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룡 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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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아... 춥다 추워... 응? 이게 ㅁ... 으악! 아... 아이? 대감마님! 여기 대문 앞에 웬 아이가 있어요! "
" 아침부터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
난 서둘러 에메랄드에게 다가갔고 역시나 대문 앞에는 추위와 피로 때문에 쓰러진 듯한 한 소년이 눈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해서 쓰러져있었다. 머리카락이 적색이라는 것은... 역시나겠지. 에메랄드와 한번 눈을 마주친 난 그 아이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둘러업어 아랫목에 눕혔다.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 난 살며시 방을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자 고주와 엔주가 초조히 서성이며 나를 묻는듯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녀석들 참...
" 괜찮다. 심한 상처나 병은 없는 것 같다만... 추위와 피로로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곧 깨어날 것 같구나. "
그제야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참으로 착한 아이들이란 말이지... 난 이렇게 생각하며 둘의 곁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 저 아이... 저 아이도 우리처럼 용인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사연이 뻔하지 않겠니. 아마 부모가 없거나 도저히 살아갈 수 없어서 어디서 소룡 서당의 풍문을 듣고 여기까지 왔겠지... "
" 아버지... 저 아이가 불쌍해요... "
" 저도요... "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몸이 다 나을 때까진 여기서 지낸다 해도... 그다음부터는 다시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아니면 역시... 서당에서 지내게 해야 하나... 부인, 당신이라면 나와 같은 선택을 했겠소...? 한 명 정도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겠지... 난 이렇게 생각을 마치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그 마음이 참으로 곱구나 얘들아... 혹, 저 아이를 앞으로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면 어떻겠니? "
" 전 좋아요! "
왕족이지만 지금은 웬만한 양반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깊은 산속에 겨우 숨어 살며 우리처럼 숨어 사는 용들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이런 생활이 힘들 법도 한데 바로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고주는 내게 옅은 미소를 짓게 했다. 하지만 딱 잘라 말하는 엔주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 전 싫습니다. 이미 오라버니 하나로도 충분히 힘들어요. "
" 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
" 그래도 얼굴이나 한번 보고 말하지 그러느냐... 선한 아이 같던데... "
그러자 엔주는 알겠다고 하고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아이고... 저 애의 고집을 어찌 꺾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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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오빠 하나도 이미 충분히 싫은데 뭘 또 한 명을 더하려고... 난 이렇게 생각하며 창호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열어 방에 들어섰다. 붉은 치마를 조금 들어 올린 난 까치발로 조심스레 오라버니가 아닌 다른 사람, 아니 용이 누워있는 오라버니의 이부자리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제야 제대로 숨을 내쉰 난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를 덮는 붉은 머리카락, 아직 감겨있어서 눈동자 색은 알 수 없지만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코와 자세히 보니 보이는 머리 위에 솟아난 작은 검붉은 뿔. ㅇ... 이게 무엇이더냐... 천상 미남이도다... 가슴은 갑자기 왜 이렇게 뛰는... 어? 내가 갑자기 두근거리는 가슴과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할 때 감겨있던 눈이 스르륵 뜨였다. 싱그러운 나뭇잎처럼 빛나는 연두색 눈동자... 아름답구나. 말이 안 나와서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이 미소년은 눈을 깜박이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 으으... 여기가... 어디ㅈ... 헉. "
" ㄴ... 놀라지 말거라. 여긴 소룡 서당이다. 몸은 괜찮으냐? "
난 이렇게 말하고 허둥대며 시선을 돌렸다. 으으... 왜 이렇게 부끄럽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살짝 시선을 올렸고 나를 그 연두색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던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다시 시선을 돌리곤 물었다.
" 이, 이제 말해보거라. 네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
" 소인은... "
그리고 첫마디가 나오자마자 창호문이 조용히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어머나, 조금 놀랐는지 눈 커지는 것 좀 보게나. 아주 그냥... 귀여워 죽겠어. 아버지는 소년이 깨어난 걸 보시곤 서둘러 머리맡에 앉으시며 말을 시작하셨다.
