 이데아는 개의치 않고 회의를 이어나갔다.
모든 용들이 그녀에게 집중하며 그녀의 지시를 새겨들었다 (자신이 여왕의 미움을 산 걸까 하며 쓸떼없는 고민을 하던 소심한 젊은 소위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의 명령은 언제나 그렇듯이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했다. 네 마리의 왕들 중 가장 결단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침내 회의가 끝을 향해 접어들자, 각 용은 회의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어서 밖으로 나가 이데아의 지시를 이행할 채비를. 모두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밖을 향했지만, 그 중 오그림만이 유난히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금방 떠날 것이다. 이데아는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기다려라, 오그림."
장군은 허둥대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한 시선으로 이데아를 마주보았다. 여왕은 지그시 그를 뜷어질 듯 바라볼 뿐이였다.
"예."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항상 말끝마다 붙이던 '여왕님' 이라는 호칭도 무심코 빼놓다니, 오늘은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확실히 그답지 않았다. 그걸 놓칠 세랴 하며, 이데아는 마치 죄수 앞에 선 고문관처럼 계속해서 그를 추궁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는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의심스러웠다.
"네가 거짓말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거짓말을 해도 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오그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보다는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가까웠다. 그는 장군이고, 그의 앞에 선 자는 왕이다. 장군이라는 직위에 거짓말은 어울리지도 않는 치장일 뿐인더러, 그와 여왕은 완벽한 상하관계에 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게 아니였다. 아니,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데 남을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아시다시피 딸이 하나 있습니다만." 오그림은 힘겹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납치를…당한 것 같습니다."
이데아는 눈을 한 차례 깜빡거렸다. "그래서, 딸이 납치당했는데 회의에 참석할 정신은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직책에 충실한 것은 죄스러운 일이 아니야. 특히 너와 같이 높은 자리에 앉은 자는 더더욱." 그녀는 황급히 변명의 준비를 하던 오그림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왕인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겠지."
"그리고 거짓말은—"
"우리의 자리가 허락하지 않는 치장이다."
오그림은 발톱으로 바닥에 남은 먼지를 긁어모으며 자기 자신의 주의를 돌렸다. 항상 이렇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녀는 몹시 교묘한 여왕이기도 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쪽으로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 데에 소질이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매끄럽게 주도권을 잡는 그녀의 재능은 어수선할 정도로 신묘하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인 것 같나?"
"새하얀 용이였습니다." 찬찬히 설명하는 오그림의 눈에는 보는 이마저 치가 떨리게 하는 분노가 비쳤다. "여태까지 그런 창백한 비늘을 가진 용을 본 적이 없습니다. 푸른용도, 황색용도, 검은용도 아닙니다. 그자는 내 눈앞에서 내 딸을 가로챈 뒤, 손쓸 새도 주지 않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하얀 용이라…확실히 그 어느 부족에서도 그런 용이 태어나진 않지. 기형일 가능성은 생각해 봤나?"
"용이 기형으로 태어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신체의 형태나 감각 등등이 변이되어 있을 수는 있되 비늘의 색이 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비늘은 그 용의 부족을 향한 존속을 상징하는 징표 그 자체니까요."
"추적은?"
"그게 가장 이상합니다. 시도는 해 봤지만, 그 용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공기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런 괴이한 것이 용이라는 것부터가 믿기지 않는다만…" 이데아가 수상쩍게 여기듯이 중얼거렸다.
"그것의 등에는 분명 날개 한 쌍이 달려 있었고, 날개는 '록티무의 유산' 의 일부입니다. 그의 유산은 오직 용족한테만 허락되어 있는 것. 하물며 새조차도 없는 세계인데, 다른 종족의 생명체가 날개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그림은 제 날개를 보란 듯이 이데아를 향해 펼쳤다. 록티무. 한때 이 원대한 세계를 지배했던 그 초월체는 우주의 모든 법칙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그가 심지어 소멸한 뒤에도 남아있는 그의 유산에 오차가 생길 리가 없다.
"꽤 차분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오그림."
"흥분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으니까요."
