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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확! 시야를 가리는 터져 나온 피, 내 손에 꿰뚫려 있는 하얀 배. 또다시 들려오는 살기 가득한 외침.
"다크닉스... 네놈이 감히이!!"
"아아... 왔냐?"
이번엔 조금 먼저 시작했다. 내가... 하얀 드래곤의 배를 꿰뚫었어...? 대답한 공허한 목소리는 계속 말했다. 아, 그리고 조금 늦게 끝날 모양이다.
"너는... 알고 있었나?"
다시 정신이 흐려진다. 흐릿해지는 시야에는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검은 용과 하얀 용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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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같은 붉은 눈이 다시 나를 응시했다. 이미 한번 겪은 일이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일어났다. 하지만 흥건히 베어난 땀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그냥 개꿈인가, 아님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예지몽인 건가. 나는 어느새 생각하느라 가늘어진 눈을 뜨고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먼저 일어났네? 식탁으로 가보자 고신은 없었고 반대편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숨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무슨 일로 늦잠이신가. 아 맞다, 오늘 마이아랑 만나기로 했었지? 나는 마이아와의 약속을 기억해 내고 서둘러 배와 사과를 집어먹은 후에 식탁 위에 쪽지를 남겼다. '마이아랑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간다. 아침 맛있게 먹어.' 이 정도면 되겠지. 노란 메모지에 쓴 쪽지를 식탁에 남긴 나는 빠르게 마을로 날아갔다. 분수대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먼저 온 건가? 잠시만... 이 소리는... 내 뒤에서 내게 살금살금 걸어오는 마이아의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마이아의 장난을 역이용하려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3... 2... 1... 지금! 마이아는 내게 뒤에서 안기려 했고 나는 한발 왼쪽으로 피했다.
"다크닉... 스으으으? 어어?!"
마이아는 내가 피해버리자 앞으로 쓰러졌고 나는 그런 그녀를 쓰러지기 전 왼팔로 안았다. 놀람과 설렘으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청력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크큭."
"히잉... 그래도 오늘은 거의 성공했는데... 근데... 이것 좀 놔줘..."
그제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지난번 그 ㅋ... 키읔시옷으로 한번 엄청난 소문이 퍼졌는데 이러면 위험해... 큼.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파견이네..."
"응... 근데 드디어라니? 다크닉스는 파견을 기다리고 있던 거야? 나는 다크닉스랑 떨어져서 슬픈... 아니 아쉬운데!!"
"나도 마이아랑 떨어져서 진짜 슬프... 아니 아니 아쉬워어!!"
나도 얘처럼 속마음을 말해버린 건가... 왜! 마이아랑! 있으면! 입단속이! 안! 돼냔! 말이다! 우리 둘은 이렇게 다시 얼굴을 붉혔고 이번엔 마이아가 다시 파견 얘기로 말을 꺼냈다.
"내 담당 분야는 아니어서 잘은 모르는데 그래도 워낙 큰 건이다 보니 나한테도 조금씩 얘기가 들려왔어. 듣기로는 다크닉스가 메탈 타워, 고대신룡이 엘리시움이라던데 맞아?"
"응응, 맞아 맞아. 가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리겠지... 하아..."
"한 달이면... 진짜 기네... 그럼 우리 빨리 이 귀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자! 가자 다크닉스!"
우리 둘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기운차게 외친 마이아를 따라서 마을을 누비기 시작했다. 예전과 똑같이 활쏘기, 커다란 상점에서 물건 구경하기 등등. 우리 둘도 많이 바뀌었구나... 그때의 우리는 청소년기의 시작이라면 지금의 우리는 청소년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활쏘기 실력은 바뀌지 않았는지 나는 여전히 1등 상을 따냈고 이번에 마이아는 곰인형 대신 고양이 머리띠 두 개를 골랐다. 저건 왜 고른 거지? 아... 설마 아니겠지...
"자! 우리 하나씩 나눠 쓰자!"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지... 마이아는 노란 고양이 머리띠를 쓰고 내게 검은 고양이 머리띠를 내밀었다. 거절... 하기보단 오늘 뒤면 한 달 동안 못 보는데... 에라,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쓰지 뭐.
"으으...! 이런 걸 왜 하라고 하는 건지... 맘에 들어?"
나는 머리띠를 천천히 쓰고 마이아에게 물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입을 막고 나를 보던 마이아가 대답했다.
"허억... 너무 잘 어울린다... 진짜 한 마리에 검은 고양이 같애! 완전 귀여워!"
귀여움은 내게 사막에 참나무같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막에도 참나무가 자랄 수 있으려나... 하지만 내게 귀엽다 하는 마이아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모르는 듯했다. 빛나는 금빛 머리에 잘 어울리는 노란색 고양이 귀는 마치 쓰다듬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ㄷ... 못 참겠어! 나는 마이아의 머리를 내 몸을 흔드는 떨림을 억제한 채로 쓰다듬었다.
"헤에? 다크닉스 고양이 좋아하나 보다... 나도 고양이 좋아하는데... 헷."
아... 이 매력... 아니 음... 귀여움 덩어리를 한 달 동안 못 본다니... 하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파견을 가기 싫어졌다. 뭐 다른 대륙의 탐험과 교류가 중요하다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이아는 주위를 둘러보다 우리가 지난번에 갔던 점술집을 발견했다. 저긴... 우리 둘이 헤어지라고 했던...
