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간 골목길에는 용이 한 명도 없었다.
막다를 골목길에 도착한 고양이가 기지개를 쭉 폈다.
블랙은 고양이를 향해 걸어가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을 80년도 넘게 살 수 있는데, 그 중 고작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냐. 난 3년 씩이나 기다렸어. 3년 내내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어딜 도망가.
블랙은 내내 부르고 싶었던 그 이름을 불렀다.
잔뜩 악에 받친 채.
블랙 : "야, 데빌!!!!"
블랙이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고양이가 용으로 변했다.
동그란 눈동자와 강아지 같은 얼굴.
잠깐, 이거 데빌씨가 아니잖아.
당황한 블랙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용이 된 고양이가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폈다.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블랙을 바라보며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틴 : "이렇게 변신해야 따라올 거라고 하던데. 진짜였네"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여자가 블랙을 한 번 더 쳐다봤다.
블랙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파틴 : "저기, 너 블랙 맞지? 괜찮아?"
블랙 : "실례지만 누구세요"
파틴 : "어어......"
여자가 고민했다.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좋은지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파틴 : "예전에 같이 일했던 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악마라고 해야 하나. 이름을 말해야 하나? 음"
블랙은 머릿속에 있던 기억 상자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그 중에 딱 하나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데빌이 가끔씩 언급했던 직장 동료.
블랙 : "파틴?"
파틴 : "어, 맞았쒀! 내 이름 알고 있네! 데빌씨가 말해줬나? 나를 뭐라고 소개-"
블랙 : "데빌씨 꼬붕"
파틴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파틴 : "꼬붕 아니거든. 아니, 그런데 지금 내가 하러 온 일 생각해보면 심부름이니까 꼬붕 맞나. 그렇지만 아닌데. 절대 아닌데"
파틴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며 블랙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블랙은 오늘 만난다는 귀인이 파틴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심부름이라는 말을 쓰거나 주위를 전혀 둘러보지 않는 걸 보니 혼자 온 게 확실했다.
그런데 데빌씨 지금쯤이면 악마 일을 안 하고 있어야 맞을 텐데. 이 용이 나한테 온 이유가 뭐지?
블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틴이 손짓했다.
블랙이 다가갔다.
바로 앞에 선 파틴이 품 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파틴 : "나 순전히 심부름 하러 온 거야. 꼴랑 이거 하나 전해 주러 오는데 개고생은 물론이거니와 일도 내팽겨치고 왔다고"
파틴이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블랙 : "아, 감사합니다"
파틴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블랙이 눈치를 살폈다.
블랙 : "죄송해요. 이 안에 든 거 뭔지 모르겠지만... 이거 전해주러 여기까지 와주셔서, 그게, 어, 감사합니다"
파틴 : "더럽게 착하다는 말은 사실인가보네"
파틴이 미소 지었다.
파틴 : "뭐, 됐어. 이거 전해주는 거 허락 받는다고 데빌씨가 가장 고생 했으니까. 지금쯤 신 바로 옆에서 뒤지게 얻어맞고 있을 걸?"
블랙 : "진짜요?"
파틴 : "농담이야. 서류로 얻어맞고 있겠지 뭐"
블랙은 종이봉투를 품 안에 끌어안은 채, 파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파틴은 떠나지 않고 블랙을 쳐다봤다.
파틴 : "그 안에 있는 거 열어봐"
블랙 : "그래도 돼요?"
파틴 : "네가 그 안의 내용물 다 확인할 동안 여기 있어주는 것까지 심부름에 포함되거든. 여기 누가 올 일도 무슨 일 생길 일도 없을 거야, 안심해. 네가 안전하게 확인됐으면 한다고 굳이굳이 부탁을 해서 말이지. 나 뒤돌아 있을 테니까 다 확인하면 불러"
파틴이 뒤돌았다.
블랙은 고민하다 이내 종이봉투를 열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편지봉투와 작은 상자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에는 좌물쇠가 달려 있었다.
안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딱 맞는 열쇠가 필요했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앟았다.
열기를 포기했다.
대신 편지봉투를 열었다.
안에 편지가 한 통 들어있었다.
블랙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첫 문장은 '갑 블랙에게', 마지막 문장은 '을이 된 데빌씨가' 였다.
손이 떨렸다.
