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어딘가에 위치한 행성 NE-037. 이곳의 하루는 34시간이다.
그 탓에 거주민들이 견뎌야 할 뜨거운 낮은 보통의 하루보다 길다.
그것보다도 그들을 힘겹게 하는 것은 이 무덥고 힘겨운 삶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함이다.
그들을 품어주던 아름다웠던 모성 지구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욕심에 의해 부서지고 망가져 있었다. 새삼 누구 탓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도 없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이런 건조한 현실이 코앞에 다가와 있을 거라고는 알지 못했으니까.
지난 일을 한탄해서 무엇 하겠는가. 남겨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판결이 아니라 당장 발을 붙일 땅이었다. 성공적으로 테라포밍이 완료된 행성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 역시 수두룩했다.
물론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화폐였다. 사회는 모두 뿔뿔이 흩어진 와중에 데이터 쪼가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우려를 비웃듯 멀쩡하게 돌아갔다.
지구가 멸망한 이후에서 지구인의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많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있었고, 아름다운 초원을 밟는 이가 있는가 하면 황폐한 황무지를 밟아야 할 이들 역시 있었다.
제이든도 그렇게 쫓기듯 지구를 떠난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사실 그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온 편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갑부인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나름 괜찮은 가족이었다.
제이든은 자신이 소위 '네임드 플래닛' 이라고 부르는 이름이 부여된 고급 행성에 갈 자격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착각했었다.
제이든이 척박하고 무더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악연의 연속이었다. 사들인 지구 관련 사업 주식이 망했고, 지구 수호를 외치는 폭도들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원래는 더 살만한 곳으로 갈 수 있었지만 소규모 테러로 인한 전산 오류로 제이든은 37번째 뉴 어스 후보에 떨어지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여동생도 함께였다.
제이든은 자신이 더럽게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만 따라 주었다면 자신이 이런 곳에 쳐박힐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든의 생각이 어쨌던 그는 17시간동안 이어질 뙤약볕 속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벌써 이틀째 감기에 시달리고 있는 여동생을 위해 약을 사 가야 했다.
비록 눈여겨보던 반자동 스케이트보드를 위해 삼 년을 모으던 저금통을 깼다고 하더라도, 그는 완전히 좌절해 있지는 않았다.
나쁜 일이 찾아 왔다면 언젠가는 좋은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건 세상의 법칙이었다. 제이든은 찾아올 행복을 확실히 거머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이든은 누군가가 던졌을, 뒤쪽에서 자신을 지나쳐 간 돌멩이를 보고 그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돌멩이는 제이든을 지나쳐 날아가 약국의 창문을 때렸다.
이런 일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누구던지 이 삭막한 행성에서 따가운 햇볕을 맞으먀 몇 시간을 있다 보면 성격이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쌓인 불만들은 이따금씩 폭력의 형태로 터지고는 했다.
비록 그 때와 장소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저 작은 우연이었다.
제이든은 금이 간 창을 흘깃 바라보며 약국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약국 안은 바깥의 풍경과는 이질적으로 하얀 빛을 띄고 있었고 깔끔했다.
보편적으로 본다면 더럽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거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름답다 못해 신성하게까지 여겨지는 영역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주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온 제이든을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겨눴다. 조잡해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총이었다.
제이든은 반사적으로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다들 예민한 세상이지만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총부터 겨눌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아저씨. 아무리 우리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지만 총부리부터 들이대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녜요? 그리고 개인이 화기 소지하는 건 불법일 텐데."
주인은 제이든을 위아래로 훑어 보고는 겨누었던 총을 내렸다.
"방금 돌 던진 놈은 아니었군. 거 미안하게 됐다. 내 새총이 워낙 강력하게 생겨서 말이지."
새총 치고는 과하게 험악하게 생긴 무기였지만 제이든은 넘어가기로 했다. 저 무기의 성능을 스스로의 몸으로 테스트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시비를 거는 대신 테이블에 가지고 온 돈을 내려놓았다.
"감기약 하나만 주세요. 이왕이면 제일 정상적인 걸로."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감기약이 어디 있냐, 여기가 네임드 플래닛도 아니고."
