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mode=read&b_no=2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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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메르디스는 옆에 없었다.
눈이 뻐근하고 시야가 흐릿했다. 피로한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눈을 비비자 주위가 조금이나마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밤중에 옆을 지키고 있던 그의 온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고, 순간 불안해진 나는 동굴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 끝에 있는 방에조차 그는 없는 것 같았다. 통로의 입구에 서서 그를 수차례 불렀지만, 들려오는 것은 나에게로 다시 메아리쳐오는 그의 이름뿐이였다.
눈을 꾹 감고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가 없는 이 동굴은 매우 낯선 공간이였다. 나는 무력하게 동굴 입구에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는 적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설은 아니였지만 내리는 눈 하나하나가 굵고 탐스러웠다. 책에서 이런 눈을 함박눈이라고 하던가.
붉은용들의 땅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지 모를 이곳에 있자니 그런 배움들이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곧 집에 돌아가야 하겠지만, 아직은 이곳에서 배운 것들을 직접 보는 것도 나름 즐겁다. 조금만 더 오래 이곳에 남아서 나쁠 건 없다. 남기로 결정한다 해도 어차피 지금쯤 아버지가 날 찾고 계시겠지.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해보며 천천히 떨어지는 눈을 눈으로 쫒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때였다. 그 사이에서 흐릿한 형체를 발견한 것은.
처음에는 눈 사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형체는 이쪽을 향해 걸어올수록 점점 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메르디스일 것으로 의심해보았지만 그렇다기엔 체구가 너무 크고 우람해서 가늘고 날씬한 그의 몸과 일치하지 않았다. 빛깔이 바랜 눈안개에 가려진 채 푸른빛 안광만이 번뜩이는 그것의 모습이 조금 섬뜩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형체를 주시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그것이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둔해 보이는 체형에 비하면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말이다. 나는 섬짓 놀라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꺼운 눈의 장막 사이에서 용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다음으로는 벌어진 어깨와 뒤로 뻗은 날개가 빛을 받았다. 거대한 용은 날개를 활짝 편 채 앞에 서서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뭐냐?"
그리 묻는 그의 목소리는 근엄하면서도 짐승의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루사—"
"이름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그는 가증스럽다는 양 짧지만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타음이 사번충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이곳에는 뭘 하러 온 거지?"
"자의로 온 게 아니에요! 눈을 뜨고 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고요.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는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한걸요…"
그는 진위를 확인하듯 긴 목을 숙이고 내 표정을 살피더니, 고민하고 있는 건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거대한 용은 마침내 한숨을 쉬며 내게 차차 설명했다.
"그런가. 멋대로 의심한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갈 곳이 없다면 유감이지만, 이곳에 머물게 해줄 순 없어. 이 동굴은 이미 주인이 있는—"
그는 갑자기 무언가 퍼뜩 깨달은 건지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불안정해졌고, 푸른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용은 다급하게 나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서 동굴 곳곳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끝끝내 통로 안까지 뒤져보고 나서야 입구에 멈춰서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천천히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 속에서 푸른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싶었더니…지겨운 것들."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오랜 한이 서린 증오가 묻어나왔다.
"그분께 무슨 짓을…!"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가 혼란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하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메르디스의 날개가 슬그머니 내 몸을 보호하듯 감쌌다.
"화내지 마, 바툴. 애가 겁먹었잖아."
…바툴?
"…뭡니까? 저 애년과 아는 사이라도 되십니까?"
"응,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그보다 분명 혼자 밖에 나가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그렇게 제멋대로 구시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두 용이 언쟁을 벌이는 동안 나는 메르디스의 날개 뒤에서 그 커다란 용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비늘은 메르디스의 하얀 비늘과 닮은 연푸른빛이였고, 메르디스와는 오랫동안 봐온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그의 턱에는 마치 수염과 같은 형태로 꼬불꼬불한 털이 나 있었다.
