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파틴은 으스스한 몸을 떨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잠시 잠에 들었는지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꽁꽁 언 손을 몇 번 쥐었다 펼치고는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길가에는 좀비가 몇몇 돌아다니고 파틴은 조용히 근처의 철근을 주워 챙겼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철근을 들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한참을 쉬지 않고 걸으니 다시 원점이다.
파틴 : "...하"
마카라와 헤어진 그 길목이었다. 멈추어 서서 괜히 입김만을 내뿜었다. 한참을 서서 마카라가 걸었을 그 길을 바라본다. 시간대도 그 때와 비슷했다. 태양이 저 높은 곳에서 파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괜히 발걸음이 가벼워져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쭉 걸어간다.
처음부터 따라가겠다고 할 걸. 마카라 나쁜 놈. 같이 가달라고 한 번만 말했어도...
그렇게 원망하려다가도 꼴이 우스웠다. 마카라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생각을 비웠다. 마카라를 만나면 마음속 모든 찜찜한 것들이 씻겨나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막힘 없이 걸어나가다 파틴은 페어플레이라고 크게 써진 이정표 앞에 섰다. 숨을 죽였다. 마을은 조용했다. 어떤 소리도 없이 시체 썩은 내만이 마을을 가득 채워, 파틴은 불안한 마음에 괜히 입술을 축였다.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을 분위기였다.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범위를 줄여갔다.
마카라 : '"나? ...나는 엄마 아빠랑 여동생. 마당에서 강아지도 길렀었어."
네 명이 살 크기의 집. 마당이 있는 집. 그런 집이 보일 때마다 파틴은 일단 들어갔다. 방을 하나하나 샅샅이 살피었고 좀비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죽였다.
네 번째 집까지 살피고 파틴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점점 초조해지고 행동이 급해졌다. 1층을 대충 둘러보곤 발을 현관으로 옮겼다. 이런 곳에 마카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있기를 바라지도 않고.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2층이었다. 계단 앞에서 파틴은 숨을 죽였다. 좀비가 돌아다니는 소리 같이 들리기도 했다. 왠지 마음이 걸려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2층엔 방이 두 개 있었고 복도에선 좀비 하나가 그르렁 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틴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저 멀리 던지곤 몸을 숙였다. 소리에 반응한 좀비는 물건이 떨어진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파틴은 조용히 그 뒤로 다가가 뒤통수에 철근을 꽂아 넣었다. 머리를 정확히 관통하여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첫번째 방문을 열었다. 동시에 퍼지는 피 냄새에 파틴은 코를 부여잡고 미간을 좁혔다. 교복을 입은 한 구의 죽은 몸만이 남아 날카로운 피의 냄새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아마 그는 가까운 사립학교의 학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죽은 몸 옆에는 산탄총 하나가 놓여있었고,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확실히 마카라는 아니었다. 파틴은 말 없이 문을 닫았다.
두 번째 방문엔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열쇠는 옆 방 책상 서랍 세 번째 칸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적혀있는 그 포스트잇을 떼어내 뚫어져라 쳐다봤다. 쉽게 들어가진 못하고 그 죽은 몸에서부터 시선을 최대한 멀리 떼어냈다. 끔찍하다. 심호흡 한 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작은 은색 열쇠 하나만이 덩그러니. 그걸 챙겨 결국은 잠긴 문 앞에 섰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괴로운 상상이 머릿속을 감싸쥐고, 숨은 턱 밑에 막혀 심장은 매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았다.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딸각 소리와 함께 문의 잠김이 풀렸다.
파틴 : "마카라"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이름만 나지막이 불렀다.
파틴 : "마카라. 나야."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굳어 있었다.
문을 열었다.
문 열리는 소리. 끼익 대지 않는 부드러운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그 소리 이후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방 안을 멍하니 쳐다본다. 힘 풀린 손끝은 벌겋게 얼어붙었다.
온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방이 무정했다. 만년필과 종이들로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책상엔 중국어를 쓰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파틴은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피비린내에도 파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책상 앞에 섰다. 편지 봉투가 하나. 정갈한 글씨체로 받는 이가 적혀있는 봉투를 망설임 없이 열어보았다. 파틴에게로의 것이었으므로.
1월 14일, 토요일.
팥. 안녕.
너만 알아볼 수 있도록 중국어를 써놨는데, 효과가 있었을까 모르겠네. 네가 정말 이걸 읽게 될 거라 믿지도 않고.....
자꾸 생각이 나. 떨쳐낼 수가 없어. 언젠가는 떠나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네 곁에 남았고, 떠나온 지금도 그래. 이상하지.
우리 오랜 시간 함께한 것도 아니고, 그리 친하고 소중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너를 떠난 밤 어딘가 길거리에서 밤을 보내며 잠은 한숨도 잘 수 없었어. 해가 떠오르면 추위는 나아지고, 겉옷을 벗어봐도 어딘가 놓을 곳이 없어서, 이대로 길을 되돌아가 걸으면 네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럼에도 멈추진 않았지. 나의 매걸음이 너와의 거리를 더 넓혀나간다는 괴로운 마음이 들어도 가족만을 떠올리며 걸었어. 그게 내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마음을 너에 대한 동정심이라 멋대로 결론을 내렸어. 그리고 나니까 앞뒤가 맞는 것 같더라. 동정심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할만큼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도 그랬을까. 너도 내가 떠난 길을 돌아봤을까. 뒤를 돌았을 때 내가 있길 바랬을까. 이유도 없이 말이야.
팥, 있지. 만약 네가 날 찾아왔다면, 그렇게 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길 바라.
네가 정말로 날 찾아왔다면 너도 내 생각에 잠을 못 이뤘길 바라. 내가 떠난 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길 바라.
네가 나를 찾아왔다면 떠난 나를 원망하길 바라. 또 보자는 말을 못 지킨 나를 미워하길 바라.
참 이상해. 나는 왜 목숨을 걸고 널 구했을까. 이름도 알 수 없는 널 구하러 좀비 밭 한가운데에 뛰어들고, 아찔한 상황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던 그게, 정말 동정심이었을까.
네가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면 나는 안 그런 듯이 웃었어. 괜찮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근데 팥. 그걸 나 자신에게 할 힘이 없어. 널 끊어내고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는 이미 감염이 되어있었고 동생은......
가족을 찾으면 너를 만나러 가야지 생각했었는데.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길을 떠나오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그게 잘 안 됐어. 권총 빌려줘서 고마워, 팥. 네 이름을 정확히 알았으면 좋았을 걸.
정말 네가 이걸 읽고 있다면, 정말로 찾아왔다면, 그렇게 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길 바라. 내가 그랬듯 너도 그냥 내가 좋았길 바라.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글 몇 자 적힌 종이 한 장을 들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렀다. 멈추지 않고 계속. 파틴은 벽에 기대 눈을 감은 마카라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 볼에 손을 댔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파틴 : "파틴. 내 이름이야."
파틴 : "... 이러라고 준 총이 아닌데."
중얼거린 파틴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헤엄치는 법을 드디어 알게 되었는데, 빠져있던 바다가 말랐다. 정신은 아득해 시야가 뿌옇다. 바닥에 쓰러져 입 밖으론 괴로운 소리만을 놓았다. 총은 거뒀다. 총알이 한 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