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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별 ]

21 팜파오
  • 조회수216
  • 작성일2021.08.15
달과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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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먹물로 뒤덮인 듯 새카만 밤하늘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별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달만이 어둠 속에 잠긴 세상을 비췄다.

   그 어둠 사이를 스쳐 더 어두운 존재가 마치 늠름한 숫사슴처럼 사뿐히 숲을 가로지른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 오늘은 그믐이구나. “

   신비로운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낮게 울렸다.

   마치 밤하늘처럼 검은 피부와 초승달처럼 밝게 빛나는 뿔을 가진 목소리의 주인은 곧은 시선으로 달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크레센트가 몸을 돌려 숲속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몸은 거대한 드래곤의 몸에서 가냘픈 인간의 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칠흑처럼 어둡고 허리까지 오는 남색 머리카락에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신비로운 인상을 줬다. 코와 입을 가린 얇은 천과 가녀린 몸을 감싼 하늘하늘한 옷은 그녀가 사제, 아니면 무녀라는 사실을, 자세히 본다면 머리에 달린 달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뿔 두 개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까지 일깨워줬다.

   그녀는 아까처럼 조용히 어두운 숲을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빛으로 밝히며 조용히 거닐었다.

   마치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숲을 둘러보던 그녀는 멀리서 밝은 빛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빛은 인간의 횃불이나 등과는 달리 기묘한 푸른빛이었다.

   연한 푸른빛을 이상하게 여긴 그녀는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묘한 푸른빛은 다름이 아닌 한 드래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서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중형 정도로 보이는 그 드래곤은 인기척을 느끼자 고개를 휙 돌렸다.

   “ 누구냐. “

   마치 시린 겨울바람 같은 목소리가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퍼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눈매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 그리고 와이번을 닮은 듯한 몸이 놀란 눈의 그녀에게 보였다.

   그의 입가엔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가 묻어있었고 뒤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작은 새끼사슴이 보였다.

   “ ㅈ, 죽이지 마세요! “

   “ 뭐? “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죽이지 말라 하자 아직도 몸에서 푸른빛을 내는 스피릿 이터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사, 사슴... 죽이지 마세요… “

   그가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자 크레센트의 목소리는 더 떨리기 시작했고 스피릿 이터는 더욱더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배고픈데 어쩌라는 거야. “

   “ 아, 아니… 제가 다른 음식을 구해올 테니 죄 없는 생명은… “

   이제 거의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보고 냉소를 던진 그는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 착각하지 마. 저 새끼사슴을 건드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난 단지 저 뒤에 죽어있는 엄마 사슴의 영혼을 먹으려던 거라고. “

   “ 에? “

   당황한 크레센트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그는 살짝 옆으로 비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엄마 사슴을 보여줬다. 신기하게도 그 죽은 엄마 사슴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벌벌 떠는 새끼 사슴 옆에서 꼭 붙어있었다.

   당황한 눈빛으로 죽은 사슴의 사체와 그 사슴의 영혼을 번갈아 바라보던 크레센트에게 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아들었으면 꺼져. 배고파 뒤지겠으니까. “

   이렇게 쏘아붙인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슴의 영혼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삼켰고 그는 놀라지도 않으며 그 조각들을 삼켜 내렸다.

   절반 정도의 영혼의 조각을 먹어치운 스피릿 이터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고 마치 돌처럼 굳은 채 서 있는 크레센트에게 말했다.

   “ 뭘 봐. “

   “ 아… 그, 그냥… “

   크레센트는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고 그는 혀를 차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 할 말 없으면 꺼져. “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그의 말투와 눈빛이었지만 크레센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연한 눈동자에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다시 몸을 돌린 그의 뒷모습에 대고 외치듯 말했다.

   “ 있어요! “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듯이 작은 인간의 모습인 그녀에게 몸을 돌려 쏘아봤고 그 눈빛에 크레센트는 다시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름… 이름 물어봐도… 돼요…? “

   “ 그딴 거 알아서 뭐하게. “

   그가 마지막 영혼의 조각을 삼키며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크레센트는 고개를 올려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 전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

   “ 큭. 웃기지 마. “

   스피릿 이터는 크레센트에게 냉소를 보이곤 등을 돌려 숲 사이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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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젠장할 인간 놈들... 쓰레기 같아. 그런 인간 밑에서 일하는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야. “

   또다시 어두운 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목적지 없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고 숨을 몰아쉬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 하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

   감기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스피릿 이터는 작은 호수를 발견하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물을 마시려는 듯 힘겹게 호수에 다가간 그는 손을 물가를 향해 뻗다가 정신을 잃고 물속에 빠졌다.