" 그래, 깨어났구나. 몸은 좀 어떠니? "
"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
아버지가 계속 그 소년에게 말하는 동안 난 다소곳이 앉아서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요조숙녀처럼 보여야 하느니라... 자고로 남녀관계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하였으니...
" 몸이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내 보아하니, 집도 절도 없고 부모까지 어린 나이에 여의어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느냐...? "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물으셨고 그러자 그 소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고... 참으로 딱하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물으셨다.
" 엔주야, 아까 한 말, 다시 생각해보지 않... "
" 전 좋사옵니다. "
난 아버지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 요염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놀라신 듯 나를 잠시 바라보시다 다시 소년에게 눈을 돌리고 물으셨다. 됐다! 됐어!
" 그렇다면... 혹 너만 괜찮다면 이 소룡 서당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느냐? 방이 넉넉하진 않지만, 고주와 엔주의 방에서 같이 지내면 괜찮을 것이다. 어떠냐? "
그러자 소년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내가 놀라서 고개를 들 때 아버지도 놀란 목소리로 물으셨다.
" 왜, 왜 그러느냐. 혹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
" 그것이... 그것이 아니옵니다... 기뻐서... 너무 기뻐서 우는 것입니다... "
하아... 다행이구나.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버지도 호탕하게 웃으시며 그럼 되었다 하셨다. 이 날이, 데빌이가 우리 가족에 오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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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암... 간밤에 한숨도 못 잤더니 졸리네... "
이른 아침, 난 먼저 일어나 희미하게 빛나는 부뚜막에 장작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데빌이와 같은 방에 있는데 잠이 올 리가... 난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비볐다. 오늘은... 된장국을 끓일까. 하품을 하고 생각을 마친 난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 흐아암... 무슨 요리를 해야 입에 맞으실... 아씨? "
" 히익! ㄷ... 데빌아? 여긴 무슨 일로... "
난 갑자기 내게 다가오는 데빌이에게 놀라서 되물었고 데빌이도 적잖게 놀랐는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있었다.
" 그... 요리를... 하려고... "
" 푸핫!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구나. 이 집에서 요리는 내가 하고 있다. 앞으론 같이 하면 되겠구나. "
매일 아침마다 같이 요리를 한다고? 그리 하면 극락이 따로 없을 터인데...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데빌이는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곤 내 곁으로 총총 다가왔다. 흐으으... 귀엽도다... 심히 귀엽도다...
" 그럼 전 무얼 하면 될까요 아씨? "
"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된ㄷ... 아니 아니 저기 저 두부 좀 썰어주려무나. "
또다시 총총 도마 앞으로 걸어가 두부를 써는 데빌이의 모습은 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했다. 보글보글, 서걱서걱, 탁탁탁탁. 좁은 부엌은 잠시 동안 아침이 완성되어가는 소리로만 가득 찼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데빌이가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설렘으로 가득 채웠다. 밥을 안치고 국을 저으며 데빌이를 흘끗흘끗 바라보는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이상했다. 뒷모습은 또 어찌 저리 듬직하고 손은 또 어찌 저리 고운지... 내가 넋을 놓고 데빌이를 바라볼 때 데빌이는 두부를 다 썰었는지 도마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부엌이 워낙 좁아 자리가 마땅치 않자 데빌이는 내게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씨. "
데빌이는 이렇게 말하곤 마치 나를 품에 안듯이 내 뒤에 서서 도마에 있는 두부를 국에 털어 넣었다. 힉! 으으... 부끄러워... 데빌이가 두부를 털어 넣는 그 잠시 동안 내 귓가에 닿는 데빌이의 숨소리는 날 너무나도 설레게 하였다. 어느새 달아오른 내 귀가 데빌이에게 들킬까 노심초사하던 난 데빌이가 뒤로 물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딘가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난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어찌어찌 요리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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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곳은 서자가 올 곳이 아니야! "
" 맞아! "
근 며칠째 서당에 나왔지만 가문도, 부모도 밝히지 않자 이 애들은 날 서자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문이 없고, 부모도 없는 건 사실이지만... 서자라. 분했지만 훈장님에게 누가 되지 않게 꾹 참아왔는데... 이건 무슨 일이지?
