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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 20화

4 [DEVIL]
  • 조회수118
  • 작성일2023.01.24












사실 데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뭐냐면 바로 자기 품에 안긴 채 있는 이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데빌이 아니었다.

데빌은 원래도 겁이 없었지만 사랑을 하니 더 겁이 없어졌다.


신에게 가서 어떻게든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 아이와의 미래에 관한 문제를 핵결... 해야 했지만, 그래야 했지만, 어쩌다 보니 조금만 더 즐기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라는 표현이 맞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앞에 두고 행동하지 않다니, 데빌답지 않았다.

기다린 뒤 해결하면 더 좋은 그런 류의 문제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기에는 블랙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데빌은 처음 겪어보는 사랑에 어지러웠다.


사실 반쯤 제정신 아닌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물론 일의 능률은 그대로여서 아무도 데빌을 의심하지 않았다.

역시 천하의 데빌이었다.


아무튼 블랙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블랙은 시도 때도 없이 귀여웠고, 멋있었고, 가끔 혼내고 싶었고, 그렇지만 혼내고 싶은 마음을 참아서 집어넣을 만큼 사랑스러웠고, 데빌에게 늘 진심이었고, 그래서 사랑했다.

데빌은 평범한 용이었던 시절에는 어떤 사랑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평범한 용이 느끼는 감정과는 동떨어진 상태로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블랙과 하는 사랑이 태어나서도 죽어서도 처음 하는 사랑같았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블랙이 자신을 믿어줘서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든 순간부터 데빌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얘 앞에서 울며 매달리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겠는데?


데빌은 블랙과의 미래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일단 상상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허락해준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 와중에 블랙과 함께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다 보니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블랙을 처음 만난 날 이후로 3개월이 흘렀다.

계약기간의 4분의 1.

데빌은 블랙은 사랑한 지 2개월이 지났음에도 블랙이 여전히 좋았다.

오히려 더 좋아져서 큰일 났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데빌의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크게 울렸다.


도저히 이 아이를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마음이 식기는 할까.

데빌은 자문했다.

어쩌면 6개월이 되면, 9개월이 되면, 1년이 된다면, 그 때는 쿨하게 이 계약을 끝낼 수 있을까.

데빌은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는 게 진짜 해결책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렇지만 이 아이를 영원히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 때는 너무 늦는다.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데빌은 이 문제에 온 몸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











데빌은 하람 앞에 섰다.

무심한 눈으로 서류를 훑던 하람이 고개를 들어 데빌을 내려다봤다.

오늘따라 하람이 앉은 의자가 더 거대해 보이고 높아보인다.



데빌 :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람 : "음, 말해봐"


데빌 : "계약자를 좋아합니다"


하람 : "그래서?"


데빌 : "별로 안 놀라시네요"



하람이 크게 웃었다.

데빌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하람 :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니?"


데빌 : "그것도 그러네요"


하람 : "드릴 말씀이라는 놈은 이걸로 끝이니? 애초에 난 네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뭐 하다 2개월이나 걸렸나 몰라"



하람이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다 읽은 서류에 도장을 찍거나 사인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데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블랙과 저 사이의 계약을 끝내주세요"


하람 : "그 말은 뭘까. 좀 흥미가 생긴다?"


데빌 : "계약을 끝내고 블랙을 평범한 용으로 만들어주세요"


하람 : "정말로?"



하람이 크게 웃었다.

웃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뭐가 그리 웃긴지 하람은 배를 부여잡기까지 했다.

데빌은 긴장한 상태였고 농담으로라도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이건 블랙의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한참 웃던 하람이 박수를 쳤다.



하람 : "난 네가 이런 부탁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정말 예상 밖의 일이다. 그래, 한 번만 더 말해볼래?"


데빌 : "계약을 끝내고 블랙을 평범한 용으로 만들어주세요"


하람 : "데빌"


데빌 : "네"


하람 : "너, 제정신이니?"



하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데빌은 하람의 말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데빌 : "그럼 제가 지금 미친놈으로 보이시나요"


하람 : "당연히 안 되는 부탁을 하려고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면 그게 제정신일까?"


데빌 :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하람 : "당연히 안돼. 블랙이 평범한 용이 되면 계약자도 대상자도 아니게 되니까, 그 때  가서 뭐 어떻게든 만나볼 생각인 것 같은데. 내 말 맞니?"


데빌 : "이번에 대폭 삭감해주신다고 한 기간, 대폭 삭감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 기간, 전부 다 포기하겠습니다"


하람 : "데빌아, 미안해서 어쩌지. 그 기간, 그까짓 거 조금 준다고 해도 이 문제랑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아. 하나도 안 맞아. 애초에 네가 걔를 평생 좋아할 것 같니?"