그럼 이 짐승같은 용이 그렇게나 착하다던 바툴이 맞는 건가…
"잠깐 바깥 공기 좀 쐬러 나간 것 뿐이야. 이래 봬도 나 나름 강했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몸에 무리가 가겠어?"
"강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적어도, 적어도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는—"
"내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일은 없을 거야, 바툴. 몇백 년 동안 그래왔잖아."
이에 그는 숙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숨죽여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르디스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꿋꿋히 밑을 향했던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어제는 따듯했고 방금까지 무거웠던 공기는 이내 알 수 없는 침통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애는." 바툴은 천천히 화제를 돌렸다. "그 애는 누군데 이곳에 데려오셨습니까?"
내 옆구리에 맞닿아 있는 메르디스의 몸이 흠짓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날개를 더욱 안쪽으로 접으며 나를 가려주었다.
"그냥 애야. 아무 잘못 없어. 조만간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 거야."
"누구 멋대로 돌려보내요?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제대로 비행하지도 못하는 상태이십니다. 저 애가 사는 곳이 어딘지 알고…"
"붉은용들의 땅이래. 여기서 그렇게까지 멀진 않아."
메르디스의 날개가 눈앞을 가리고 있어서 바툴의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격해진 그의 목소리로 보아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진 않았다.
"인간인 줄 알았더니 다른 부족의 용이였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돌려보내선 안 되죠."
"……."
"우리들의 존재는 더 이상 알려져선 안 됩니다. 그동안 잘 지내왔잖습니까? 당신의 역할은 이미 끝나고도 남았어요. 우린 그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대로 잊혀질 거야?" 메르디스가 돌연 물었다."
"예?"
"이 아이가 우리를 기억해 줄 수 있잖아." 그의 몸이 조금 들썩였다. "모두에게서 잊혀진 채 이곳에서 영생을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런 건 영원한 게 아냐, 바툴. 그런 건…"
"그런 건?" 바툴이 도전하듯 되물었다.
"그런 건…죽느니만 못한 거야. 그러니까—그러니까 이 아이를 바깥으로 보내자."
메르디스의 목소리는 필사적으로 사정하는 것처럼 애처로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동요했는지 완고했던 바툴마저도 조금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전 당신의 안전만을 중시합니다. 이곳의 존재가 알려지면 우리들이 신변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만약 이미 알려졌다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아이는 이 땅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어. 자신이 직접 걸어온 것도 아니니까 누군가가 가져다놓았다는 것밖엔 설명이 안 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다른 부족들한테 이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위험한 황무지로 알려져 있지."
"그게 무슨."
"이런데도 마냥 바깥 상황을 무시할 수 있겠어? 누군가 아직 우릴 기억하고 있는 거야. 분명 달갑지만은 않을 누군가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심각해진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메르디스의 날갯죽지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만 내보내달라는 신호였다.
그가 머뭇거리며 날개를 치우자 심란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바툴이 보였다.
긴 정적이 흘렀다.
"그만 돌아가줘." 메르디스는 그를 향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조만간 다시 만나서 어떻게 할지 상의해보자."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제가 어찌 당신을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바툴이 얼굴을 구기며 내뱉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잠자코 서 있던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저 년을 배려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도 붉은용 따위를 하루종일 마주치고 싶진 않으니."
"그럼 통로 안쪽에 있을래? 거기에는 가지 말라고 내가 말해뒀거든."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통로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움찔하며 메르디스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혹시라도 저것이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면—"
"그럴 일 없다니까." 메르디스는 차분히 대답하며 고소를 지을 뿐이였다.
그는 망설이며 통로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나와 메르디스는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입구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원래는 상냥한 앤데, 낮선 용들한테는 유독 경계가 심해서…"
메르디스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툴이 사라진 곳에서 떼어지지 않은 채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의 굳은 긴장감이 아직도 그의 눈빛 속에 남아있다.
"저 용이 바툴 맞아요?"
"응, 맞아."
"당신이 설명해준 바툴이랑 방금 저 용이랑 닮은 점은 수염밖에 없잖아요." 내가 딱딱하게 지적했다.
