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 [1화]
"2번 테이블!"
"지금 갑니다."
칠면조 통구이. 사워크림을 곁들인 베이컨 샐러드 두 접시. 순무수프와 감자수프를 세 그릇씩. 슈가파우더와 호박파이, 호두파이. 확인.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1년의 마지막 날, 식당은 붐비다. 따라서 직원인 나는 바쁘다. 정규 직원이든 비정규직원이든 일이 가득하다는 건 바뀔 일 없는 이야기다.
뿌옇게 김이 서려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유리 안 쪽은 열이 가득하다. 열은 식당 안 쪽으로 갈 수록, 다시 말해 주방에 가까울 수록 더욱 올라간다. 나온 음식을 전부 테이블에 올린 나는 옷길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번갈아 둘러보았다. 아무도 안 보지?
문을 열자 아릿한 바람이 몸을 덮쳤다. 잽싸게 밖으로 나온 나는 그림자가 진 계단에 걸터앉았다.
달콤해 보이는 눈이 온 땅에 덮여 있다. 하늘은 차분히 잠을 잔다. 문득 하품이 나왔다. 사방이 분주하고 빛이 나는 식당과 달리 밖은 등불이라곤 은은한 달빛 뿐이다. 그리고 이따금 별이 반짝할 뿐이다.
"또 땡땡이치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돌았다. 그리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멜트 형,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게 왜 땡땡이치고 밖으로 나왔냐. 안 그랬으면 놀랄 일도 없게."
"땡땡이 아니거든요. 급여를 줘야 일을 안 했을 때 땡땡이가 성립 되지."
나는 산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게다가 형은요, 형도 땡땡이잖아요."
"휴식이라고 하는거다."
"그럼 저도 할게요. 휴식."
멜트 형은 고개를 흔들면서 내 옆에 앉았다.
"어때?"
"뭐가요?"
"일."
"더럽게 힘들어요."
"말 참 곱게 한다."
"고마워요."
찬바람 잔뜩 쐰 손이 어느새 뻑뻑해졌다. 나는 입김으로 손을 데우다가, 시린 귀를 잡으며 말했다.
"솔직히 아저씨가 너무한 거에요. '따뜻한 데 들어오게 해 줄테니 일해라'. 말이 되냐고요! 저희 집도 얼어죽을 정도로 춥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일은 하고 있잖아. 할 거면 제대로 해. 안 할거면 그냥 말고."
"일하다 휴식하러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라 설득력이 전혀 없는걸요?"
"휴식도 업무의 일환이야."
"그럼 어쨌든 저도 휴식하러 나온 거라서요."
"일이 성립되려면 급여가 있어야 한다며?"
"그러면 애초에 '일 할 거면 제대로 해'가 성립되지 않거든요?"
"일 제대로 하면 급여로 칠면조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쳇, 그런 질긴 거."
"잘 하면 맛있어."
"그런데 아저씨가 요리를 좀 잘해야죠."
위이이이잉.
그 때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거리를 휩쓸었다. 땅에 덮여 있던 눈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더니 찬찬히 떨어졌다.
멜트 형은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발갛게 언 손으로 눈을 훑으며 말했다.
"요새 눈에 띄게 추워졌지."
"안 죽을 정도면 되지요."
"내가 아는 한 날씨가 갑자기 바뀌어서 좋았던 적은 없어."
"겨울 되서 유난히 추워지는 게 대수인가요."
멜트 형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쾅! 하는 울림에 소리가 묻혀버렸다. 땅이 한 순간 우르르 울리더니 이내 멎었다.
"뭐에요, 방금?"
"내가 알겠냐."
멜트 형은 일어서서 식당 문을 열었다. 들어가기 전 나를 슬쩍 보면서 물었다.
"계속 휴식하고 있을 거냐?"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오냐."
멜트 형이 들어가자 나는 돌아서서 소리가 난 쪽, 높다란 산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한바탕 돌풍이 지나간 후에도 산 위쪽에서는 계속 찬바람이 불어내려왔다. 살이 아릿하다 못해 따갑고 찢겨질 것 같자 나는 옷을 살짝 벗어 얼굴을 감싸는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해야했다.
"진짜 더럽게 춥네. 옷이 더 두꺼웠으면 좋았을 걸."
한적한 길을 건너, 울타리가 있는 마을 외곽까지 가자 나무가 빽빽한 숲이 드러났다. 나는 울타리를 넘어 숲 안으로 들어갔다. 숲 안으로 들어오자 거세던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다. 얼어죽을 시간은 조금 미뤄진 것 같지만... 이 밤에 숲에 들어가다니 역시 자살 행위 같은데. 역시 돌아갈까. 그냥 어른들을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으앗!"
그 순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산비탈을 굴러버렸다. 비탈이 완만해서 많이 구르지는 않았지만... 더럽게 아프다. 게다가 잠깐 사이에 방향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앞도 잘 안 보이는데 내가 떨어진 비탈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으아악!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왜 아무 생각 없이 숲으로 들어왔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런데 그 때까지 안 얼어죽고 버틸 수 있을까?
그 때, 내가 간과하고 있던 하나의 위협이 덮쳐왔다.
"크르루루... 우엉!"
아, 망했다.
저 친구는 우리 마을에도 종종 놀러와서 건물 부수고 가는 놈이라 조금 아는데, 이름은 곰이요, 자랑거리는 앞발인 무식한 짐승이다. 저놈한테 먹혀 죽는다는 계산은 안 넣었네. 역시 난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 없어.
자, 그래서. 곰을 만났을 때 행동 요령은...
나무에 올라간다. 저 곰은 나무 잘 탄다.
비탈을 올라간다. 저 곰은 오르막길 잘 올라가는데다 이 비탈, 경사가 급하지도 않다.
죽은 척 한다. 저 곰은 시체를 먹는다.
싸운다. 그러다 한 번에 골로간다.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풀린다. 저 곰은 더럽게 사납다.
도망간다. 따라잡힌다.
그래도 어떡해! 도망가야지! 곰 주의를 끌만한 거 아무거나 던지라던데, 던질 게 있나? 아니 그 전에 도망쳐서 마을로 갈 수 있는 거 맞아?
그 순간 꾸우엉, 하는 소리와 함께 짐승이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냅다 아무데로나 뛰었다. 바로 뒤에서 사나운 발소리가 쫓아왔다. 숲을 울리는 듯한 숨소리는 점점 커졌다.
으아, 이거 목도리라도 던져야 하나. 나는 빠르게 목도리를 풀어 곰 쪽으로 휘둘렀다. 곰은 멈칫 하나 싶더니, 아니 멈칫 하지도 않고 바로 목도리를 낚아챘다. 아직 목도리를 놓기 전이던 나는 곰이 목도리를 잡아당기자 그대로 끌려가 넘어졌다. 곰은 목도리를 종이마냥 찢어버리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아!"
쿠앙! 위이이이잉.
그 때 눈 앞이 번쩍하면서 엄청난 바람소리가 귀를 찢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위의 나무가 전부 우지끈 부러져 있었다. 곰은 땅에 쳐박힌 채 나무에 깔려 있었다.
"이..게 뭐야."
경악스러운 현장 너머, 청백색의 물체가 천천히 하늘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