   물은 깊지 않았고 정신을 잃은 하얀 피부의 남자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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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같은 시각, 오늘도 여김없이 숲을 거닐던 크레센트는 작은 호수를 발견하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호숫가에 앉아 발로 물장구를 치던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한듯 고개를 숙였다.

   “ 물에서 왜 이런 냄새가... 이건... 피? 이렇게 많은 피가 어디서 흘러나온... “

   호수의 맑은 물을 탁하게 만드는 붉은 피에 의아함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엔 환한 보름달의 빛 아래 허리에서 피를 흘리며 호수에 떠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서둘러 그 남자를 물 밖으로 꺼내고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크레센트는 약초로 보이는 풀을 한 움큼 따서 그 남자를 무릎 위에 눕힌 뒤 약초로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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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뚝한 코, 날카로운 눈매, 하얀 피부와 어딘가 익숙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연한 푸른색 장발.

   크레센트는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잃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 조금... 잘생긴 것 같기도... '

   얼굴을 관찰한 후 시선은 밑으로 내려갔고 탄탄한 몸에 젖은 채로 달라붙은 옷이 눈에 들어와 얼굴이 붉어지자 그의 몸에서 눈을 떼고 상처를 바라보았다. 짓이겨진 약초가 붙은 허리의 상처는 아마 무언가에 찔리거나 베인 듯했다.

   그녀는 그를 잠시 바닥에 눕히고 다른 약초를 찾아오려 했지만, 누군가 그녀의 얇은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 어? 벌써 일어난... “

   “ ... 엄...마... “

   엄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당황한 채로 가만히 서있던 크레센트는 고슴도치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 엄마... 가지 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가지... 가지... 마... “

   지독한 과거를 꿈에서 회상하며 애원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크레센트는 다시 그를 무릎에 눕히고 그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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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일어났네요. 몸은... 좀 괜찮아요? “

   “ 너 뭐야? 왜 내가 네 무릎 위에... 윽.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감긴 눈을 사르르 뜨자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그 남자는 그녀의 무릎에서 일어나 마주 앉았고, 잠시간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 네가 날 치료한 거야? “

   “ 네. “

   인간이 초면에 자꾸 반말을 쓰는 것이 조금 거슬렸지만, 크레센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은 크레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

   “ 그렇게 피를 흘리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

   다시 침묵이 찾아왔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나라고 생각하며 말을 도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그가 짧게 대답했다.

   “ 인간. “

   “ 네? 인...간이요? “

   그녀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고 마치 무언가를 뱉어내듯이 말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 마을을 습격했다가 드래곤 테이머한테 당했어. “

   “ 마을을... 습격해요? “

   완전히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그의 말을 따라했다.

   “ 난 인간이 싫어. 무엇보다 혐오해. “

   자신도 인간이면서 인간을 습격할 만큼 혐오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크레센트는 외쳤다.

   “ 그래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

   “ 네가 뭘 아는데. “

   “ 네? “

   공허한 목소리로 말을 툭 뱉은 스피릿 이터에게 크레센트는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 네가 뭘 아는데 내가 인간을 죽이든 말든 신경을 쓰냐고. “

   “ 어... 어떤 이유에서도 살생은... “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살생? 인간 놈들은 생명이라고 보기도 아까워. “

   차갑게 쏘아붙인 그는 상처를 살펴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몇 걸음 멀어지다 걸음을 멈추고 크레센트에게 돌아봤다.

   “ 오늘 일은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마주치는 일 없을 거야. “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모습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스피릿 이터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를 한번 흘겨보고 날아올라 사라졌다.

   ' 어?! '

   그 남자가 그때 숲에서 본 그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더욱더 궁금증이 생겼다.

