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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걸었던 길

38 [Lefream]
  • 조회수645
  • 작성일2019.08.06

톡-



검에 묻은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가득 메운다.



하나를 빼곤 아무도 숨쉬지 않는 복도는 너무 고요해서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내의 작은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바닥은 이미 피로 흥건했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바닥에 널부러져 뒤엉킨 시체들은 그곳이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끝없이 긴 복도, 그리고 그만큼 끝없이 이어진 시체.



그 시체들의 얼굴은 제각각이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가슴이 찢어지게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중에는 사내와 면식이 있는, 조금 눈에 띄는 얼굴들도 있었고 전혀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그런 얼굴들이 모두 같은 표정을 짓는다는건 조금 섬뜩한 일이었다.



단지 '죽게 되었다' 라는 억울함 같은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 원초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더 깊고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슬픔과 안도감이 섞인, 조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광경이 더 공포스러운 이유들은 그것 때문이었다.



인간적인 표정을 가진 시체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는데, 그 방향이 자신이 향하는 곳이라면 아무리 담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조금은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면 어쩐지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그는 뒤를 돌지 않고 쭈욱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그는 조금씩 덤덤해져 갔다.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시체들이 더 이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지가 않다.



이제는 앞길을 가로막는 그들이 짜증날 뿐이었다.



그때, 그는 이 길을 걷게 된 이후 처음으로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가 두렵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가장 무서운 것이 무뎌진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손을 씻고 돌아가기엔 그는 해버린 일들이 너무나 많았고, 해야 할 일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계속 걷기로 했다.



귀찮은 시체들을 발로 툭툭 치며 걷기 시작했을 때 쯤, 어느새 시체들은 사라져 있었다.



검붉은 피가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아까와 마찬가지였지만.



아니,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그저 복도 바닥 색깔이 검붉은 것 뿐이었다.



뭐야, 괜히 겁먹었네. 그냥 복도일 뿐이잖아. 여태까지 걸어왔던, 앞으로 좀 더 걸어야 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은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다행히도, 앞을 바라보자 이제 이 길에 시체는 없었다.



대신 살아 움직이며 그를 방해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은빛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투구를 꽉 눌러 써 누가 누군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첫 번째로 그에게 달려든 기사를 베어냈을 때에, 그것은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지독한 저주였다.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버리는 환상을 보여주다니.



그렇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가 멈춰버리면 여태까지 지나쳐왔던 죽음들은, 방금 쓰러진 친구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리니까.



두 번째는 연인이었다.



연인의 얼굴을 한 그것을 발로 차내고 베어낼 때쯤, 그는 상대가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그를 해치지 않기 위해 손 부위의 날카로운 쪽에 푹신한 솜을 덧대었다는 것도 알아 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길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이유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베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그들을 다 베어내고 나자 복도는 좀더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걸음을 이어나갔다.



마침내 복도의 끝에 다다르고 흰 문이 앞에 보일 때쯤 그는 누군가를 조우했다.



분명, 역사책에서 본 적 있는 이였다. 이 나라를 세운 초대 왕.



아니,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차대 왕이었다.



너무 피곤해 착각했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다시 보았을 때에, 그것은 증조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할아버지로, 다시 아버지의 얼굴로 변했다.



잔뜩 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넌 누구지? 왜 내 조상을 사칭하는 거냐?"



"너희 조상이 남겨두고 간 것.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들은 하등 쓸모없다 생각했던 것."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네가 여기 있지 않길 바랬으니까. 나를 없애더라도 이 문만은 넘어주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 문은 무엇인데?"



"넘으면 왕이 되는 문."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수많은 조상을 거쳤다면 내 대답이 무엇인지는 분명 알고 있을 테지?"



"물론,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거고."



"왕의 시험은 이제 마무리되어가는 것 같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그는 말을 마치고는 들고 있던 검으로 그것을 베어 버렸다.



그렇게 검을 내리치는 데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문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옭아매고 있던 죄책감들이, 부담들이 전부 뒤로 떨어져나갔다.



그야말로 왕 같은 기분이었다.



문 안에는 찬란히 빛나는 왕관이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왕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 왕관을 집어들었다.



그의 머리에 금빛 왕관이 씌워졌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호명하며 환호했다.



누군가가 그의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드디어 왕관을 얻었구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까 죽인 친구나 애인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먼 조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왕관은 머리를 옥죄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너도 왕이란다. 꿈을 이뤄낸 거지. 그래서, 행복하니?"



그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왕관은 무거웠다. 모두를 잃은 그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왕관은 너무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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