종이에서 파르르 소리가 났다.
데빌이 쓴 편지였다.
글자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블랙은 정신 차리려 애썼다.
편지의 첫 문장부터 집중하며 읽어 내려갔다.
갑 블랙에게
덕분에 난 이제 뿔이 없어졌어. 신의 옆에서 노는 게 내 직업이 되었어.
그렇지만 이 작은 종이봉투 하나 보내기 위해서 다시 서류지옥에 빠져야 했지.
신은 여전히 내게 예외는 없다고 말해. 대가나 희생이란 단어도 주구장창 사용하셔.
그래도 이 종이봉투를 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3년간 잘 지냈니?
블랙은 이 부분에서 종이를 구기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소중한 편지에 눈물이 떨어지는 게 싫어 팔을 들어 올리고 고개도 치켜 올렸다.
종이를 하늘에 대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3년간 잘 지냈니?
가끔씩 예전에 일하던 곳에 가서 파틴을 만나면 네 서류를 확인하고는 해.
거기에 시시각각 네가 어떻게 사는지 네 취향은 변하는지 네 키가 자랐는지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나와. 네가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볼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늘 그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네가 날 못 보는 만큼 나도 널 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고 하면, 좀 위로가 될까?
아무튼 그 서류를 보면 네가 3년간 여전히 레몬에이드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네 재능이 점점 커진다는 것도. 대단하지?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 그 서류에서 3년간 변하지 않는 항목 중 하나야. 넌 여진히 날 좋아해. 3년간 서류에서 단 한 글자도 바뀐 적이 없어. 수정되어 넘겨진 적도 없지.
좋아하는 용 데빌
이 한 줄이 나를 정말 미치게 했고 힘들게 했어.
그 한 줄에 무게가 있었어, 내 절망의 무게랑 똑같았어.
그렇지만 네가 여전히 날 믿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 그래서 역으로 희망을 얻은 적도 있어.
블랙아.
지지부진하고 지치고 구질구질 하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 그게 수시로 널 살게 만들 거야.
을이 된 데빌씨가
(추신 : 말해두는데 이거 계약서니까 버리지 마. 난 널 믿고 기다릴 거야. 약속할게.
블랙은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눈물을 닦고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파틴을 불렀다.
파틴이 뒤돌아보더니 다 확인 했냐 물었다.
블랙이 작은 상자를 내밀며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어디 흘리기라도 했냐 묻자 파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틴 : "계약서 읽어봤죠?"
파틴의 말에 블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틴 : "뭐, 계약서를 위장한 편지일 것 같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파틴이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 대빌의 서명이 있었다.
파틴의 손에서 펜이 생겨났다.
파틴이 손으로 종이를 문지르자, 똑같은 종이가 한 장 더 생겨났다.
파틴은 갑과 을이 한 장씩 가지고 있으면 된다며 평생 잃어버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블랙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 안에 함께 집어넣었다.
편지봉투를 손에 소중히 쥔 블랙을 보며 파틴이 피식 웃었다.
파틴 : "계약자 을인 데빌씨가 요구한 조건은 딱 두 가지예요"
블랙 : "을이 조건을 먼저 요구하는 계약도 있어요?"
파틴 : "맞아요, 태도가 완전 갑이라니까"
파틴이 키득키득 웃었다.
악마 같다고 말하자 파틴이 좋아하며 박수를 쳤다.
파틴 : "첫 번째 조건은 이 상자를 소중히 간직하기. 오늘 자기 전 처음 열어보는 것도 조건 포함이고. 두 번째 조건은 행복하게 살아주기"
파틴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뿔 모양 키링을 단 작은 열쇠가 짤그랑 소리를 냈다.
파틴 : "조건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계약 성립이고, 그러면 이 열쇠 드릴게요"
블랙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파틴이 블랙의 손 위에 열쇠를 쥐어주었다.
손 안에 열쇠가 들어왔다.
대답 안 했는데 왜 주냐고 묻는 블랙을 보며 파틴이 날개를 폈다.
필요 없는 대답은 굳이 안 듣는 주의라는 말이 돌아왔다.
파틴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블랙이 따라 손을 흔들어주자 파틴이 하늘 높이 날았다.
이내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님들. 원래 이번 편이 마지막 화 예정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완결은 좀 더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