   그는 인간을 왜 그렇게 혐오하는 걸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 아직 이름도 모르네... “

   크레센트는 한숨을 쉬며 사라진 스피릿 이터의 피가 묻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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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아... 왜 자꾸 따라다녀? “

   “ 아, 아니에요! 오, 오해... “

   “ 오해?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만났는데 이게 오해라고? “

   “ 그, 그건... “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다녔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얼굴이 보고싶기도 했고... '

   크레센트가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남자가 허리에 상처를 입은 날부터 그를 찾아다닌 지도 3일. 그녀는 스피릿 이터에게 호기심이 생겨 숲을 더욱더 열심히 순찰했다.

   그는 크레센트를 만날 때마다 눈을 흘기고 사라졌지만 같은 상황이 며칠째 계속 반복되니 귀찮은 모양이다.

   ' 말할까? 또 무시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침묵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

   속으로 고민을 반복하던 크레센트에게 그 와이번(이라고 크레센트는 추측하고 있다)은 한숨을 쉬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것 대신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고운 피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긴 머리와 매서운 눈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게 있다면 크레센트를 바라보는 눈빛.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준 것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 원하는 게 뭔데? “

   “ 어어...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그리고 이름은 뭔지. “

   원하던 기회가 오자 크레센트는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마지막 질문을 듣자 헤헤 웃는 그녀와 동시에 피식 웃었다.

   “ 이름은 시성(颸星). 성은 몰라. 어떤 삶을 살아왔냐... 무슨 일을 겪었냐... 둘 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쯧, 귀찮게. “

   “ 말... 못 해주시나요...? “

   속으로 시성의 이름을 되뇌던 크레센트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시성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오늘도 그냥 가려나보다고 생각하며 아쉽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레센트는 시성이 자신을 돌아보자 조금 놀랐다.

   “ 뭐해, 안 올 거야? “

   “ 가,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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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승달이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별이 흐드러진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었다.

   시성은 언덕 꼭대기에 주저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고 크레센트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던 크레센트는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가 나란히 앉은 둘의 귓가를 간질였다.

   시성은 갑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 어렸을 때 일족이 멸살 당했어. 스피릿 이터... 영혼을 먹는 자들. 우리 일족의 피를 물려받은 자나 그들의 주변에 있는 존재는 영혼이 보여.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영혼을 먹고 살아가지. 우리는 태어난 그대로 사는 건데 인간들은 그런 우리가 불길하게 보였나봐. 아빠는 인간들의 손에 죽었고, 해치였던 날 안고 도망치던 엄마는 이 숲에 다다르자 날 풀숲에 숨기시고 마찬가지로 죽으셨지. 가끔 그날의 기억이 꿈에서 나와. 너무 끔찍한데, 날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미소지으시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이게 악몽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

   갑자기 터져나온 숨막히는 과거사에 크레센트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시성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죽은 어미사슴의 영혼이 보인 것의 이유는 어느새 잊혀지고 시성의 표정이 크레센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밤바람에 그의 긴 머리가 휘날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덤덤했다.

   “ 그리고 그다음부터 인간을 혐오하게 됐어. 만나면 죽이고, 없으면 찾아서라도. 지난번엔 작은 마을을 습격했다가 그 마을에 들린 드래곤 테이머한테 된통 당했지. 하, 참 우습지 않아? 어떻게 인간 따위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

   크레센트는 드래곤 테이머와 드래곤은 주종 관계도, 고용 관계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써 힘을 합친다는 것을 설명하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가 시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자 그가 나직이 물었다.

   “ 왜 우는 거야. “

   인간을 향한 뒤틀린 혐오를 가진 그는 여전히 덤덤한 시선으로 크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한 채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 그냥... 그냥 눈물이 나요... “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혼자서 얼마나 슬펐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그냥... 너무 슬퍼져요. '

   그녀는 뒷말을 삼키며 눈물을 닦고 시성을 바라보았다.

   “ 왜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울어. 너, 공감을 잘하는구나. “

   크레센트는 지어낸 듯한, 억지로 짓는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시성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속으로 흘리는 눈물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 이제 그만 해요. 왜 당신이 하는 짓이 제2의 시성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거에ㅇ.. “

   “ 나도 알아. “

   그 말을 들은 크레센트는 시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어라 하려고 했지만, 시성의 목소리는 그녀의 말을 막았다.