"다크닉스! 우리 저기 한번 가보자! 어디 이번에는 뭐라 하는지 보자고!"
마이아는 이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뭐, 궁금하긴 하네. 두꺼운 천을 들추고 점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향과 무거운 공기가 우릴 반겼다. 지난번처럼 그 할머니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이아가 점술가에게 질문을 했다.
"할머니, 저희 기억하세요? 지난번에 헤어지라고 하셨던..."
"당연히 기억하지. 너희 같은 악연은 본 적이 없어. 무슨 말을 들으러 왔던, 내가 할 말은 같다. 이미 늦었...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두 번은 없어."
점술가 할머니는 마이아의 말을 자르고 느릿하게, 그리고 또 빠르게 말을 마쳤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뭐에 마지막이라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 둘이 악연이라는 거야? 아, 그 꿈 얘기를 꺼내볼까. 내가 말을 할까 말까 머뭇댈 때 마이아는 몸을 돌려 나가려 하였고 그 순간에 점술가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한 번은 우연, 두 번도 우연. 세 번부터는 필연 아니면 악연이다.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 하나만 해. 기회는 항상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지... 쯔쯧..."
어? 설마... 이거 내 꿈 얘긴가? 한 번은 우연, 두 번까지도 필연. 그리고... 세 번부터는 필연이라... 어느새 내 눈빛은 다시 날카로워졌고 점술가 할머니는 생각에 빠진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이아를 더는 할 말이 없다며 내보냈다. 오늘 밤이 고비인가? 악연일지, 필연일지. 아니면 그냥 개꿈 일지. 나는 한동안 생각에 빠져있었고 그런 내 눈앞에 갑자기 마이아의 손이 보였다. 으에?
"다크닉스!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았어! 우리 계속 놀자!"
역시... 해맑다니까. 이런 게 마이아스럽다는 건가... 풋.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고 마이아는 그런 나를 보고 같이 웃었다. 그래, 이렇게 아까운 시간을 그냥 보낼 순 없지. 그렇게 우리 둘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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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악연도 저런 악연이 없다... 하늘에 두 개의 반달이 떠있으니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희구나. 녹색 별에 의해 거대한 태양이 빛을 잃으니 그 빛을 받아 빛나던 검은 달은 어찌할꼬. 빛나는 해가 져버리니 검은 달과 주위에서 빛나던 수많은 별도 함께 져버리네. 오직 칠흑만이 남은 밤하늘, 하얀 반달만 어슴푸레 빛나네."
다크닉스와 마이아가 나간 후 점술집에서는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과연 중요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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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오늘 진짜 재밌었다. 나는 동굴로 돌아와서 바로 드러누웠다. 내일 파견에 필요한 건 다 챙겼고... 이제 필요한 건 몸뚱아리와 각오뿐이네. 뭐, 위험하진 않겠지. 전부 어머니의 피조물인데.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많이 바뀌었네... 몇 년 전만 해도... 하. 그때는 진짜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모두 마이아 덕분이야. 그러고보니 오늘도 그 꿈을 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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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나와 고신은 짐을 챙겨서 날아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한 목소리가 내 날개를 멈추게 했다. 이 목소리는... 마이아?
"하아, 하아, 하아... 다행이다... 아직 안 갔구나... 가기 전에 할 말이 있어서... 원래 어제 하려고 했는데 너무 재밌게 놀아서 잊어버렸어..."
"음? 나도 마찬가진데... 너 먼저 말해."
"그... 다녀오면 여기보다 더 근사한 곳에서 할 마아니 중요한 말이 있다고..."
"그 부분도 나랑 마찬가지네. 한 달 후에 보자! 잘 지내! 몸조심하고!"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밑으로 내려보진 않았다. 그 붉어진 얼굴을 다시 보면 붉어지려 하는 내 얼굴을 감출 수 없을까 봐. 한 달... 딱 한 달이다... 옆에선 고신이 빠르게 날아가며 외쳤다.
"아주 영화를 찍어요! 뭐, 보기는 좋네! 한 달 후에 보자 형! 괜히 가서 전쟁 일으키지 말고!"
"시끄러워! 너나 가서 불화 만들고 오지 마라! 몸성히 다시 만나자!"
우리는 이 말을 끝으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고신은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한달 후면 뭐가 바뀌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돌려도 어젯밤 꾼 꿈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이 터져 나오는 피, 살기 가득한 외침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이어졌다.
"ㅁ... 뭘 말이야?"
"너는 알고 있었냐는 말이다!"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이지... 좋은 징조는 아닌데... 조심하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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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팜파오입니다! 이제 슬슬 클라미맥스로 치닫는군요... 이번화에는 엄청난 떡밥이 있으니 잘 보시면 다음 몇화의 내용을 예측하실 수 있을 거에요! 오랜만에 업로드해서 죄송합니다...ㅠ 그리고 예전에 제가 썼던 점술집의 유리아는 제 실수입니다. 유리아가 아니라 점술집 할머니에요. 그 부분도 죄송해요ㅠㅠㅠㅠㅠ 오늘도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