"그, 그래도 나름 착하니까 문제 없을 거야! 너랑 마주치지 않겠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내가 회의적으로 그를 곁눈질하자 그는 서툴게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든 바툴을 옹호하는 데에 급급했다.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가진 바툴에 대한 인식이 좋아질 것 같진 않다.
"무슨 얘기였어요?"
"응?"
"방금 바툴이랑 하던 얘기. 무슨 얘기였어요?"
메르디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만 일어나려던 찰나, 나지막히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섰다.
"난 이곳에 숨어살고 있거든."
흥미가 생긴 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건 어째서죠?"
"이유가 꽤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힘 때문이야. 비록 지금은 온전히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지만, 내 안에 내재된 힘은 무척 강해. 으음…신체적인 힘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힘이라 같은 반열에서 비교하기 어려울진 몰라도, 아마 루사의 아버지라는 용보다도 강할 거야."
또 그 느낌이다. 그가 아득히 먼 곳을 보고, 그곳의 소리들만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음이 조금 들썩이며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약해졌다는 것은 어쩌면 통로 끝의 방에서 느껴지는 질병의 기운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메르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지금 난 분명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걸 제대로 쓰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 그래서 내가 약해진 틈을 타 내 힘을 노리고 있을 자들로부터 숨고 있는 거지.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너를 이곳에 데려온 거고." 그는 멍하니 앞만을 보던 상태에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됐니?"
"…저기, 혹시라도 저 역시 당신을 노리는 거라고 의심하고 계시다면 부디 하지 말아주세요. 전 이 설원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고, 당신이 누군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메르디스는 싱긋 웃었다. "넌 의심하지 않아. 단지 널 이곳에 끌고 온 용이 무슨 목적으로 너와 내가 만나게 한 건지, 그게 걱정될 뿐이야."
그의 안색은 명멸하는 불꽃처럼 잠깐 어두워진 뒤 다시 밝아졌다. 저번에도 그랬었고, 항상 그러기를 반복한다. 그는 자신의 고충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거짓말에 능하지 않다.
"루사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니? 널 이곳으로 데려온 용이 누구인지라던가."
"전혀요." 조금 실망한 듯한 그의 눈빛을 보고 나는 작게 덧붙였다. "…죄송해요."
그러자 메르디스는 크게 흔들리더니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냐, 네가 미안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모르는 건 모르는 거지!" 그는 입술을 몇 번 옴싹이다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근데 나한테 왜 미안한 거야? 역시 내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거지…?"
이번엔 내가 그의 말을 부정할 차례였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침울하게 발치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거짓말으로라도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도 안 불편해요. 오히려 이곳에 있는 게 훨씬 더 편할 정도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가능한 한 최대한 설득력 있게 그에게 일러주려 노력했다.
메르디스는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정말이야?"
"그럼요! 고향에는 제 얘기를 들어주는 용이라고는 한 마리도 없어요. 그리고 아침 식사로 연어를 잡아주는 용도요. 아니, 생각해 보니 거긴 연어가 안 사니까 당연한 거지만…"
입 밖으로 낼 일이 없었던 것일 뿐 전부 사실이였다. 하루만에 그에 대해 결정한 것이 성급할진 몰라도, 그만큼 메르디스는 하루만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진실된 선의를 지니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그런 선의가.
그는 기뻐 보였다. 아니, 기쁘다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 갑자기 없던 적극성마저 생긴 건지, 그가 다정하게 어깨 위로 코를 디밀자 조금 당황했지만 그 긴장감은 금방 풀어졌다.
"저녁이 되면 바툴 몰래 해넘이를 보러 가자." 그가 여전히 코를 내 어깨 위에 얹은 채로 제안했다.
"해가 다 지면요?"
"해가 지면 별을 보러 가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의 극광을 따라 흐르는 별들을 구경하는 거야."
"그럼 별이 지면?"
"해돋이를 기다리면 되지."