"뭐야, 약국인데 감기약도 없어요? 아니 애초에 네임드 플래닛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구비해 두지 않아요?"
제이든의 말에 주인은 제이든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는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모르고 있었어? 요 며칠 새에 커뮤니티에서 물자 구입이 활발해지더군. 아마 뭔가 커다란 걸 준비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 재고를 품 속에만 아껴 넣어 두는 건 천하의 바보지."
"뭐, 그 인간들끼리 이제 와서 전쟁이라도 낸대요? 안 그래도 풍족한 인간들이 무에 쓸 데가 있다고."
제이든의 말을 들은 주인은 화들짝 놀라며 제이든의 어깨를 잡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목소리 낮춰 임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뭐야, 진짜 전쟁이 일어나는 거에요? 난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저 그렇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는 것 뿐이야. 쇠와 금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을 보면 마냥 없는 말도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물론 네임드 플래닛끼리의 전쟁은 외딴 행성에 사는 그에게는 전혀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넓고 조용한 우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인간들끼리 치고 받고 싸워 봤자 작은 해프닝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먼 행성의 전쟁은 약국 주인 같은 장사치에게만 재미있는 가십거리로 소비될 뿐이었다.
"물론 너 같은 꼬맹이는 전쟁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도 잘 모르겠지. 전쟁이란 건 정말 끔찍한 비극이지! 물론 내 입장에서는 돈이 되는 이벤트이지만. 아주 옛날에 네임드 플래닛끼리 우주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야..."
제이든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척 보아하니 그 역시도 전쟁이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인 듯 했다. 보나마나 할아버지의 친구 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제이든은 그 영양가 없는 수다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을 둘러 보았다.
감기약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 분명했다. 아무리 약을 사들인다고 해도 당장 본인이 쓸 것마저 구비해두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히 가게 어딘가에는 숨겨둔 매물이 있을 것이었다.
"하하, 그러니까 할아버지... 아니 내 옆으로 광선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말이지.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난... 응? 뭐 하는 거야?"
그는 신나서 수다를 늘어놓다가 제이든의 시선이 이곳저곳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 꼬맹이 녀석. 약이 필요했던 거로군.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그까이꺼 팔아 주도록 하지."
그 말에 제이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주인은 테이블에 있는 돈을 챙겨 커튼으로 가려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커튼에서는 반짝 빛나는 철로 된 원통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제이든에게 총구를 겨누고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수다 들어 줘서 고맙다 꼬맹아, 받은 돈은 네 목숨값으로 치자. 이제 나도 이 지긋지긋한 행성을 떠날 참이거든. 가진 거 다 내려놔."
아까의 조잡한 총과는 다른 확실한 화기였다. 이번엔 제이든도 여유롭게 농담 따먹기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이든은 양손을 치켜들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마!"
주인은 돌연 호통을 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쇠 총알은 가게 천장을 때리며 기분 나쁜 파열음을 냈다. 이쯤 되니 제이든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주인이 바라보는 앞에서 제이든은 가진 옷과 가방을 내려놓았다. 비로소 제이든이 소유한 게 입고 있는 바지 하나가 되고 주인이 총구를 휘저으며 나가도 좋다는 표시를 했을 때가 되어서야 제이든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가게를 나갈 수 있었다.
왜 그는 자신을 공격한 것일까, 스스로의 물음에 제이든은 너무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가 곧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다. NE-37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강도질이 일어나는 곳이었고, 이주와 입주가 잦은 행성이었다. 제이든은 끔찍하게 운이 나쁜 나머지 그 강도짓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제이든은 자신이 신분증 칩을 가방 속에 빼 두었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빠른 결제를 위해 미리 빼 둔 것이었지만 주인에게 협박당할 때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물론 약국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게 없다면 제이든은 평생 행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망할 행성의 공무원이라는 작자들은 끔찍하게도 게을러서, 칩을 발급받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미지수였다.
뙤약볕 아래서 맨몸으로 거리를 걸으며 제이든은, 평생 지켜온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의심해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