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VILLAGE

  • 스토어

  • 틱톡

  • 플러스친구

  • 유튜브

  • 인스타그램

소설 게시판

  • 드래곤빌리지
  • 뽐내기 > 소설 게시판

유저 프로필 사진

바람을 새기다1(가제)

38 [Lefream]
  • 조회수478
  • 작성일2020.09.22
싸늘한 댑바람이 반도 남쪽의 작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감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뭉게졌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마을은 한창 겨울나기 준비에 바빴다.


아낙들은 얼마 없는 솜털을 아끼고 아껴 태어난 아기의 옷을 준비했고, 남자들은 더욱 분주히 돌아다니며 장작을 준비했다.


마을은 크게 눈에 띌 만큼 화려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의 어딘가 다른 느낌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 마을에는 밭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대신, 그들 마을 옆에는 종이를 만들기 위한 닥나무 숲이 즐비해 있다.


그곳은 각종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고치는 장인들의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책과 활자를 만드는 책꾼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은 농사를 하지 않았다. 각지를 돌며 장신구와 책을 팔아 식량을 마련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기술을 전해 보상을 받는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창고 사정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겨울은 여전히 혹독한 계절이었다.


여전히 겨울이면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나라에서는 그걸 막겠다고 별 수를 다 써보았지만,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자연스러운 순환은 아무리 나랏님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이치를 알고 바로 앞에서 느끼는 이들은 있었지만, 안다고 해서 아는 이의 죽음을 마냥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년 겨울은 유달리 싸늘하고 잔인했었다. 옆마을의 많은 아이가 죽었고, 마을의 존경받던 노인 하나도 흙으로 돌아갔었다.


그 탓에 이번 겨울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힘이 아닌 지혜와 기술로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수많은 삶의 경험을 품고 있는 원로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만큼 마을은 점점 분주해져 갔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자와 인재이니 사람을 잃는 것은 아무리 적은 가능성일지라도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을의 소란에도 예외는 하나쯤 존재했다. 모두 바삐 일하고 있을 때에 책방에만 틀어박혀 오래된 옛이야기를 읽고 있는 꼬마는 마을의 기대주이자 골칫덩이인 율이었다.


그는 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활자 제작자의 아들이었지만, 본인은 활자를 만드는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율이 책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을에서 책을 가장 좋아하는 이라고 한다면 9할은 율의 얼굴을 떠올릴 정도로 율은 소문난 책쟁이였다.


그렇기에 마을의 대부분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반항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미 잃은 슬픔은 그들로써도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으니 함부로 뭐라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달랐다. 아무리 마을이 율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지만 모두가 바쁜 와중에 혼자만 농떙이를 피우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마을의 제일 가는 나무꾼 오석화가 책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꽤나 큰 소리였음에도 율은 미동 없이 책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오석화는 책을 읽고 있는 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책에 몰입한 탓에 자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는 율을 보며, 오석화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율아? 다들 바쁜데 너 혼자 뭐 하고 있는 거니?"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서야 율은 고개를 들었다.


"아, 아저씨 오셨어요?"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묻는 율이었기에 오석화는 피식 웃음지을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순수한 아이라 해도 꾸짖을 때는 확실히 해야 했다.


"뭐가 오셨어요냐 이 녀석아. 다들 바쁜데 너 혼자만 뭐 하는 짓이야? 어서 가서 네 아버지 좀 도우렴. 장작을 옮기는 데에 애를 먹고 있는 듯 하니."


그 말에 율이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 싫은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아이였다. 그 표정을 읽은 석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철이 다 든 것 처럼 행동하는 율에게서 그런 아이같은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아버지를 피해 다니기만 할 거니, 이제 너도 아버지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어서 가서 도와 드리렴."


그 말에 율은 굼뜨게 몸을 움직였다. 오석화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들려 나갈 걱정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써는 하기 싫은 일에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아까웠다.


결국 책방 밖으로 나오게 되었지만, 율의 퉁명스런 구시렁거림은 좁은 책방을 나서서도 그치지를 않았다.


밖의 날씨는 겨울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싸늘했다. 유독 건조하기도 했다. 율은 이런 날을 싫어했다. 추운 날이면 꼭 피부는 상했고, 아픈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단지 환경의 유사성으로 인해 기억이 떠오르는 것 뿐이었지만, 율은 지나치게 춥고 건조한 날씨를 불길하게 생각했다.


율은 따듯한 불이 지펴져 있을 아버지의 공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몰래 감춰 온 책 한 권을 손에 든 채였다.


율의 책 사랑은 길거리에서도 쉬이 식지 않았다. 그는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책에 몰입한 율은 어느 새, 자신이 아버지를 도우러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근처의 나무 아래에 걸터앉았다.


한참 후, 율의 집중을 깬 건 근처에서 들리는 남자 둘의 다툼 소리였다.

"그러니까, 왜 그 분을 만나야 하는 건지 알려달라니까요? 나으리가 그것만 말해주셔도 제가 이러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하여튼 안된대도! 자네는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네. 꼭 그 사람에게 직접 전해야만 하는 말일세."


"그 중요한 일이니 더욱 제가 알아야죠! 저번에도 사람을 보내셔서 억지를 부리셨잖습니까! 장인을 데려가려 하시면 저희 마을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소리를 따라가 보자, 오석화가 처음 보는 사내와 다투고 있었다. 사내는 고급진 보랏빛 옷을 입은 게, 한 눈에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뻔했다. 율의 아버지인 박성현을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시도는 여러 번 있어 왔으니까.


