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애 주의.
제넷을 찾은 건 엠버의 발뒤꿈치에 피가 맺히기 직전일 때였다. 흐트러진 곳 없이 단정한 매무새는 누가 봐도 다 자란 20대 어른인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만은 유치원생 저리가라였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또래보다 씩씩한 탓에 늘 한 뼘씩 더 커보였던 우리 언니가 왜 이렇게 된 걸까. 훌쩍이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엠버는 안타까움에 이마를 짚었다.
엠버가 인턴 생활에 허덕이고 제넷이 취업에 허덕이던 시기였다. 바로 오늘 제넷은 여덟 번째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 본 지 몇 시간만에 전송된 불합격 통보를 시작으로, 밥 먹었냐는 안부 문자도 씹은 채 잠수 탄 제넷 때문에 엠버는 아닌 밤중에 마라톤을 뛰어야 했다. 좁디좁은 동네를 수없이 뛰어다니느라 한겨울에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몸은 추운 줄을 몰랐고, 짝짝이 슬리퍼를 끼워넣은 맨발은 살이 다 까졌음에도 아픈 줄을 몰랐다. 엠버는 점이라도 좋으니 제넷 생존 신고만 받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야속한 제넷은 그거 하나 들어주는 법을 몰랐다. 이 시간까지 혼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상맞게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엠버는 야속한 제넷밖에 몰랐다.
사나운 겨울바람이 살을 할퀴었다. 골목에 위치해 길고양이마저 돌아다니지 않는 편의점 앞, 끈적한 초록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제넷이 엎어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주변엔 빈 맥주 캔들이 즐비했다. 습기에 눅눅해진 숨을 고르느라 들썩이는 어깨 위로 품 넓은 후드집업이 걸쳐진다. 인기척에 돌아본 제넷의 시야로 엠버가 들어온다. 얇은 반팔 차림에도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였다. 제넷은 집업과 엠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뭐해.”
“언니 추울까 봐.”
“너나 입어.”
“괜히 튕기지 말고 줄 때 입어. 그러다 감기 걸려서 누굴 고생시키려고.”
제넷은 고집스럽게 집업을 치워냈다. 고작 맥주 몇 캔에 만취한 정신이 온통 흐릿했다. 고장 난 가로등을 닮은 내일이 금방이라도 까질 듯 깜빡였다.
“떨어진 거야?”
“보다시피.”
제넷은 잠시 온 사방으로 거대한 벽이 세워져 막다른 길에 내몰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력함에 웅크리고 있으면 날개 하나 없는 누군가는 홀로 넘어져 우울하고, 빔조차 쓸 줄 모르는 빈손을 미워한다.
“엠버야. 너도 내가 한김하니.”
“아까처럼 질질 짜는 꼴 보면 한심한데 괜찮아, 봐줄 만해.”
“거참 듣던 중 다행이구나.”
실망감의 크기만큼 사람이 굽는다. 엠버에겐 작아진 제넷을 달랠 요령이 없었다. 그저 별말 더하지 않고 자리만 지킬 수밖에. 몰랐던 추위가 손끝을 타고 뒤늦게 흘러왔다. 덜덜 떨고 있는 뒷모습이 밟혔다. 추우면서 안 춥다고 센 척하는 건 그대로인데 한숨 쉬는 버릇은 또 언제 배웠는지. 시퍼렇게 질린 손을 잡아줄까 싶어 제 것을 뻗으면 그새 눈치를 챈다. 슬며시 재킷 주머니 안으로 숨어버리는 얄미운 행동에 엠버고 결국 막힌 숨을 뱉었다.
“너무 기죽지 마.”
“그럴 거야.”
“언니 잘하잖아.”
“…응.”
“저녁 아직 안 먹었지?”
허공을 방황하던 엠버의 손이 무언가 떠오른 듯 제넷을 불렀다. 우리 저번에 먹었던 마라탕 집 갈까? 언니 거기 마라탕 맛있다며. 딱 언니 스타일이라고… 엠버야, 미안한데 나 혼자 있고 싶어. 제넷의 잠긴 목소리에 목적지를 찾았던 손은 다시 갈 곳을 일었다. 혼자 있고 싶구나. 이번에도… 이제 위로를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목을 긁는 숨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제넷의 마른 기침이 한탄과 섞여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탓할 줄만 아는 원망의 화살이 제 자신을 조준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내내 망설임에 그쳐야 했던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조금 쉬어가도 돼.”
“…”
“한 번쯤은 남한테 기대도 된다는 뜻이야.”
그게 엠버면 더 좋고. 삼킨 뒷말이 씁쓸하지만 딱 여기까지. 엠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걸렁 남겨진 제넷 옆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후드집업이 구겨져 있었다. 맞다, 그랬지. 파워레인저를 꿈꾸던 제넷은 취준생이 되었다. 엠버 또한 더는 파란색 깁스를 하고 웃던 그 아이가 아니란 뜻이다. 그걸 이런 식으로 깨닫다니. 잔뜩 금이 간 핸드폰 액정 위로 다음 면접 날짜가 뜬다. 눈물 젖은 옷소매가 축축하다. 춥지 않다던 몸은 자존심을 버리고 집업을 입었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히어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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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전에 여기서 활동했던 데빌입니다.
청룡의 해라길래 오랜만에 생각나서 와봤어요.. ㅎㅎ
언더씨 외전을 들고올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러면 또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나중에 또 생각 나면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