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친구 (2)
그는 해진 조끼를 대충 껴입었다. 군데군데 색이 바랜 것이 장인이 엮은 고급품도 세월의 흐름을 버티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의 손길을 버티지 못했거나. 위에 두른 정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지간한 중산층만 되더라도 이보단 좋은 차림을 갖출 수 있을 테다.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던 비올레타는 벽장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금색 까마귀가 검은 자루 위에 권태롭게 앉아있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부호의 유별난 수집품쯤 돼 보이는 물건은 그의 추레한 몰골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지팡이를 휘휘 돌리며 집을 나섰다. 초봄의 시린 아침 바람이 그를 덮쳤다. 일정한 패턴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된 대로. 판자와 철판을 붙인 너절한 건물. 아무렇게나 버려진 오물.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에서 들려오는 비명. 그 모든 게 이 도시를 이루는 일각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었다. 딱따구리처럼 검은 지팡이가 걸음에 맞춰 연신 돌을 쪼아댔다.
당장 역병이 휩쓸어도 이상하지 않을 변두리를 벗어나자 거대한 상가가 그를 반겼다. 퀴퀴한 시취 대신 허기를 독촉하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올레타는 잠시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아침은 건너뛰자는 원초의 계획이 있었으나, 금세 수정됐다. 은사를 뵈러 가는 마당인데 배 곪은 티를 낼 순 없지 않겠는가.
"이것들은 얼마쯤 합니까."
비올레타는 가판대에서 셈을 하던 노인에게 말했다. 약간 귀가 먹은 건지 노인은 답하지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굳어가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가볍게 가판대를 두드렸다. 뒤늦게 손님의 존재를 깨달은 노인이 객쩍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손님이시오?"
"아니라면 제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선생이 될 수 있는 거야 많지. 강도라던가 불한당 같은 것들 말이오." 노인이 킬킬대며 말했다. 비올레타도 따라 웃다가 짐짓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런 상황을 원하십니까?"
"아이고 젊은이가 사람 잡네. 아무나 좀 도와주쇼."
노인이 커다란 몸짓으로, 그러나 별 의욕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팔을 내저으며 울상을 짓는 폼이 퍽 처량해 보였다. 옆 가판대의 장사치가 지겹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훑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닌 듯싶었다. 비올레타는 숫제 자신의 옷깃을 잡고 늘어지려는 노인을 애써 말렸다. 노인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크흠, 미안하오. 그래서 뭘 사려 했소?"
"이쪽에 있는 거로 여덟 개만 주십시오."
비올레타가 가르친 쪽은 아직도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연갈색 빵들의 무리였다. 거길 기점으로 삼아 왼편으로 갈수록 색들이 짙어졌다. 비올레타의 경험상 색만 짙어지는 게 아니라, 강도도 더해져서 반대편 끝에 있는 빵은 도끼로 내리 처도 쉽사리 잘리지 않을 것이다.
"원래 삼 실버 이십 브론즌데. 뭐, 늙은이 놀음에 어울려 준 것도 있고 하니 그냥 삼 실버만 주시오."
"삼 실버 말이지요."
"왜 이것도 비싸다고 생각하시오?"
"아뇨, 오히려 그 반댑니다. 제도에서 이만한 빵들을 사려면 실버 대여섯 개는 들여야 하니까요."
"그야 당연하지. 거긴 쓰는 재료 질부터 다를게요.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노인이 별 얘기를 다 한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도 향은 이쪽이 더 좋습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조금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비올레타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몇 개가 서로 부딪치며 짤랑거렸다.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동전 몇 닢을 끄집어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동전들이 햇살을 받아 유독 또렷이 빛났다. 노인은 냉큼 돈을 받아들여 가판대 한편에 마련된 통 속에 담았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 졌다. 노인은 이쪽이 더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리 말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고마우시면 빵 좀 더 주시지요."
"그게 목적이었군." 노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실 별로 안 고마웠소."
"이런, 나름 만족스러운 연기였는데."
노인은 노릇한 빵들을 정확히 여덟 개 집어 종이봉투 안에 밀어 넣었다. 군데군데 요상한 얼룩이 눌어붙은 것이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는 않았다. 종이봉투와 비올레타를 두세 차례 번갈아 본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빵 하나를 더 집었다.
"제길, 또 마누라한테 한 소리 듣겠어. 빨리 가져가시오. 마음 바뀌기 직전이니."
봉투를 받아든 비올레타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어느새 돌아앉은 노인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비올레타는 속으로 웃었다. 노인이 썩 마음에 든 탓이었다. 그는 추가로 받은 빵을 대충 입에 밀어 넣고 걸음을 이었다. 주변의 풍경이 점점 흐려졌다. 길다란 건물들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외벽이 고풍스럽게 변했다.
이윽고 그는 한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한적한걸 넘어 후비진 골목에 위치한 저택은 특이했다. 정확히는 대문이 특이했다. 틈은 고사하고, 실금조차 보이지 않는 납작한 돌덩어리가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침입자를 막는다는 부가적인 목적에 집착해, 보다 중요한 의미를 잃은 듯 보이는 문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길 조장했다는 편이 옳으리라.
비올레타는 돌문 속에서 은밀히 맥동하는 신비를 읽었다. 익사체의 머리칼처럼 얽히고 섥힌 신비는 제 밑천을 쉽사리 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황금 까마귀의 눈에 이채가 서린 듯 보였다. 비올레타는 까마귀를 돌에 가볍게 가저다 댔다. 붉은 빛의 회로가 은밀히 꿈틀거렸다. 그는 입을 열었다. 노인을 상대할 때 보다 목소리가 한층 굵었다.
"있어야 할 곳으로 가고자 하네."
더없이 단단해 보이던 돌이 천천히 형태를 잃어갔다. 허물어지고 다시 뭉치길 반복해, 종국엔 길다란 문틈을 이뤘다. 어디서 솟아오른지 모를 흐릿한 안개가 문의 역할을 대신했다. 지팡이를 품에 안은 비올레타는 안개 사이로 들어섰다. 미약한 반발력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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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크기 어떠신가요? 이정도면 적당하다 싶다가도, 또 보면 큰거 같기도 하네요.
아무튼 안녕하세요. 지옥에서 돌아온 글쟁입니다. 수행평가 시즌도 거의 막바지네요. 수능도 끝나서 그런지 안 나오시는 3학년 선배님들 덕에 앞뒤 잴거 없이 운동장 독점하는게 퍽 재밌네요.
오늘도 잡설이 너무 길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