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완벽했을 계획이다.
언제 등장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도망칠 장소를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드러낼지 계획을 끝마쳤다.
그런데 지금 이 분위기는 뭐지?
방금까지도 눈물을 짜내려던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랩터들은 하려는 공격은 안하고 고개만 갸우뚱 거리며 케륵-거린다. 물론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겠지만.
‘하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야?’
곰곰이 고민할 때였다. 다행히도 의심을 푼 랩터가 울기 시작했다.
-케륵! 키르륵!
-케륵! 키르륵!
열 마리나 되는 놈들이 한꺼번에 울자 나름 웅장한 장관이 펼쳐진다. 덕분에 잠시 공포를 잊고 있던 사람들의 주의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으아아아! 살려줘!”
맨 앞에 있던 랩터가 성씨를 물려했다. 나 죽는다! 하며 눈을 꼭 감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슬며시 눈을 뜨자, 방금 등장한 청년이 곡괭이로 랩터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으으....”
“빨리 도망치세요! 얼마 못 버팁니다.”
“하지만....이미 게이트가!”
게이트가 닫혔다.
음악을 듣고 있던 캐리어가 그렇게 말하려 했다.
무슨 사유든 간에, 괴수가 내부로 진입하면 밖으로의 출구가 막힌다. 밖으로 나가려면 안에 있는 괴수를 전부 죽이거나, 게이트가 저절로 개방되는 일주일까지 버텨야 한다.
어차피 게이트가 저절로 개방되기 전에야 밖에서 헌터가 도착해 이곳을 정리하겠지만.
그때까지 살아남는 건 다른 이야기다.
“반대쪽 갈림길에 숨어 있을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구조 요청을 하면 제때에 헌터들이 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청년이 답답한 듯이 소리쳤다.
서서히 다른 랩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청년이 버틸 수 있는 것도 한 마리뿐. 지금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는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멸이다.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청년 고마우이!”
달리면서 성씨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말을 한다고 좀 닳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흐음.’
힐끔.
랩터와 대치하면서 뒤를 바라봤다.
목숨이 경각에 처한 사람들은 빨랐다.
조금 버티고 있을 동안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제 들킬 걱정하는 것은 됐고.
다시 고개를 돌려 랩터에게로 향했다.
이놈들이 저들을 쫓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즐기기 위해서.
랩터들은 사냥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인간보다는 떨어지긴 해도 높은 지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도망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는 『괴수 안내 책자』에 나와 명시되어 있는 점이다. 뭐, 공룡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 알만한 사실이긴 하지만.
여기서 확실한 건 하나다.
강자로서의 자만심이 저들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었다는 것.
‘곡괭이는 충분하고.’
맨손으로 랩터들과 맞섰다....라는 건 진술할 거리가 안 된다.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 무기 없이 괴수를 막아서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다행히도 캐리어들이 자신의 곡괭이를 전부 버려두고 도망쳤다.
-케륵!
뒤에 있는 랩터들은 내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본다.
-우직!
때마침, 놈의 악력을 버티지 못한 곡괭이가 부서진다. 손을 재빨리 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카드득-. 랩터는 쇠까지 터프하게 물어버린 뒤, 퉤 뱉어냈다. 그러고선 이젠 어쩔 거냐는 듯이 바라봤다.
‘이거. 곤란한데.....’
계속 지켜보기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젠 참을 수 없나보다. 렙터들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다.
슬슬 사냥 시간이라는 건가?
-케륵! 케르륵!
“하아....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신나게 울고 있는 놈들을 보자, 순간 화가 올라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착한 내가 참아야지. 그리고 이놈들에겐 빚을 졌다. 제때에 울어주지 않았다면, 캐리어들로부터 의심을 살 뻔했다.
‘특별히 한 대도 때리지 않으마.’
곡괭이를 고쳐 잡았다. 목적은 저들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헉....헉......”
갈림길을 겨우 지나왔다. 어둠속에서 금방이라도 랩터들이 덮쳐올 것만 같았다, 지금도 저 안은 불안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다. 젊은 청년이 잘 해주고 있겠지. 그렇게 믿으려 해도 현실은 잔혹하다.
‘그놈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을까?’
순간, 자신이 됐을지도 모를 그런 장면이 떠오른다. 그 즉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청년. 이름은 모르겄지만, 이 한평생동안 그 모습을 가슴에 묻고 살 것이여.’
성씨는 굳게 다짐했다.
그래도 아직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 그 많은 수의 괴수가 청년을 먹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황씨가 물어왔다.
“성씨, 그 청년은 어떻게 됐을까?”
“.......모르겠으니 그냥 달려!”
지금은 마음속의 청년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괜히 죄책감을 갖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아직은 확실히 목숨을 부지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지, 청년?
“뭔가 소란스럽지 않나?”
“글세, 잘 모르겠는데.....”
얼마나 왔을까.
사람들의 눈엔 세상 편한 모습으로 작업하고 있는 두 명의 캐리어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망쳐요!”
“헉헉,,,,,과물이.....”
“왜들 그러시죠? 무슨 일 있나요?”