" 서자라니 이 무슨 말이더냐? 내게 오라버니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있으면... "
" 아씨, 그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
난 이렇게 말하고 조금은 놀란듯한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아씨의 손목을 잡고 뒤로 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아!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뭘 하는지 깨달은 난 순간 화들짝 놀라며 아씨의 손목을 놓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 하, 너네 뭐하냐? 뭐? 오라버니와 다를 바 없어? 어디서 주워온 애를 가지고 껴돌아! 너도 결국은... "
" 다물라. "
누구의 목소리 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마음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이 아니라 아씨를 향한 그 소리에 난 눈을 감고 나직이 말했다. 누군지 보이면 바로 그 면상을 찢어 갈기고 싶어질 터이니. 내 목소리에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 난 뒤에서 내 옷자락을 꼭 붙잡는 아씨의 손길을 느끼고 조금 떨리는 아씨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 떨리는 손이 너무나 가녀려 보였기에.
" 다물라 하였느냐? 하, 다시 말해ㅂ... "
" 그 입, 다물라 하였다. 아X리를 찢어놔야 다물겠느냐? "
화악! 공기가 대장간처럼 달궈지며 뜨거운 불이 내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하자 앞으로 맹렬히 뿜어져 나오며 퍼졌다. 내 기세와 그 불길에 놀란 듯한 아이들은 추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결국 도망가버렸다. 그제야 눈에서 힘을 풀고 내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아씨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 후우... 아, 정말 송구하옵니다 아씨... 뭐라 할 말이 없... "
" 괜찮으냐? "
나 때문에 이런 상황에 말려든 것에 대한 송구스러움으로 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만 아씨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내 고개를 들어 올리시며 물으셨다. 마주 보는 어여쁜 붉은 눈동자에서 볼 수 있는 그 애정과 걱정이 담긴 눈빛에 난 하마터면 눈물을 흘려버릴 뻔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씨와... 아씨와 더 가까워지면 안 되는데... 그러면 결국... 나만 다칠 터인데... 자꾸만 끌려가는 이 마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뿌리쳐야 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이 손을 난 어찌해야 하나... 깊어져만 가는 고민과 원망, 그리고 슬픔을 모두 지운 난 해맑은 웃음으로 모든 걸 덮으며 대답하고 아씨에겐 들리지 않게 작게 덧붙였다.
" 괜찮사옵니다! 아씨가 제 곁에 계시니... "
하지만 아무리 지우고 덮어도, 매일 아침 부엌에서 고운 아씨와 손이 닿을 때마다,
' 손이 어쩜 이리 크고 고운 것이냐. 내 손은... 흣! '
매일매일 서당에서 해맑은 아씨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 하아... 지루ㅎ... 앗... 헤헤... '
그리고 집에서 해맑은 아씨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 고름이 조금 길구나. 이리 와 보거라. 내가 다듬어주마. '
그리고 사모하는 아씨와 같이 있을 때마다, 아씨를 향한 내 마음은 부풀었고, 그만큼 내 한숨도 많아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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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서당 생활도,
" 흠... 아무도 없구나. 자, 앉거라. "
" 아씨,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훈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 "
" 왜 그러느냐? 여긴 우리 둘 뿐이 없으니,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혹, 이런 게, 싫은 것이냐? "
" 그... 그래도... 읏... 아씨... 너무... 너무 가깝습니다만... "
내게는 과분했고, 또 설렜지만 그런 마음을 숨겨야 했던 호위 무사로써의 시간들도,
" 아씨, 어찌 아직 부족한 저를 호위 무사로 삼으신 겁니까? 저보다 강하고 이 일에 더 맞는 자가 널렸는ㄷ... "
" 네가 강해서 호위 무사로 삼은 것이 아니다. 너,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내 곁에 있었던 너이기 때문에 호위 무사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넌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니,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다. "
" 아... 아씨... 네, 목숨 바쳐 호위하겠습니다! "
" 아니 목숨까진 바치진 말거라! 그러면 혼인은 누구랑 하라는 건지... "