"너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일은 영영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데아 여왕님." 오그림이 열없이 투덜거렸다. 가끔 그녀가 이런 식으로 가벼운 지적을 던지는 것도 꽤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딸을 구할 마음은 굳건해 보여서 다행이야. 네가 관심 있어하는 건 시시한 영역 싸움과 국정뿐이지 제 가족에는 소홀했잖나?"
"면목 없습니다." 오그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옆눈질을 하며 답했다. 틀린 말이 아닌 수준을 넘어서 자기 자신도 잘 인지하고 있던 점이였기 때문이다.
"됐다. 당분간은 네 딸을 찾는 데에 이곳의 인원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다."
그녀의 말에 오그림이 흠짓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단, 군사력에 큰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굳이 많은 인력을 써서 너무 큰 주목을 받을 이유는 없지." 이데아는 회의장 반대편의 거대한 출구를 향한 채 날개를 폈다. 그녀의 날개는 붉은용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거대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비교적 작은 몸을 한참 상회하는 그 크기는 괴리감마저 들게 했다.
밝은 빛을 등진 그녀의 커다란 형체에 황갈빛의 그림자가 지워졌다.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번쩍이는 푸른빛 눈으로 오그림을 주시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에게서 도움을 구해도 좋다. 그땐 내가 그 흰 용을 직접 상대해주지."
-
춥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피부를 얼리는 그 차가움이였다. 그것은 단순한 감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흉기처럼 살기가 어려 있었다. 나를 집어삼켜 얼려 죽일 기세로 내 몸을 조이고 있으니.
그 다음으로 사방을 에워싼 공허한 어둠이 보였다. 지금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어둠만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매우 어두운 곳에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곳이 나에게 주는 공포심은 충분하다 못해 강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온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소리치고 있었지만, 몸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공허하리만치 새카만 검은색이였다.
나를 둘러싼 것의 감촉이 매끄럽고 따스했다. 무언가…그래, 용의 날개와 비슷하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에 맞선 채, 나는 그 편안함에 의지하며 버텼다. 적어도 무언가에 닿는 그런 느낌이 제법 위안이 되었다. 추위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전보다는 훨씬 더 낫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주위는 여전히 밝지 않았지만,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것처럼 어둑한 빛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무언가 매끈한 것이 닿았다. 커튼이 아닌, 매끈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이젠 확실했다. 이건 분명 용의 날개이다.
나는 손을 뻗어 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눈부신 빛이 몸을 강타한 것은 한순간이였다. 이곳의 빛은 겨울 하늘처럼 차디찬 푸른빛이다. 붉은용들의 땅에서 늘상 보았던 강렬한 태양빛과는 정반대여서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바깥의 풍경 역시 항상 보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붉은용들의 땅이 깎아지른 언덕과 온 곳에 즐비한 빽빽한 숲, 그리고 맑은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곳의 땅은 넓은 눈밭과 시리고 연한 푸른빛의 하늘이 전부였다. 그 단순하고도 광활한 경치에서 묘한 신비함이 느껴졌다. 나는 얼어붙은 종유석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이곳이 동굴 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으응…"
옆에서 들려오는 끙 앓는 소리가 나의 주의를 끌었다. 용이다. 나 자신부터가 용인데다, 내가 그의 날개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은 크게 놀랄 것이 아니였다. 그에 머리 위에는 뒤로 길게 뻗은 한 쌍의 뿔이 있었고, 왼쪽 뿔이 중간에 부러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의아함을 느낀 부분은 그의 비늘과 털이였다. 저 눈밭의 색과도 같은 순백의 비늘에, 용의 몸에서는 절대 날 수 없는 새하얀 갈기. 비록 내가 여태까지 본 부족은 같은 붉은용들밖에 없고 다른 부족에 대해서는 책으로 배운 게 다라지만, 책에서도 색이 하얗고 목에 털이 나는 부족에 대한 내용은 전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잘못되었을 리도 없다.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나에게 통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엄연한 귀족이다. 귀족에게 제대로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책을 던져줘놓고 읽으라고 했었다면 지금의 붉은용 귀족들은 전부 멍청이가 되어있고도 남았을 것이다.
흰 용의 눈커풀이 가볍게 흔들렸다. 얼핏 보인 그의 눈은 설원 위의 하늘처럼 옅은 푸른색이였다. 그는 피곤한 몸을 가누며 고개를 치켜든 채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그의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나를 눈치챘다.
