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욧
글쟁이°
"오늘 귀한 손님이 오겠군."
반쯤 열린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겨울의 무거운 공기가 촛불을 흔들었다. 등허리를 간질이는 서늘한 바람에 늙은 마법사 빈헬름은 누렇게 변색된 화첩을 넘기다 말고 허공의 한켠을 멍하게 응시했다. 그러길 잠시. 이내 그는 화첩을 책상 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반쯤 걸터앉은 흔들의자에 완전히 몸을 뉘었다.
제 주인과 함께 늙어갔다는 걸 반증하듯 깊은 흉이 아로새겨진 의자가 찢어지는 신음을 흘렸다. 마치 너무 무겁다 투정부리듯 한 반응에 노구의 주름진 입가가 작게 휘었다.
"하지만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기엔 너무 늙은 모양이야. 너도, 그리고 나도."
꺼져 가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 공허를 물렸다. 답을 원하지도, 딱히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벽에 부딪히고, 천장에 꺾여 다시금 주인에게로 돌아온 목소리는 굳은 의지와 함께였다. 어느새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빈헬름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서재를 나섰다. 지팡이조차 짚지 않고 우직하게 걷는 주인의 더없는 폭거에 전신의 관절들이 삐걱거리며 저항의 의사를 내비쳤다.
ㅅ발 뭐 하는 거야. 어차피 마저 살 날도 얼마 없는데 뭐 어떤가. 닥쳐 늙은이 우리는 더 살고 싶다고. 침대에 누워 단지 세상을 관조할 뿐인 삶이 어디 삶이겠나. 그래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시시한 논쟁의 승자는 빈헬름이었다. 썩어들어간 마룻바닥이 연주하는 노랫가락이 그의 귀를 떠나갈 때쯤 그는 부엌에 도착했다.
그가 손때로 반질거리는 문고리를 쥐었다. 한때 집안의 어느 곳보다 많이 들락거려 이제는 자신의 손 모양으로 변해버린 고리를 돌렸다. 어딘가 익숙하기만 한 그 느낌에 노인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차가움을 마주했다.
털컥 이는 소리와 비명을 질러대는 경첩. 늙은 눈동자로도 여실히 보이는 먼지. 아무리 봐도 귀인을 맞이할 장소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음식을 준비할 장소가 아닐지도. 오래전 스스로 꺾어버린 오랜 친우의 감촉을 떠올리며 그는 빗자루와 기름을 찾는 고된 여정을 시작하고자 했다. 신이 내린 거룩한 시련의 끝자락을 거니는 성인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변한 걸음에 마룻바닥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노구와 마룻바닥의 신경질적인 정적을 부순 건 현관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정말로 왔군. 점점 날카로워지는 직감은 가끔 직업을 잘못 선택했던 게 아닌지 하는 의문을 띄웠다. 두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마지못해 현관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반갑게 맞았겠지만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이 그의 발을 잡아챈 탓이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근 이십 년만이죠?"
문을 열자 차가운 고산의 한기와 함께 젊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백탁 낀 노인의 눈동자가 그를 훑었다. 찰랑거리는 녹색 머리칼과 전신을 감싼 빛나는 플레이트 아머. 마지막으로 왕가의 직인이 새겨진 대검. 몇 가지 키워드를 조합하고 나서야 마법사는 손님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 정말인지 드문 일일세 헥토르경."
"제가 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이것저것 알팍한 잔재주가 생겨서 말이네. 그런 것보다 일단은 들어오게나. 바람이 차네"
"아직 젊으신데요. 뭘."
노인이 비켜서자 손님은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거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노인을 바라보는 손님의 푸른 시선이 걱정스럽게 빛났다. 노인은 생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가락으로 거실 뒤편을 가르친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잠시 서재에 가 있게나. 금방 차를 내오지."
"아니에요. 그 정도로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나를 손님 대접도 재대로 못 하는 머저리로 만들 셈인가?"
"아이고 그건 곤란하죠. 참고로 저는 요즘 플록스 벌꿀차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플록스. 플록스라. 반쯤은 본능적으로 과장스럽게 부풀린 웃음이 품은 진의를 가늠해 보던 노인은 곧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그만뒀다. 너무 오랜만의 손님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졌다는건 사실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없네. 흑차나 먹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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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쓰던 걸 갈아엎고, 또 갈아엎다가 영원히 못 올릴 것 같아서 다른 거라도 먼저 올려 봅니다. 이것마저 퇴고하다가는 정말로 영원히 못올릴 게 분명하니 그냥 올립니다. 오타나 급전개는 너그럽게 봐주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