" 네? 방금 무어라... "
" 아니다. 가자꾸나. "
그리고 지상에 나락이 강림한다면 이런 곳일까 싶은 전장도,
" 몸은... 좀 괜찮으냐...? "
"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그, 그래도... 하아... 왜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지... 왜 죄 없는 사람들이 왕족을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던져야 하는지...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아버님과 오라버니는 얼마나 힘드실지... "
" ... 왕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자식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그들의 의지가 이 전장을 지탱하고, 전세를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씨가 너무 아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 그런... 것이더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 그것을 위한 자들의 의지... 그러면 너는 뭘 위해 싸우는 것이냐? 너도 널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날 지키고, 적들을 베어 넘기고, 피로 젖은 몸을 닦는 것이더냐? "
" 아닙니다. 전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아씨를 지키고, 적들을 베어 넘기고, 피로 젖은 몸을 닦습니다. "
" 그게 무엇인지 물어도 넌 답하지 않겠지... 언제부터인지, 넌 날 네게 조금도 가까이 가게 두지 않는구나. "
" 정녕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씨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행동, 제가 내쉬는 모든 숨결, 제가 느끼는 모든 감정,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생각에 아씨가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아씨를 밀어낸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단지 저를 위한 것만이 아닌, 아씨를 위한 것이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쪼록 평안하시길. "
" 데빌아... "
아씨만을 생각하며 행복했고, 아씨만을 바라보며 보냈고, 아씨만을 지키며 견뎌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은 그동안 잘 견뎠다는 듯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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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아니 용의 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의미 있는 날 중 하나를 기념하는 축제 중 하나, 성년식. 거대하고, 화려하고, 거창한 성년식을 아씨는 당당히 한가운데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난 먼발치에서 지켜보다 또 옆에서 호위하며, 그렇게 우리 둘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듯 마음껏 즐겼다. 길었던 성년식이 끝나자 아씨,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아씨가 아니신 공주 전하는 화려한 붉은 비단 치마를 끌고 인적이 드문 숲 속의 누각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항상 공주 전하를 곁에서 보좌하며 말벗이 되고, 슬플 때면 버팀목이 되어주던 나도 당연히 뒤를 따랐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누각 위, 황금빛 태양이 붉어질 무렵,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의 가락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나를 손짓하여 부르신 아씨의 한마디는, 내가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 ㄱ... 공주 전하, 방금 뭐라고... 소인이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
" 사모한다 하였다. 내가 너를, 아주 많이. "
아리따운 모습에 넋을 잃지 않도록 매일 스스로를 다잡았고, 고운 마음씨에 내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매일 자기 자신을 가다듬었고, 그 미소, 그 따스하고도 눈부신 그 미소에 약해지지 않도록 매일 마음을 더 모질게 먹었다. 사모해서 밀어냈고, 연모해서 매몰차게 대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하는 전하의 눈빛을 보니, 그 모든 것들은 전하에겐 그저 의미 없는 상처일 뿐이었나 보구나. 아아,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아씨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내가 아무리 매몰차게 대해도 아씨는 내게 한결같은 미소를 보여주셨다는 걸. 사모, 연모, 사랑. 나, 아씨,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 하지만... 안 돼. 다시 한번 밀어내야 하는데... 가슴이 너무 아려오는 이 감정을, 아씨는 아시나요.