"좋은 아침." 그는 나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태연하게, 마치 항상 내게 그렇게 말해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네, 좋은 아침." 나 역시 그런 그의 페이스에 저도 모르게 휘말려 얼떨결에 대답했다.
"배고프진 않니? 어젯밤 내내 기절해 있어서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많이 걱정했단다."
인간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건 뭐일려나 하며 그가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저기, 전 용이에요. 인간이 아니라."
"앗, 용이였어? 인간의 모습이길래 당연히 인간인
줄 알았는데…하긴, 인간이였으면 날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겠구나."
"용인 당신이 인간을 도와주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 아닐까요…"
내 의문을 듣고 그가 싱긋 웃었다. "누구든 딱히 상관없어. 애초에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까 종족에 상관없이 모두 반갑게 느껴지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져나왔다. 그는 잠시 멍하니 바깥의 눈 내린 설원을 바라보다가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억지로 태도를 바꾼 것 같다는 느낌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물고기 같은 거 좋아해? 혹시 연어 먹어봤니?"
"못 먹어봤긴 한데—"
"잠깐만 기다리렴. 금방 잡아올께!"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그는 의욕 넘치는 대답과 함께 동굴 밖으로 쌩 달려나갔다. 너무 순식간이여서 반응할 틈도 없었다. 나는 잠시 가만히 그곳에 앉아서 그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사실 이름보다도 궁금한 점들은 훨씬 많았다. 그의 비늘 색과 몸에 난 털이 어찌 된 일인지도 궁금했고, 애초에 그가 누구인지부터가 의문이였다. 무엇보다 붉은용의 땅에는 풀만 있을 뿐, 이런 설원지대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붉은용인 내가 어째서 이런 외딴 눈밭 한가운데에 있는 건지 나로써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오직 나를 구해준 그만이 조금이나마 알 만한 일이다. 어차피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 혼자서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굴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슬슬 질리기 시작하자, 나는 이 일대를 조금 수색해 보기로 결심했다.
흰 용은 기다리라고 했지만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우선 동굴을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붉은용들도 동굴을 둥지 삼아 사용하고 있다 보니 동굴이라는 공간 자체는 익숙했지만, 이곳의 동굴 내부는 여타 동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종유석들과 벽면 곳곳이 신기하게도 얼어붙어 있었고, 얼음이 서린 동굴은 희미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밤하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였다.
동굴 뒷쪽으로 난 통로가 눈에 띄었다.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평범한 통로였다. 입구는 그 흰 용같이 호리호리한 체형의 용은 들어가고도 충분할 만큼 넓어서, 그보다 작은 인간 소녀의 형상을 한 나는 당연히 출입에 문제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벽면을 한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앞에 드리운 새카만 어둠 속으로 진입했다. 어쩐지 남의 집에 침입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 꺼려졌지만 어차피 큰 해가 오진 않을 터이다.
통로 끝은 다른 쪽 끝의 동굴 입구에 비해선 조금 작은 방으로 이어졌다. 아마 흰 용의 것일 듯한 그 방은 단조로웠다. 덤불이 침대와 같은 모양새로 바닥에 깔려 있었고, 최근에 갈았었던 것처럼 아직 풀이 신선했다. 가까이 다가가 덤불을 꾹 눌러보자 푹신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용은 맨바닥에서 잠을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 흰 용은 몸 어딘가가 불편한 걸까?
그도 그럴 게, 깨끗한 눈 냄새가 났던 바깥 쪽 동굴과는 다르게 이 방에서는 질병의 냄새가 진동했다. 용들은 후각이 매우 예민해서 물리적으로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넘은 것마저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황색용들의 초대왕이였던 '쿨 이스라쉬' 는 냄새만으로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지니 두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방에 밴 역한 냄새는 아직 어린 내가 보아도 매우 진하고 선명했다. 겉으로 보아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대놓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심한 병을 앓고 있을 줄이야.
그렇게 생각해보니 단순한 방인 줄 알았던 이 공간이 한순간 병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를 연상시키는 덤불부터가 그 흔적이였고, 그 주위로 쌓여 있는 처음 보는 종류의 각종 풀과 식물은 약초로 쓰일 듯해 보였다. 먹을 수도 없는 풀을 아무 이유 없이 갖다 두었을 리가 없다.