아내를 잃고도 헤실거리고, 일에 매달려 자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인간이 뭐가 예쁘다고 다들 저리 찾는지. 율은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둘은 율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싸움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아, 글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니까요!"

"예끼 사람아, 그걸 왜 자네가 정하나? 본인한테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일이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어른들의 대화치고는 유치했다. 보다 못한 율이 끼어들었다.


"저희 아버지 찾으러 오신 것 맞으시죠? 아마 지금쯤 일 끝내고 공방에 가 계실 겁니다."


그제서야 율을 발견한 오석화가 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완강했다.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분명한 표시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율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어린애한테 뭐하는 짓인가, 아이가 겁을 먹잖나. 그래, 네가 박 장인 아들이니?"


사내의 말투는 오석화와 다투던 그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중해져 있었다. 하지만 인상이 워낙 강해서인지 정중한 무표정에 율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이한테 겁을 주는 건 오히려 그쪽인데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율은 잠시 고민했다.


이 남자를 박 장인에게 데려가도 될지에 대한 답은 예상 외로 금방 나왔다. 마을에 해가 되는 일이라고 판단하면 어짜피 본인이 알아서 처신할 터였다.


생각하던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라오세요. 공방까지 안내해 드릴 테니."


아들이 그렇게 나오자 오석화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단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반면, 사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했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기쁨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박 장인이 아들을 참 똘똘하게 키우셨군. 그래, 네 이름이 뭐라고?"


"박 율 입니다."


율은 짧게 대답했다. 어쩐지 눈앞의 상대에게선 알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은 터였다.


상대는 그런 율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많이 아쉬운 눈치였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긴 것이냐? 아이들이 나와는 영 말을 하려 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 했다. 아까 보이던 유치한 모습이 아마 그의 진짜 모습일 터였다. 그리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율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아뇨, 제가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서요. 아마 오래 보면 나아질 거에요."


"하하, 그러냐? 똑부러져서 말도 잘 하는구나."


사내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고 있으니 조금 나아 보였다.


사내의 시답잖은 농담 몇 개에 답해주는 동안, 어느새 둘은 공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사내는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더니 공방 앞으로 다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심지가 굳어 보이는 그이지만 어지간히 긴장한 듯 했다.


"박 장인 있는가? 나일세, 이찬성."


그 말에 안에서는 분주한 소리가 났다. 아마도 일을 마치고 퍼질러 자고 있다가 급히 손님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율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율의 아버지, 박성현이었다.


하지만 그는 율이 여태까지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은 너무 굳어 비장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갈 생각 없다고. 저는 이곳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가 무뚝뚝한 어투로 내뱉었다. 그의 말에는 확고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찬성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렴, 알고 있지.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네. 단지 장인으로써의 자네에게 조언을 구할 일이 있을 뿐이지."


그 말을 듣자 박성현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평소의 사람 좋은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진작에 말을 하시지. 그랬으면 장인답게 유한 마음으로 맞아드렸을 텐데."


"자네가 그럴 시간을 안 줬지 않는가. 어쩄거나, 이번에 나라에서 화친의 의미로 백휘에 사신을 보낸다 하네. 그 사신단을 만드는 게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단 말이지. 그런데, 백휘에 가서 기술을 배워올 젊은이들이 필요한데 말이야. 혹시 추천해줄 이가 있나?"


그 말을 들은 박성현의 시선이 순간 율을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뿐이었다. 성현은 금방 율에게서 눈을 돌렸다.


"아쉽게도 제자는 없습니다. 안타깝게 되었네요. 이 마을에 장인은 많으니 다른 이들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 말을 듣자 율이 오히려 발끈했다. 요즘 활자를 만들지 않는다 해도 자신은 나름 유망주였던 이다. 조금만 열심히 한다면 다시 예전의 실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무시된다는 것은 참기 힘든 처사였다.


"없긴 왜 없어요? 여기 이렇게 당신 아들이 있는데? 성찬 아저씨, 절 데려가 주세요."


율이 말을 꺼내자마자 성현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넌 안 돼. 백휘는 위험하다. 게다가 네 실력도 아직은 그 정도 수준이 안 되고 말이야."


박성현은 딱 잘라 거절했다. 사실 율도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백휘는 고작 반 년 전만 하더라도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싸우던 나라였다.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 걱정스러운 심정이 율을 더 답답하게 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취급만 하고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렇기에 율은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저는 진짜 잘할 자신 있어요. 데려가 주세요."


율과 성현이 신경전을 벌이는 탓에 가운데에 낀 찬성만 입장이 난처해졌다. 고민하는 찬성에게 성현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이러시면 안되는거 아시잖습니까. 그때의 약속을 어기실 셈이십니까?"


그 말을 듣자 이찬성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율을 타일렀다.


"어쩔 수 없구나, 거기는 그렇게 충동적인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야. 다음번에 자리를 알아봐 줄테니 참거라."


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떼를 써 보았자 자신만 어린아이 취급당할 것이라는 걸 안 탓이었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책방으로 향했다.


이찬성은 생떼를 쓰지 않는 율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율을 어릴 때부터 보아온 박성현은 알고 있었다.


저 아이는 한번 목표한 것은 놓지 않았다. 그런 집념은 큰 허점임과 동시에 하나의 장점이었다. 아마 지금도 따라갈 방법을 필사적으로 궁리하고 있을 터였다. 율은 그런 아이였다.



댓글5

    • 상호 : (주)하이브로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432 준앤빌딩 4층 (135-280)
    • 대표 : 원세연
    • 사업자번호 : 120-87-89784
    • 통신판매업신고 : 강남-03212호
    • Email : support@highbrow.com

    Copyright © highbrow,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