" 아씨, 아씨는 저 같은 놈에게 묶이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제 성년이시니 여러 귀족가와 황족에서 혼청도 올 터인데 어찌... "
" 닥치거라. "
" 네. "
난 아씨 앞에 털썩 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지만 원하던 답이 아니셨는지 아씨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 싸늘함 사이로는 무언지 모를 감정이 엿보였다. 한발, 한발, 그리고 또 한발. 아씨의 그 화려한 꽃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들린다. 내 바로 앞까지 오신 아씨는 차갑게 말을 이으셨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 일어나거라. 이제 말해보거라. 가슴에 손을 얹고, 거짓 없이. 못 들은 체하지 말고, 벙어리인 체하지도 말고, 갑자기 피곤한 체하지도 말거라. "
일어나서 딱딱하게 서있는 내 가슴에 한 손을 얹으시고 내 눈을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아씨를 보자 피 튀기는 전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 이미 다 한 번씩 해봤던 것들... 둘이 사적으로 있을 땐 항상 피했지... 오늘 끝을 보시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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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고 싶어. 아씨의 앞날, 아씨의 미래, 아씨의 행복을 생각하면 천하디 천한 나 따위는 아씨 곁에 있을 자격도 없으니. 하지만 내가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을까? 아씨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식을 올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웃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고, 또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윽. 절대, 절대 못 견뎌. 견딜 수 없을 거야. 산산이 부서져 내리겠지. 내 평생의 시간들이 부서져버릴 거야. 아씨만을 위해서 보낸, 아씨만을 생각하며 보낸, 아씨만을 연모하며 보낸 그 모든 시간들이 전부 산산히 부서져버릴 거야. 미천한 내가 고귀하디 고귀한 아씨의 곁에 설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을 그걸 위해 내던질 터이니. 마주 보는 아씨의 눈빛이 떨린다. 그런 아씨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떨린다. 하지만 떨리는 눈빛보다 더 떨리는 내 마음이 드디어 견고한 빗장을 부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와 말을 한다. 숨 쉬는 매 순간마다 내 속에 쌓여갔던 그 진심을 말한다.
" 전 아씨와 다릅니다. 신분이 고귀하지도 않고... "
" 그것이 내게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씨는 결국 그 고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시며 내게 외치셨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 환한 미소를 짓는 법도 모릅니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행복하게 하는 법도,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또 편안하게 하는 법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름답고, 또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아씨가 좋습니다. 저와 다른 아씨가 좋습니다. "
이어지는 내 말을 들은 아씨는 참아왔던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물음의 답을 가지고 계신 아씨는 떨리는 입술로 내게 무어라 말하려 하셨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고 난 여전히 단어 하나하나, 떨림 하나하나에 내 감정을 채워 말했다.
"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받아 꽃처럼 피어난 아씨의 그 웃음을 사모하고, 화창한 여름의 하늘 아래에서 저를 부르는 아씨의 그 손짓을 사모하고, 풍요로운 가을의 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아씨의 그 웃음소리를 사모하고, 또 고요한 겨울의 눈꽃 위로 흩어지는 아씨의 그 목소리를 사모합니다. 저는, 이 미천한 저는... 지금 제 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아씨를 그 무엇보다 열렬히 사모합니다. 그러니, 이런 저라도 받아주시겠습니까? "
이게 내 진심이다. 항상 전하고 싶었던 그 진심. 하지만 결국 담아두기만 한 그 진심. 내가 이렇게 아씨의 눈에서 흐르는 투명한 눈물을 부드럽게 훔치고 조금 미소 지으며 말하자 아씨는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답하셨다.
" 하, 이렇나게 남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벌을 줘야겠구나. "
"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 읍... 흣... 하아... 흐읍? "
난 모든 걸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갑작스레 느껴진 자극은 명치나 정강이가 아니고 입술과 혀를 강타했다. 아씨의 붉은 입술이 내 입술을 갑작스레 포갰고, 아씨의 부드러운 혀가 내 혀를 따스하게 감싸며 하나가 되었다. 찰나인지 영겁인지 모를 그 시간이 지나고 아씨는 입술을 떼셨고 난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아씨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 아씨는 다시 그 예쁜 입술을 포개며 내 입술을 탐하셨다. 입술이 다시 떨어지고 이제는 내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힐 때 아씨는 입술을 훔치며 말하셨다.