그들은 갑자기 달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데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캐리어들은 잠시 멈춰선 뒤, 황급히 자초지종을 말했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숨겨진 방이 나왔다. 괴수들이 튀어나와서 한 청년이 뒤에서 남은 상태다. 게이트는 닫혀가지고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청년의 장렬한 희생서사를 그린 성씨의 열변을 끝으로 둘 중 한 사람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제가 일하기 전에 던전을 끝까지 걸어갔다가 시작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곳엔 숨을 곳이 없습니다.”
“거 확실히 확인한 거 맞아?”
“이 상황에서, 제가 거짓말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곧 있으면 괴수들이 올 거라고!”
“왜 저한테 소리 지르시는 겁니까!”
작은 말다툼이 싸움으로 번진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엔 여유가 없었다.
그때였다. 헌터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음악남이 입을 열었다.
“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저기, 제가 아까 구조요청을 했거든요? 지금 답장이 왔는데, 헌터들이 도착하는데 10분은 더 걸릴 것 같다는데요.”
분위기가 더욱 침체되었다.
왜인지 자신에게 큰 사명이 주어진 것 같은 성씨가 말했다.
“우선 진정들 하고, 앞으로 걸어가 보세나. 이 분도 어두우니 제대로 못 볼 수도 있는 거니까.”
성씨는 말을 하며 한 발을 먼저 내딛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미끄러워!’
중심을 잡을 수가 없던 것.
철퍼덕! 꼴사납게 넘어진 그는 데구르르 벽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한심하게 보며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아아니니니, 이이이거거거 멈멈출출 수수 가악!!”
성씨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벽에 생긴 구멍 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야야.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자네들! 여기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네!”
ㅡㅡㅡㅡㅡㅡ
.......드디어.
뭔 더럽게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다.
사람들끼리 서로 만난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속 편하게 말다툼이라니.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덕분에 예상과는 다를 때에 그리스(Grease), 미끄러짐 마법을 펼쳤다.
다행히 숨을 곳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대피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시간 벌이가 끝난 것 같다.
“이젠, 우리도 서로 끝내볼까?”
다섯 마리는 막 저들을 노리고 달려갔다. 아마 내가 쉽지 않은 먹잇감이라는 것을 알고 결정한 행동일 것이다.
걱정은 없었다.
저놈들이 도착할 때쯤엔 사람들은 열 수 없는 진열관속의 뷔페일 테니까.
그러고보니 동생하고 같이 뷔페를 갈까.
딴 생각을 할 동안 랩터가 먼저 움직였다.
앞에서 한 놈, 뒤에서 한 놈. 짧지만 날카로운 발톱들을 휘둘러 왔다.
본래라면 완벽히 피해낼 정도의 속도.
‘맞는다.’
그럼에도 맞아줬다.
“크흑!”
앞과 뒤.
얕게 상처가 나도록 조절했는데도 장난 아니다. 상처에서 피가 나와 헌터용 수트가 척척히 젖기 시작한다.
앵간하면 찢어지지 않는다는 수트에 발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케엑!!
옆에서 오는 놈의 공격은 오른팔로 막았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상처가 선명하게 난다.
갑자기 놈들의 공세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 버티던 먹잇감이 지쳤다고 판단해서일 테지만.
‘이정도면 충분한 거 같네.’
손을 홱 휘두르자 랩터 두 마리가 서로 부딪치며 벽에 쳐 박힌다.
“아차차....미안.”
다 끝났다고 하니 너무 방심했다. 실수로 때려버리다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죽진 않았지?”
-키에엑!! 키엑!
화가 난 다른 랩터들이 달려들었다.
더 상대해주고 싶어도.
목적은 달성했다. 시간을 더 끄는 것이 이상하니,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끄아아악!"
사람들은 피투성이인 내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한 중년 아저씨는 갑자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지친 듯이 물었다.
"구조대는요?"
"곧 있으면 온 답니다."
"하아, 모두들. 살아서 다행입니다."
그 말 이후로,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다.
고마움과 선망이 가득 담긴 시선.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시선은 금방 멈췄다.
카드득! 카드득!
양 옆에서 화난 랩터들의 이빨이 갈리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여기요!!!! 여기 있어요!!!"
"살려주세요!!"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곧 화르르륵 불타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전해졌다.
키에엑! 괴수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정리가 끝나자 헌터들의 도움으로 하나 둘씩 들어올려졌다.
마지막으론 부상을 입은 내가 조심스레 옮겨졌다.
나는 들것에 실린 채, 모든 캐리어와 헌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기자들과 카메라멘이 잔뜩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을 보며 성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 유명인이 되어버리겠구만."
"그러게 말이에요."
"술 안주거리가 생긴 거 아닙니까!"
캐리어들끼리 서로 웃고 떠들 때 생각했다.
'꼴값 떨고 있네.'
고생은 다하고 괜히 피해만 본 것만 같다.
이게 '죽 쒀서 개준다'라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저들은 저들대로 내비둬도 되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게이트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일에 대한 사신 길드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메인 이벤트가 아직 남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