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파이어!
주문을 외치자 거대한 불덩이가 만들어진다.
태양같이 활활 타오르는 붉은 구체는 분명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야 하는 것이 정상.
그러나.
"파쇄破碎."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한 마디 만으로 불덩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세계 최강이라며, 이게 최선이냐?"
남자의 비웃는 듯한 말에 카르듀아스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마법의 근원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마룡.
그런 자신의 마법이 남자의 단 한마디에 사라져버린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내 마법은 분명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일텐데. 신께서도 그래서 나를 추방하신거고.
"신이고 나발이고, 학습 능력이 없냐? 마법은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니까."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 십번.
수 백번을 써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無.
상대의 죽음만을 가져왔던 자신의 마법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럴리가 없다!'
카르듀아스는 아직도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더한 마력을 끌어모았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나 이번엔.
딱!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 만으로도 뭉쳐지고 있던 마력 자체가 날라갔다.
-이...이이!!
카르듀아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귀한 자신의 마법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 이놈!
카르듀아스는 등 뒤에 고이 접혀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후, 엄청난 풍압을 동반하며 날아올랐다.
-원하는 대로, 깔아 뭉개주마!
계획은 간단했다.
성 하나조차 무너트릴 수 있는 자신의 무게로 저 놈을 깔아뭉개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마법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오점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있을 것이라는 불완전한 사실도.
모두 땅 깊숙히 묻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유언이나 남겨라, 모험가여!
카르듀아스는 이럴 때, 기분이 가장 좋았다.
하찮은 미물이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볼 때.
물론 이번의 개미새끼는 예상 밖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여차 다른 미물들과는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똑같이 살려달라고 싹싹 빌거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겠지.'
어느새 카르듀아스의 흉악한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자, 어서 두려워해라! 도망쳐라!'
그러나.
남자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너도 참 고생이다."
-....?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에 들어있던 감정.
그것은 두려움도, 공포심도 아니었다.
연민憐愍.
자신은 가질 수도 없는, 받아서도 안될.
하찮은 미물들이나 나눠 가진다고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게 무슨..!
카르듀아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끼어들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이윽고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한 단어를 읊조렸다.
"멸滅."
-...무슨 소리..
남자의 손에서 검은 빛이 번뜩이자.
파스슥.
카르듀아스는 자신에게 생긴 한 가지 감정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먼지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
[마룡, 카르듀아스가 격퇴되었습니다.]
[세계가 용사를 찬양합니다!]
"하아아..."
눈 앞에 문구가 뜬 것을 확인하자.
용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허무함에 털석 주저 앉았다.
[1000번째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을 산정합니다.]
"드디어 1000번째네."
마지막 필드 보스.
마룡, 카르듀아스를 천번 째로 잡고 나자 오는 것은, 성취감이 아닌 지독한 공허함 뿐이었다.
"이제 뭐하냐..."
10번. 100번. 1000번.
보스 몬스터 처치시, 특별한 보상을 주는 횟수다.
레벨 999.
검술, 마법, 제작.
분야에 상관없이 종류별로 모든 스킬 마스터.
거기에 스토리든 서브든 모든 퀘스트 확인.
이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떠나버릴 정도의 현실감을 가진 이 게임에서, 나만이 비현실적인 강함을 지녀버린 것이다.
"카르듀아스도 처음에는 잡는 재미가 있었지만..."
나는 마룡이 사라져버린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는 한 방 컷이라니."
검의 극의極意 스킬 '파쇄破碎'.
마법의 극의極意 스킬 '멸滅'.
이 두 스킬을 얻은 뒤로는 몸을 움직이는 재미까지 사라져버렸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곤 곧 있으면 나올 보상뿐.
때마침, 나의 귓가엔 안내음이 들려왔다.
[보상 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안내음이 끝남과 동시에 공중에 작은 포탈이 열리더니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번엔 무엇일까나."
10번째 때는 파쇄破碎를.
100번째 때는 멸滅을.
이번에는 무엇을 줄지 궁금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심정으로 나는 보상을 향해 다가갔다.
"이건 뭐지?"
그리고 풀 숲에 떨어진 보상을 보자 나는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주어진 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