그는 벌써부터 밖으로 나갈 생각에 발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메르디스의 일정은 대책없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실천이 가능했다. 저녁에는 일몰을, 밤에는 별을, 새벽에는 해돋이를. 그렇게나 들떠 보이는 그에게는 무리도 아닐 것 같았다. 몰론 겨우 그런 걸 보겠답시고 꼬박 하루를 지새우는 용은 메르디스 그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것' 이라 보기에는 꽤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해돋이나 일몰 정도는 고향에서도 볼 수 있긴 하지만, 뻥 뜷린 이곳의 하늘을 통해 보는 별들은 제법 멋질 것처럼 들렸다. 극광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극광이 뭐에요? 책에서도 읽은 적 없는데." 나는 살짝 들추듯 물어보았다.
메르디스는 슬며시 웃었다. "당연히 모르겠지. 잊혀진 것들 중 하나니까."
"그럼 언젠간 보러 가요. 별이랑 해돋이랑 전부 다."
"오늘은 안 될까?"
"아뇨, 도저히 동이 틀 때까지 깨어있을 자신이 없네요."
"괜찮아, 의외로 견딜만해. 이곳은 설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데, 거기로 가서 산등성이를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가장 넓은 안부에 앉으면 돼. 거긴 지평선이 잘 보이는데다 동쪽과 서쪽 양쪽이 뻥 뜷려 있어서 해를 보기 좋아."
그의 설명은 예상 외로 매우 상세했다. 마치 예전에 직접 해봤었던 것처럼 말이다.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진짜 해보셨던 거에요?"
"응. 지금은 바툴이 날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보니 마지막으로 해본 지 꽤 오래됐어."
"우와…" 나는 반은 황당함으로, 반은 왠지 모를 존경심으로 가득 찬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그런 곳에 앉아 있었다고요? 그게 그 정도로 흥미로운가요?"
"흥미롭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한정해서."
"그래도 그렇지, 지루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바툴도 데려가 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더라."
그는 목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눈동자만 굴려서 지그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을 따라 자란 하얀 갈기가 바닥 위로 부주의하게 흐트러졌다.
"언젠가 다른 용을 같이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그게 바툴이 아닌 네가 될 줄은 몰랐네."
메르디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고양이처럼 다리를 앞으로 빼고 쭉 기지개를 폈다. 밖에서부터 비쳐오는 시린 빛 때문에 그의 눈빛만이 잘 보인다. 밤하늘을 자주 보다보니 그 빛을 흡수하기라도 한 건지, 겨울 하늘의 색이였던 그의 눈이 별과 같이 은은하게 빛났다.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렴." 그가 말했다. "내가 네게 지울 책임은 나의 기억이면 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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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네 마리의 왕들이 존재한다.
많아서도, 적어서도 안 된다. 네 마리는 충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숫자이다. 그보다 많았을 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적어진 적은 없다. 설령 그 마릿수가 더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해도, 현세를 살아가는 지금의 용들에게 과거의 왕 따위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에겐 지금의 왕들이 곧 세상의 천장이다. 지금은 천장 위를 기억하는 용이 없고, 있다 해도 지금쯤 잊혀져가고 있을 참이다.
어차피 아무도 천장 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왕들이 받치고 있는 천장 밑의 일시적인 평화에 안주할 뿐이다.
지금 성전을 찾고 있는 붉은 용이 만날 자도 그런 부류이다.
그렇다. 그녀가 찾아갈 곳은 성전이다. 그리고 사막의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어떻게 성전이 있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이 땅이 비늘이 노란 족속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바닷속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것처럼, 그들에겐 이 사막이 곧 터전이다. 자신들이 사는 곳에 성전을 지은 것. 그뿐이다.
특이하게도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자는 왕이면서도 천장을 받치기를 거부하고 있다. 위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거겠지. 아마 지금 부족들을 묶고 있는 평화협정의 실태를 알게 된다면 그 순진한 계휙도 곧 버릴 것이다.
