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어. 전방에 오미야콘이야."
프린세스가 앞을 가리킨다.
한 때는 오미야콘 지역의 한 마을이었던 곳.
흰푸른 눈보라에 완전히 뒤덮인 평지, 곳곳에 튀어나와있는 기형적인 빙하 조형물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곳이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안티아고가 묻는다.
"마을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이 사대신룡이 남긴 자취.
"서둘러서 펠드라 길드 측을 만나야 돼."
"만약 그들이 협력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필립 요원이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저희한테 적대적인데요."
"어떻게든 협력을 얻어야지."
"라피엘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말해주면 그들도 올바르게 판단할 거야."
그렇겠지.
릴리아 이솔데는 항상 옳게 판단하니까.
주변을 아무로 둘러봐도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나 드래곤의 흔적은 없다.
"이 눈보라 속에서 펠드라를 어떻게 찾죠?"
"상황이 생가보다 안 좋아."
"오미야콘 지역의 마을들은 이미 전부 당한 것 같아."
한 지역이 전부 사라질 수도 있는 거였나.
"2인 1조로 나뉘어서 수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린이랑 남쪽의 윈터펠 마을로 가볼테니 필립과 트로이는 서쪽에 있는 니보리아 지역으로 가줘."
"넵!"
"프란시스랑 안티아고는 오미야콘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이 있는지 한 번 더 검토해줘."
"그리고 펠드라 길드도 아직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아."
"넵, 프린세스님!"
안티아고가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안티아고는 엘드리안가를 나와서도 우릴 귀족으로 보는 것 같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절대로 혼자서 교전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초월한 빙하고룡를 상대하려면 우리 6명 전부, 그리고 펠드라 쪽의 힘을 모두 합쳐야 해."
"즉 랜스나 빙하고룡을 발견하면 그 즉시 통신으로 알리고 지원을 기다려!"
"넵!"
전원이 대답한다.
"만약 펠드라 측을 찾으면 협력을 요청해."
"발견 신호가 오면 같이 합류하는 거야."
합리적인 계획이다.
'계획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어딘가 잘못되기 전까지는.
---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당장 드래곤에서 내려 손을 머리 위로 들어라, 하운드!"
좋은 소식이 있다면 하루만에 친구들과 재회했다는 것.
나쁜 소식이 있다면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릴리아 이솔데에게 죽기 직전이라는 것.
'젠장, 이럴거면 하운드 가면을 안 쓰고 오는건데. 벗는 걸 깜빡했군.'
"잠시만요, 길드장님! 접니다, 이카루스!"
릴리아의 단호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사실 이미 지브롤터를 봤을 때 눈치를 챘던 것 같다.
"드래곤에서 내려 손을 들라고 했다, 하운드."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지금 저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랜스 엘드리안과 빙하고룡을 빨리 막아야 해요!"
"말이 안 통하는군."
번개고룡의 몸에서 번개가 쏟아져 나온다.
지브롤터의 암석 방벽 뒤에서도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진다.
벽은 다음 공격에 힘없이 무너진다.
번쩍!
쟁 —
번개 세례는 계속된다.
안티아고의 빙설룡도 방어하기 시작하자 세냐와 마룬이 드래곤에 올라탄다.
'정말 날 공격하겠다고?'
마룬의 새로운 파트너는 화려하기로 유명한 희귀종, 제피로스다.
"잠깐, 세냐! 마룬! 설명을 들어보라고!"
익숙한 공격이 지브롤터의 암석 갑옷을 깨트린다.
망할 놈의 광휘의 창.
"안티아고, 우리 둘이서는 안 돼!"
"그럼 맞고만 있으라고요, 도련님?"
'빌어먹을, 왜 대화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거야!'
"일단 말대로 따르자!"
"드래곤에서 내려서 손을 들어!"
지브롤터와 빙설룡이 둘 다 착륙하니 공격을 멈춘다.
두 손을 든다.
'젠장... 젠장..!'
릴리아 이솔데가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스로 합리적인 척은 다 하면서..'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을 모아야 할 동료를 공격하는 꼴 아닌가.
"둘을 묶어."
이솔데가 두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하운드 덴에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실망이야, 이카루스."
마룬이 밧줄로 내 팔을 서툴게 묶으며 말한다.
"나야말로 실망이야, '럭키마룬'."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지 예전 닉네임에 타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피로스는 럭키보다 강해."
"그리고 럭키는 파트너보다 윈드 드래곤으로서의 삶을 더 즐기고 있어."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거겠지."
"네가 나보다 럭키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마."
세냐는 처음보는 안티아고를 묶고 있다.
그녀에게는 안티아고가 7살 때 보았던 그 '하운드'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프란시스 엘드리안, 하고 싶은 말이란게 뭐길래?"
릴리아 이솔데가 물어본다.
'강한 건 맞지만..!'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운드 덴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상황을 설명한다.
막히는 곳에서는 안티아고가 보충 설명을 더해준다.
라피엘과 랜스 엘드리안, 그들의 만행.
그리고 현재 상황.
이솔데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한다.
'계속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군.'