"…얘야?"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자 흰 용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아직도 약하게 펄떡거리고 있는 연어 두 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아차 하며 만지직거리고 있던 풀에서 급히 손을 뗐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아, 그냥…그냥 좀 볼려고—"
그렇게 변명하기도 전에 그가 빠르게 다가와 내 옷의 후드를 덥썩 물어 들어올렸다. 순간 놀라서 버둥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유유하게 나를 제 등에 얹힌 뒤 연어를 입에 물고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딱히 중요한 방은 아니야. 하지만 다음부터는 내가 밖에 없을 땐 들어가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의 발음은 연어를 물고 있어서인지 조금 뭉개져 있었다. 나는 그의 목 위에 앉아 그의 머리 위를 내려다보았다.
"왜 들어가면 안 되는 건데요? 어차피 아무것도 없어 보였는데…"
"들어가서 좋을 것도 없거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대화가 멈추자 통로 안을 채우는 소리는 터벅터벅 울리는 흰 용의 발소리만 남았다.
어느새 우리들은 바깥의 큰 굴로 나와 있었다. 흰 용은 연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미리 손을 써 둔 것인지 그가 선 굴 한가운데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가 연어를 모닥불 위로 든 채 그것들이 적당히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에요?"
"…메르디스." 흰 용은 수상하게도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타닥거리며 피어오르는 불에 집중되어 있었다. "네 이름은?"
"전 루사에요. 루그메레사를 줄여서."
"꽤 복잡한 이름을 갖고 있네."
"그야 귀족이니까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귀족 용들은 보통 이름이 엄청 길거나 특이해요."
메르디스는 불에서 시선을 떼고 휘둥그레한 눈으로 나를 뜷어져라 쳐다보았다. "귀족? 귀족이 왜 이런 곳에 있어?"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음, 사실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저는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건가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일전에 잠시 근처로 산책을 나갔었는데 네가 눈 속에 파뭍혀 있는 게 보여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 뿐이야."
"그렇군요…"
결국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놓은 용에 대해서는 단서가 없는 모양이다. 메르디스 그는 어디까지나 이곳에 떨어진 나를 발견하고 구해준 입장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대화가 정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는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사이라 무슨 소재로 대화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루사는 귀족이라고 했었지?"
"네? 아, 네." 나는 흠칫 놀라며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어를 굽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올 줄은…
"어느 부족 출신이야? 인간형만으로는 알아보기가 조금 어렵네."
"붉은용이요. 아버지가 붉은용들의 장군이세요."
이번으로 몇 번째 받는 질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용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둘 다 출신 부족을 분별하기 어려운 편이다. 용일 때는 비늘이, 인간일 때는 머리카락이 적갈색이고, 눈은 황색용들 사이에서 흔한 초록색이다 보니 아무래도 붉은용과 황색용 사이에서 헷갈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보여줄 반응은 내가 만났었던 다른 용들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독보적인 강함 덕분에 다른 부족의 용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아마 세상에서 그를 모르는 용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메르디스는 똑바로 말했다.
"네 아버지가 누군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용들이 많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들 모두가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야…오그림이요. 이데아님 직속의 현 장군."
"아, 나 이데아는 누군지 알고 있어! 지금 붉은용들의 여왕 맞지?"
메르디스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마치 대단한 걸 알고 있다는 양 득이양양하게 떠들었다. 그보다 아무리 부족이 다르다 해도 한 부족의 여왕인데, 저런 식으로 존칭을 떼고 부른다는 점에서도 여러모로 그의 비범함이 돋보였다.
"여왕님이 누군지는 아시고 아버지는 모르신다니 대체…"
"아하하, 미안. 이런 외딴 곳에서 살다 보면 아무래도 세상 물정에 어두워지기 쉬워서…" 메르디스는 열없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그럼 여왕님이 누구신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바툴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자주 찾아와서 소식을 전해다줘. 루사도 여기 머무를 동안에 자주 보게 될 텐데 누군지 좀 설명해줄까?"
"네, 좋아요."