그녀도 처음엔 순진했었다. 처음엔. 그 처음으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위임 직후 네 왕들끼리 모였었던 회의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그 바로 다음 회의에서 그의 계휙에 대해서 그에게로부터 들었었다. 그는 평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아주 먼 과거, 용들이 부족별로 나뉘게 된 직후에나 존재했었던 그런 평화를. 천장 밑의 다른 용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일시적인 평화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평화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점이였다. 그것도 영원한 평화를 말이다.
그녀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그의 계휙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에게 꿈을 버리라고,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에게 협조해줄 것이냐고 물어오던 그 어리석고도 순수한 영혼을 져버릴 수 없었다. 그를 내칠 수 없었다. 피곤한 천성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왕과의 토론을 위해 바쁜 일정을 마다하고 직접 황색용들의 땅 한가운데로 온 것이다.
앞으로 걷고 또 걸어도 계속해서 얼굴을 직격하는 거친 모래바람이 슬슬 경멸스러워지던 참에, 휘몰아치는 모래알갱이 속에서 탁한 갈빛의 탑이 머리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성전에 도착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성전은 바람이 너무 심한 탓에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형체만을 겨우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하나의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수많은 탑들을 한데 모아놓은 탑의 마을에 가까워 보였다. 붉은 용은 높게 솟아오른 기둥 모양의 돌들 사이에 서서 탑들을 둘러싼 성벽의 문을 시험적으로 한 번 두드려보았다. 거친 표면은 사암으로 되어있었다.
문은 그 거대함에 비해 무척 열기 쉬웠다. 조금 힘을 주고 안쪽을 향해 밀자 그것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성벽 내부는 왕이 기거하는 성전 치고는 투박하고 단조로웠고, 용의 손을 탄 흔적은 성벽 벽면에 걸린 횃불뿐이였다 (그마저도 모래폭풍 때문에 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붉은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사암탑 사이사이를 지나 가장 높은 탑 앞에 도착했다. 분명 오는 길에 왕의 신하들이 보여야 정상이였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거센 모래바람 탓으로 치부하고 탑 앞에서 가만히 집주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탑 안에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금빛의 용이 조각된 문의 문틈 사이로 돌연 목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젊은이 특유의 싱그러움이 남아 있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제가 사람을 보내 모셔드렸을 텐데…"
"그런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지 말도록 하죠. 무엇을 제시하려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붉은 용이 딱 잘라 말하자 금빛 용은 자신의 방정맞은 모습이 뻘쭘했는지 잽싸게 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바깥은 모래바람이 너무 강합니다."
붉은 용도 눈에 모래가 잔뜩 들어가는 경험이 썩 유쾌하진 않던 참이였다.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 순식간에 따끈하고 안락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거대한 탑 내부는 의외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단 하나의 방 위로 높은 천장이 드리워 있는 형태였다. 오직 왕 한 명만이 지내기 위한 처소를 지어졌을 테니 층이 여러 개일 필요도 없는 건가.
그녀는 말없이 금빛 용을 바라보며 그가 대화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심성도 심성이지만, 가장 특이한 건 역시 그의 외모이다.
그는 다리가 세 쌍이였다. 팔과 같은 앞다리와 큰 뒷다리, 그리고 꼬리 쪽에 달린 작은 다리들까지 합해서 세 쌍. 날개 윗부분의 끝에 달린 발톱은 손을 연상케 했다. 그의 모습은 금빛 비늘과 온 몸을 뒤덮은 금속 광택이 나는 녹색 문신과 어우러졌고, 꼬리 끝에 달린 미늘과 함께 보니 전갈과도 비슷해보였다.
용들 사이에서 기형은 드물지 않다. 그렇다고 많이 희귀하지도 않지만. 모두 제쳐두고, 적어도 이런 식으로 괴이하게 생긴 용은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이다. 그게 하필 왕이라니 기막힌 우연이라 해야 할지, 단순한 악연이라 해야 할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하시는 것 같군요." 금빛 용이 정확하게 짚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금빛 용이 기꺼이 응해주었다. 딱딱한 대화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던 것이 고맙기라도 했는지.