   “ 나도 너무 잘 아는데, 괴로워서 멈출 수가 없어. 우리 가족이... 우리 일족이 그렇게 몰살당했는데... 이 분노, 이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시성은 여전히 그 희미한 미소를 유지한 채 크레센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선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이 악임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어린아이의 눈물이었다.

   “ 그냥 놓아버려요. 슬픔, 분노, 혼란... 필요 없는 감정은 모두 놓아버려요. 주위를 둘러봐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많잖아요. 이 바람, 이 하늘, 이 풍경, 이 모든 것에 자신을 맡겨요. 그러니 이제... 그런 감정은 그냥 흘려보내요... “

   크레센트는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으며 말했다. 그 둘은 채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시성이 입을 뗐다.

   “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어. 내가 누군가에게 너무 깊이 빠졌다가 그 사람이 사라지면 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기댈 수가 없었어. “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고 크레센트는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던 시성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 그런데 말이야, 넌... 괜찮을 것 같아. 먼저 다가와준 것도, 상처를 치료해준 것도, 그리고 내게 관심을 가져준 것도. 그러니까 괜찮다면... 이런 무례하고 날카로운 나라도 괜찮다면... “

   뒷말을 삼킨 시성의 희미한 미소에서는 부드러운 봄날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차가운 가면을 벗고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눈물을 닦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게요. 그러니 이젠 더는 외로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어요. 저도... 저도 많이 좋아해요. “

   시성이 삼킨 뒷말에 대답한 그녀는 마음을 고백하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기분좋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 에? “

   갑자기 그는 처음으로 얼빠진 소리를 냈고 그런 시성의 표정을 본 그녀는 속으로 그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아, 아니... 나 너한테 엄청 차갑게 굴었잖아... 받아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

   당황하며 우물쭈물거리는 시성의 숨겨진 모습을 본 크레센트는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크레센트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성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살며시 입술을 맞췄다. 입술이 다시 떨어지자 크레센트는 당황한 얼굴의 시성에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 제 이름은 온월이에요. 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내 이름은 시성. 나도 잘 부탁해. “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이마를 맞댔다. 그렇게 둘의 단수로서가 아닌 복수로서의 첫 번째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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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산새들의 노랫소리에 잠에서 깬 온월은 자신 옆에 누워있는 시성을 보고 이게 꿈인가 생각했다. 물론 그의 꿈을 몇번 꾸긴 했지만, 이렇게 생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도.

   “ 나 안아줘. “

   “ 에?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자신에게 팔을 벌린 채 안아달라 하는 시성을 본 온월은 시선을 돌리며 졸린 목소리로 당황한 듯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 갑자기 안아달라 그러시면... “

   “ 싫으면 내가 안을래. “

   급변한 그의 태도는 온월을 놀라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했다. 시성은 온월을 품에 꼭 안은 채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 좋아해. “

   “ 엑... 저, 저도요... “

   ' 이게... 어젯밤에 그 드래곤이 맞나...? '

   온월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시성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눈웃음을 지었다.

   “ 시성 씨... “

   “ 으응? “

   “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뀐 거예요...? 물론 좋긴 한데 적응이 안 돼요... “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온월이 묻자 시성은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눈웃음에 한번, 미소에 두 번 설렌 온월은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며 대답을 기다렸다.

   “ 그냥... 처음이거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최대한 솔직해지기로 했어. “

   “ 그럼... 그럼 저도 솔직해질래요. 머리카락 쓰다듬게 해줘요. “

   온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자 시성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긴 머리카락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 비슷한 상황, 다른 관계네. “

   “ 그러게요. “

   시성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고 온월은 그의 긴 머리를 만지며 미소지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 온월은 잠시 행복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 오, 온워얼...? “

   조금 당황한 듯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성의 볼을 쪼물쪼물거리는 자신의 손을 발견한 온월은 웃음을 터트렸다.

   “ 이렇게 보니 꽤 귀여운 것 같기도... “

   “ ㄴ, 나 안 기여어... “

   여전히 온월이 볼을 만져 발음이 새는 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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