이런 허허벌판을 찾아오는 자가 있다는 건 조금 예외였다. 하긴 저렇게나 태연한 용이라 해도 말동무가 없다면 외로움에 미치고도 남았겠지. 들어서 나쁠 것도 없는데다, 연어가 익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으니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착한 아이란다. 날 챙겨준 지도 벌써 엄청나게 오래됐는데, 질려하지도 않고 시간이 되면 곧잘 와주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특히 수염이 엄청 멋있어. 턱에 꼬불꼬불한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게 정말 수염처럼 보이는데, 매번 자르라고 말해주는데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나는 착하고 꼬불꼬불한 수염을 고집하는 아이를 머릿속에 그려보려 노력했지만, 그런 요상한 모습의 용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수염이 난 아이라니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예전만 해도 좀 성급한 면이 있었어서 내가 도와줘야 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신중해졌어. 요즘은 내가 그 아이한테 돌봐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점차 말꼬리를 흐렸다. 모닥불이 비친 그의 얼굴에서 오묘한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그 바툴이라는 용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그닥 맞장구를 쳐 주고 있지 않은데도 혼자 들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이렇게까지 신이 나 있는 그를 보아하니 그는 그 용을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이였다. 아니면 단순히 대화에 목말라 있거나. 사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가 열띠게 설명하는 것을 듣다 보다 어느새 연어가 전부 구워져 있었다.
메르디스는 그중 더 큰 것을 집어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들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연어는 다른 고기와는 매우 달라 보여서 은근히 내키지 않았지만, 메르디스의 성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엄청 배고프기도 하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을 꾹 감고 연어를 한 입 베어물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이 절로 떠졌고, 나는 메르디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맛있는데요, 이거?"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내 몫도 줄까?" 그가 재빨리 나머지 한 마리를 들어올리는 동시에 내게 권했다.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메르디스도 드셔야죠."
내 호평을 들은 그가 굉장히 기뻐 보여서 멋쩍은 기분이 든 나는 발치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익숙하지 않다. 얼어붙은 동굴도, 넓게 펼쳐진 설원도, 메르디스 그 자신도. 그와 같은 어른은 처음이였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저렇게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태도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어른들과 것과 너무도 다르다.
무언가 따스한 느낌이 속에서 피어올랐다. 단순히 모닥불 덕분인 것만은 아니였다. 옅은 햇빛과 얼음으로 뒤덮힌 곳의 반짝거림 외에는 빛 한 점 없는 동굴이였지만 왠지 아늑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불의 온기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눈밭 한가운데에서 느낀 서로의 존재 덕분이였을까.
잔잔하게 흐르는 정적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그것을 깨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였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지. 너는 너고. 왜 묻는 거야?"
들려온 그의 대답은 아이들에게나 들려주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성에 차지 않았다.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해요. 비늘도 하얗고요. 당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잊혀진 자라고 하면 납득하겠니?"
"잊혀진 자요…?"
"그래." 메르디스는 머리를 앞발 위로 떨구며 픽 숨을 내뱉었다. "소외된 것과는 달라. 도태된 것도 아니지. 그저 다른 모든 잊혀진 것들과 함께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그러면서 딱히 큰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거든."
"이유가 없으면 왜 잊혀지는 거에요?"
"언젠가는 잊혀져야 하니까. 빠르든 늦든."
일리는 있지만 그가 왜 잊혀지고 있다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그가 누구인지와 정확히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기보단 아예 모르겠다.
"나는 너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는 부탁할 이가 너밖에 없구나."
"부탁이라니 무슨—"
"네가 이곳에서 잊혀진 것들을 찾아내주면 좋겠어. 찾아내서 영원하게 만들어 줘."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순전한 부탁인 듯 보인다. 그의 얼굴은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땅에 길게 드리운 그 자신의 그림자만큼 어두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방금 전의 따스한 온도에 조금 무게감이 더해진 공기가 불편했다.
"…괜찮아, 어쩌면 언젠가는…"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불안하게 자리에서 뒤척였다. 그는 이곳보다도 멀리 있는 것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멍하니 모닥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해해 주겠지."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멀고도 희미했다.
결국 그날 오전은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도저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급자족용으로 쓰는거라서 연재될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2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mode=read&b_no=21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