"오는 길에 다른 황색용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모래바람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오라…저희들의 조심성 때문일 겁니다."
"무엇에 대한 조심성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가 어물쩍거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과거에 저지른 일들 때문에요."
"당신들의 초대왕이 시작했던 전쟁 말씀이시군요. 록티무를 배신하고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려 들었던."
그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른 부족들의 시선 때문에 저희는 다른 부족의 용들을 대하는 데에 매우 조심스러운 편입니다. 건드려서 화를 부를 바에는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달까요. 특히 당신은 한 부족의 왕이시니 더욱이 상종을 어려워할 겁니다."
붉은 용은 혀를 쯧 찼다. 그는 그것을 언짢음의 표시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혹시 불쾌하시다면—"
"지금의 황색용들은 전부 이스라쉬를 따르기를 거부한 용들의 후손 아닙니까? 왜 과거의 일에 대한 책임이 당신들에게 전가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아…" 금빛 용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당신이라면 저와 생각이 같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세 쌍의 발을 모은 어색한 자세를 한 채 꼬리를 앞발 위로 늘어뜨렸다. 붉은 용 역시 거친 사암 바닥 위에서 그나마 편한 곳을 찾다, 이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당신이 제 계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가 돌연 말했다.
붉은 용은 놀란 기색조차 없이 지그시 그를 바라볼 뿐이였다. 그 반응이 그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는지, 단순히 그의 계휙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을 터이다.
그녀의 시선은 묵묵하면서도, 조용히 그에게 대화를 계속하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금빛 용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시도했지만, 금새 포기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아니, 이스라쉬가 시작했던 전쟁이 끝난 이래, 부족들 사이의 평화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제 계휙은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평화의 체제를 세우는 것입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계휙이…" —그녀는 '터무니없는 계휙' 이라 내뱉으려던 것을 도로 삼켰다— "그런 계휙이 성공하리라 믿고 계신지 알고 싶군요."
"조력자가 있거든요." 그는 슬그머니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강한 만큼 아는 것 역시 많죠."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그의 태도가 의심스러웠지만, 큰 악의가 깃든 것 같진 않았다.
"마법사라면 푸른용이군요. 그 조력자가 아무리 강력해도 자신의 왕보다 강할 일은 없을 거라 봅니다만."
"푸른용이 아닙니다. 저도 그녀의 역량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 푸른용들의 왕인 오세란보다는 몇 배 더 강합니다."
"적어도?" 붉은 용이 저울질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오세란이 언제부터 '적어도' 라는 비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약했었습니까? 푸른용 이외의 부족이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또 언제부터였고?"
"그녀의 존재를 믿지 못하신다면 계휙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금빛 용이 난처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제 계휙은 당신의 협조 없인 성공할 수 없어요."
"실상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계휙을 내놓고는 협조를 부탁하시는군요."
"계휙에 대한 것들은 머지않아 설명해드릴 예정이지만—"
"됐습니다." 붉은 용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 꼬리를 한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옅은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당신은 적어도 얄팍한 수를 쓸 정도로 비굴하지 않을 테니까요.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한 때가 온다면, 반드시 그 계휙에 대해 전부 설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믿어주시는…겁니까?"
"그렇다고 치지요."
그 한 마디에 무슨 힘이 있었는지, 긴장되어 있던 그가 눈에 보일 정도로 안도했다. 붉은 용은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릴 뿐이였다.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문 밖으로 향했지만,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최근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시다면…"
오그림이 분을 삭히며 납치된 딸에 대해 털어놓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인 금빛 용의 표정은 진심 어리게 미소짓고 있었다.
"머지않아 해결될 겁니다. 이건 반드시 약속해드리죠."
이번화요약: 메르디스 키우고싶다
꽤 길게 쓴것 같은데 저번화보다 짧네요
3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mode=read&b_no=2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