" 내가... 내가 이걸 얼마나 참았는지 아느냐? 나쁜 자식... 결국 나랑 똑같으면서 내가 그렇게 애태우는 걸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느냐? "
이런 상황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아직 아씨의 혀의 부드러운 감촉이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난 조금, 아니 많이 당황해서 살며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하하... 그러면 아씨는 아씨 곁에서 아씨를 매일 바라보며 연정을 숨겨야 했던 제 마음을 아십니까... 제 애간장은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간 지 오래입니다... "
이미 기대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고 아씨와 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해볼 수 없어 내가 이리 말하자 아씨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외치셨다.
"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연모하면 연모한다고 말하면 될 것 아니냐! 왜 굳이 그걸 숨기는지 이해할 수가... "
" 두려웠습니다. 천한 제가 고귀한 아씨에게 다가가는 게 두려웠습니다. 제 섣부른 행동으로 아씨가 제게서 멀어질까 두려웠습니다. 먼발치에서나마 아씨를 지켜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 아씨와 함께 있으니,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
아, 울면 안 되는데... 너무... 너무나 기쁜데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아씨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환히 웃던 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저 가만히 있을 때 내 눈물을 전부 이해한 듯한 아씨는 내 눈가를 부드럽게 훔치시며 말하셨다.
" 그리 하였더냐... 그래도... 그래도 이제부터는 네 마음을 숨기지 말거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연모하면 연모한다고, 그리고 사모하면 사모한다고 내게 언제든지 말하거라. 나도 항상 그리할 터이니. "
" 연모하고, 또 연모합니다 아씨. "
난 아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금처럼 빛나는 아씨의 머리에 덮인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아씨의 얼굴은 그런 나 때문에 다시 순식간에 붉어졌다. 하하, 어렸을 때랑 똑같으시다니까... 말을 돌리시려는지 아씨는 내 입술에서 눈을 떼시곤 조금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셨다.
" 하아... 놀라라... 그... 그러면 혼인식은 언제 올리는 게 좋을지...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올리는 게 좋겠지? "
" 예...? 혼인...식? 그걸 이리 갑작스레... "
" 왜, 싫은 것이냐? "
내 눈물을 닦아주는 아씨의 손길에 한번, 갑작스러운 혼인식이라는 말에 두 번 놀란 난 말을 더듬으며 물었지만 놀란 내 표정을 본 아씨는 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천천히 밑으로 내려 내 목을 쓰다듬으시며 되물으셨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구나... 아, 아니 그... 싫다는 건 아닌데... 아아, 흐으... 너무 빠른 듯한데... 하지만 아씨가 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어... 난 이렇게 생각하며 내 목을 끌어안고 나를 바라보는 아씨의 허리를 감싸 안고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아씨가 원하신다면 뭐든지. "
미소와 함께 답한 난 나를 행복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씨의 붉은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또다시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내게 전해져 왔고 서로 마주 보는 눈빛으로 오고 가는 뜨거운 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린 앞으로도 이렇게 우리만의 이야기를 쌓아갈 것이다. 영원토록, 단 둘이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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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앜! 복귀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팜파오입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먼저 말없이 휴재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네 편이나 가지고 왔...( 변절자 컷! ) 엌... 그... 죄송합니다... 약간 슬럼프 비스무리한 것과 귀차나즘이 와서...( 그냥 글쓰기 귀찮았다는 소리 ) 어쨌든 작업하면서 너무 즐거웠던 [ 소룡 서당 ], 많이 즐겨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머지 단편들은 오늘부터 하루에 한편씩 순차적으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럼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