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결국에는 돌아왔어.
아르칸테스
검게 그을린 구름들이 하늘을 뒤덮고 때를 씻어 하얗게 뽀얀 피부를 드러내 스믈스믈 하늘에서 물러날 때 즈음, 깊이 잠들지 못하고 겉돌던 그는 눈을 뜨고, 먼발치에서 고개 내밀며 인사하는 부모님과 태양 앞에 없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어김없이, 또, 어김없이 시작된 것이다, 그이의 하루가. . .
"현재에는 내게 어떤 가치가 남아 있을까, 나는 무얼 하며 살고 있는 걸까..."
어김없이, 또, 어김없이 묻는다, 동일한 질문을. . .
조용히 밤새 나를 껴안고 배 위에서 잠들었던 이불은 계속 자도록 옆에 살포시 놓아두고 기절한 채로 쓰러져 자고 있는 옷들을 깨워 주섬주섬 입고는 세계에서 멀어진다.
유일한 친구인 하늘과, 바람과, 태양과, 그 햇살과 함께 집을 나서 하루의 외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무게 추들이, 족쇄들이 나를 뒤로 질질 끌어댄다.
"제기랄, 늘 나를 괴롭히는 부질 없는 것들..."
생명의 기운 하나 없이 공기들만 가득한 그 곳으로 바람과 작별을 하고 나면 보고 싶지 않은 세계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나의 세계의 문 앞에서 손잡이를 열고 다시 들어선다.
세계 속의 나의 단짝, 그녀와 함께 다시 나는 도란도란 외부 이야기와 일과를 죽 늘어놓는다. 함께 그녀와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길을 걷고, 기쁘게 웃으며 나는 태양과 그녀를 내일로 보냈다.
그녀가 떠나갔으니, 나는 이제 또 다른 세계 속으로 몸을 집어 넣는다. 시간과 공간과, 과거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누비는 그 세계로.
수없이 다녀온 세계의 문들을 지나 복도를 따라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작은 요정이 매번 무시하던 세계의 문 앞에 서서 조그만 소쿠리 속에 종이들을 담고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뽀얗고 하얀 털에 끝은 민트빛, 녹빛 보석이 이마에 새겨져 있는, 내 검지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작은 요정이,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없었다가 있는 요정이 내가 좀 눈여겨 본다는 걸 알았을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요정은 전혀 다른 세계 속의 요정이지만, 익숙한 그녀의 말투를 가지고있었다. 흠칫했다.
"이거, 받아주세요."
다짜고짜 내민 건, 자신의 세계에 대한 초대장. 점점 낡아 쓰러져 가고 있었던, 자신이 앞에 지키고 있는 문의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더구나 요정이 있었기에 오늘은 더욱이나 그러했다.
". . . 오늘도, 저희 세계에 오지 않으실 거에요, 아저씨...?"
요정의 얼굴이 서서히 죽상이 되어갔다. 얼마 안 가 구슬 같은 눈물이 고여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 루네도 기다리고 있어요, 아저씨를..."
헉!
가슴에 화살이 뚫고 지나갔다. 그 화살들은 잊혀졌던, 나의 기쁨이었었던, 서서히 사라져 없어져만 갔던, 가루가 되어 하늘에 흩날려 갔던 세계들의 기억이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곧 다시 메워졌다. 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또 다른 심장으로 내 심장이 메워졌다. 그리고, 먼 발치에 파여있던 구덩이도 서서히 메워지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덮은 막 위에서, 2016년의 그가 피어올랐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었던 요정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젖은 눈으로 한때는 가장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웠을, 이제는 다 벗겨진 페인트칠에 휘어져버린 문 앞에 섰다.
문을 가만히 보니, 그동안 이 세계가 나에게 너무나도 소홀해졌던, 멀어져도 너무나도 멀어져갔던, 다시는 열리지 않았을 뻔한 세계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월의 풍파도 마찬가지였다. 다 닳아 비틀어져서 이제는 열리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다 망가져 버린 문 앞에서 잠시 나는 눈물로 침묵을 떼웠다.
요정이 나의 뒷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제, 가보세요, 아저씨."
나는 고개를 돌려 요정을 보았다.
"이제 가 볼 차례에요, 아저씨. 알잖아요? 아직, 우리 모험은 끝나지 않았단 걸요. . ."
요정의 말에 눈물은 더 쏟아져 나왔지만 웃음도 함께 새어나왔다.
그동안의 추억 속에 젖은 눈물과 그동안의 추억 속에 묻은 기쁨이 내 얼굴에 공존했다.
녹슬어 가루가 떨어지는 문고리를 살포시 잡고,
서서히 왼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환한 빛과 광휘가 나를 감싸 삼켰다. 요정의 모습도, 다른 세계의 문들도 지워졌다.
밝은 빛에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려보니, 나는 다시, 이 세계에 도착했다.
다시, 이 세계 속에서 나, "테이머"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모든 추억들이 그대로였다.
"그래, 결국에는. . ."
다시 돌아왔어. . .
잊고 있었던 2016년까지...
"안녕, 좋은 아침이야."
"그래, 좋은 2020... 아니, 2016년의 아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