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피곤했다.
블랙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좀 전의 일이 생각나 가방에서 상자와 열쇠를 꺼냈다.
작은 상자에 달린 자물쇠.
자물쇠의 크기도 그만큼 작았다.
상자는 반지를 담을 크기 정도였는데, 덜그럭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반지가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프러포즈는 아닌가 보네.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작은 자물쇠임에도 꽤 큰 소리가 났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에 작은 레버와 기계 장치가 보였다.
오르골인 것 같은데.
블랙은 작은 금속 레버를 조심스레 돌려 서너 바퀴를 감았다.
레버가 풀리며 작은 소리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인지 알아맞히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노래였다.
모르는 노래는 아니었고, 블랙도 몇 번 흥얼거린 기억이 있었다.
무슨 노래지.
노래를 따라 부르던 블랙은 이게 곧 자장가라는 것을 알았다.
남들 다 부르는 동요나 교향곡 자장가 같은 게 아니었다.
블랙이 데빌에게 불러줬던 자장가였다.
인생 최고의 노래 실력으로 불러준 최고의 자장가였지.
블랙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레버를 몇 바퀴 돌려 감았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덮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그 어떤 것도.
잠이 쏟아졌다.
오르골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나도 편안했다.
블랙은 잠들기 전, 오늘 읽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데빌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볼 수 있을까.
조금은 지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블랙은 울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꼭 감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번째 조건도 지켜야지. 계약을 위반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금 잠이 찾아왔다.
블랙이 잠들었다.
오르골은 그 이후 몇 분간 노래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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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그게 항상 고민이었는데. 인사말, 사랑한다는 말, 어떻게 지냈냐는 말. 어쩌면 꼭 해주고 싶었던 말. 사실 앞으로 최대 80년은 남은 것 같으니 천천히 고민해도 되겠지만.
만나는 그 순간,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말 대신 편지에 대한 답장을 건네는 건 어떨까.
을이 된 데빌씨에게, 그런 말로 문장을 시작하는 거야. 아니면 계약서라는 세 글자가 크게 적힌 종이를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 그럼 웃어줄까. 편지 어떻게 써볼까. 첫문장은 역시 이걸로 시작하고.
이런 말들을, 이런 단어들을, 언젠가는 전할 수 있겠지.
을이 되어 버린 데빌씨에게
데빌씨는 날 지치게 하고 구질구질하게 만들어.
알고 있어? 이 생은 너무나도 지지부진해.
그렇지만
데빌씨는 수시로 날 살게 만들어.
추신) 날 믿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갑이 된 블랙이
항상 데빌씨의 행복을 바라는 블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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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네요.
완결이 날 때까지 계속 봐주신 분들께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약간...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 있겠죠, 아직까지는.
나머지 이야기.
즉, 뒷 이야기들은 외전편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같이 다룰 예정입니다.
(외전은 총 2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