하람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데빌 : "일단 천하의 제가 좋아한다는 점에서 평생 좋아할 것 같은데요"


하람 :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기름칠을 한 건지. 정말 어쩌자고 그러는 거야. 재미있기는 했지만 이 얘기 여기서 끝내자. 알겠지? 이제 나가봐"


데빌 : "하지만"


하람 : "네 발로 나갈래, 쫓겨날래"



데빌은 일단 제 발로 물러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람의 얼굴은 완고했으며 웃고는 있었지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웃음을 짓고 있었으므로.

데빌은 하람이 한 말을 떠올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자신이 아득바득 일하며 채운 기간들.

그 기간들 중 일부, 그것도 피눈물 같은 일부를 주겠다는데도 하람은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는다' 고 했다.


데빌은 아침출근을 하며 생각했다.

그냥 한 순간의 연애 뭐 이런 걸로 생각하고 이 모든 문제를 끝낼까. 블랙에게는 미안하지만 타개할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데빌의 머리가 평소처럼 이성적인 방향으로 작동했다.

냉정해진 머릿속에서 모든 걸 그냥 없던 일로 치자는 문장이 둥둥 떠올랐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뒹굴 거리고 있던 블랙이 몸을 일으켰다.



블랙 : "데빌씨 왔어요?"


데빌 : "블랙아. 있짆아, 나..."


블랙 : "무슨 일 있었어?"



블랙이 데빌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데빌 : "아니, 별로"



데빌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은 탁상거울을 쳐다봤다.

데빌이 보기에는 표정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티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으므로 감정이 드러날 리 없었다.

무표정, 혹은 심드렁하다 부를 수 있는 표정.

무슨 일 있냐고 물을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데빌은 다시 고개를 돌려 블랙을 쳐다봤다.



데빌 : "블랙아, 내가 할 말이 있어"


블랙 : "데빌씨, 나는 괜찮아"



블랙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블랙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환하게 웃었다.

데빌은 마음이 약해지려는 걸 다잡았다.

너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도 모르잖아.



데빌 : "이거 진지한 얘기야"


블랙 : "나는 진짜 괜찮아"


데빌 : "블랙아, 너 내가 진짜 무슨 말 하려는지..."


블랙 : "언제나 블랙씨를 믿어"



블랙이 고개를 돌려 데빌을 올려다봤다.

걱정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블랙은, 이상하게도 데빌이 앞으로 할 말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천하의 데빌의 말문을 막히게 할 수 있는 건 이 아이밖에 없을 것이다.



데빌 : "블, 블랙아. 나는, 자신이 없어"


블랙 : "뭐가?"


데빌 : "몇 백년간 이렇게 자신 없었던 적은 처음이야. 나 네 일만 되면 자신이 없어. 너는 나를 자신 없게 만들어. 항상, 지금도 그래. 내가 무슨 말 하려고 하면 못 하게 하고.... 너 하나도 안 괜찮을 것 같은 얘기 하려고 왔는데. 지금 나는..."



데빌은 더듬더듬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문장이 입 안에서 제 멋대로 맴돌았다.

정말이지, 오늘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블랙 : "그래도 괜찮을거야"


데빌 : "블랙아, 너 1년 뒤에 어떻게 할 거야"


블랙 : "혹시 나 죽으면 언니 만날 수 있어?"



데빌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블랙이 농담이라며 웃었다.

데빌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데빌은 이게 농담 같지 않았다.



블랙 : "왜 그... 죽으면 지옥에 가는 거 아냐?"


데빌 : "만날 수 없어. 일단 너 너무 어려서 지옥보다 더한 곳에 갈 수도 있어"


블랙 : "오오.."


데빌 : "블랙아"


블랙 : "응?"


데빌 :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블랙 : "..."


데빌 : "내가 널 그렇게 만들까 봐 겁나"


블랙 : "응. 그럼 다시는 말 안할게"



데빌은 블랙이 자신을 좋아하는 그 마음이 너무 소중했고 동시에 너무 무서웠다.

본인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그껴져 그랬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니었는데.

점점 커져 조금만 더 있으면 주체가 안 될 것 같은 이 마음을 앞에 두고 있으면, 데빌은 자신이 없어졌다.

여태껏 이렇게 자신 없었던 일이 없었다.



블랙 : "데빌씨, 나 괜찮아. 믿고 있어 항상. 늘 말하지만 난 데빌씨랑 있는 지금이 좋아"


데빌 : "블랙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블랙 : "응, 나는 그 마음만 있으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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