"쉽게 말해 하운드 덴이랑 라피엘은 별개의 두 조직이고, 지금까지 모든 일은 라피엘에서 해왔다는 거지?"
"네. 그런데 라피엘에서 아직도 하운드 덴의 문양과 표식을 사용하고 있는 거고요."
"너희가 라피엘의 문양을 아직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은 너희도 초반에는 연구에 가담했다는 거 아니야?"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데에 책임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내 말이 틀린가?"
"기술을 사용하는 자의 악행를 연구자의 탓으로 돌리진 마시죠."
"식칼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무기가 되지 않습니까."
"연구진들은 이 기술이 이렇게 사용될 지 몰랐을 겁니다."
"그것도 그들의 탓 아닌가?"
"다른 세계의 정기와 반응력이 높은 보석, 그리고 마공학을 드래곤에게 접목시켜 놓고서 이렇게 사용될 줄 몰랐다는 건 이제와서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는 핑계잖아."
"기술을 연구하는 자들도 최소한의 윤리적인 경계는 지켜야 하는 거야."
반박을 하기 쉽지 않다.
나 역시 하운드 덴의 연구 목적과 방법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은 당장 너희 도움이 필요하니까 손을 잡도록 할게."
"이 학살은 멈춰야 하니까."
릴리아 이솔데.
끝까지 냉철한 이성적 대처다.
"대신 이번 사건 이후에는 철저한 조사 이후에 이 일과 연관된 모든 자들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이루어 질거야."
"우선은 그렇게 하시죠."
안티아고는 다른 생각이다.
"도련님! 말도 안돼요!"
"저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아마 하운드 덴에 더 오래 있으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입장이기에 이해가 된다.
"말했듯이, 그건 추후 조사에서 밝혀내면 되겠지."
"정말 모든 책임이 랜스 엘드리안에게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도 모르면서 조력자가 되어주고 있었는지."
릴리아 이솔데는 마치 이틀 전에 합류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듯 쳐다본다.
"이거부터 풀어주시죠."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마룬이 밧줄을 풀어준다.
눈 앞의 제피로스를 보니 또다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선 길드원들을 다 불러모으지."
다행이다.
펠드라의 병력이라면 안심이 돼.
"너희 쪽은 나머지 인원들이 어디있나?"
"빙하고룡을 찾기 위해 서쪽,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아마 발견되면 바로 연락이 올 거에요. 그때 다같이 합류해서 공격을 하는 게 우선 계획입니다."
"서쪽과 남쪽.. 우리 정보원들이 전해온 바로는 남쪽 지역으로 갔을 확률이 높다더군."
"아마 점점 대륙 중앙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야."
"더 내려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안티아고가 말한다.
"절대로 더 피해를 주게 놔둬서는 안돼요."
"글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글쎄라뇨? 당연한 소리에 '글쎄'는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난 아직 초월한 빙하고룡의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초월 전에도 번개고룡이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추운 지역에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그래서 지원군이 있는 것 아닙니까? 양 측에서 힘을 합하면-"
"우리 쪽 전투 인원은 10명이 다야."
'..전투 인원이 10명밖에 안된다고?'
"그리고 우리 길드.. 알잖아? 대부분 드래곤들이 불속성인 거."
"번개고룡도 그렇고, 게다가 추위에 약한 제피로스도 있으니 북쪽 지방에서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거지."
"언제나처럼 직설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교전을 한다면 북대륙에서는 할 수 없어."
"중앙 쪽으로 내려간 후, 지원군이 더 도착한다면 승산이 있겠지."
"만약 평범한 빙하고룡이었다면 10명이서 끝낼 작전으로 왔지만, 피해 규모를 봐도 그렇고 너희 설명도 들어보니 계획을 수정해야 될 것 같군."
"제가 옳게 이해한 건지 말해주세요."
지금..
"빙하고룡이 남쪽으로 이동하게 내버려 두겠다는 겁니까?"
대답이 없다.
"미쳤습니까!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인데!"
"그걸 그저 지켜만 보고 있겠다고요?"
한시라도 빨리-
"세냐! 마룬! 너희도 이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길드장님의 결정에 따를거야."
마룬.
세냐도 같은 모양이다.
"프란시스 엘드리안. 매번 경고를 해야 하는군."
또다시 이솔데의 기분나쁜 설교가 이어진다.
"현실을 직시해. 지금 닥친 위협은 패기로만 극복할 수 있는게 아니야."
"라피엘 길드 전원이 연루되어 있다면 우린 지금 초월한 빙하고룡과 루드오어까지 상대할 걸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
"그런데 상대가 유리한 북쪽 지방에서 싸워보겠다고?"
"만약 성급히 교전했다 진다면, 그땐 누가 그들을 막을거지?"
"..이기면 되잖아요."
"넌 항상 승리를 가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 같군. 너처럼 세상을 살면 정말 편하겠어."
"아, 결국은 이기게 돼있으니까 괜찮은 건가?"
지금 대회 얘기를..!
이미 엘드리안과 한 패가 아니란 걸 설명했는데도..!
"도련님, 진정하세요."
옆에서 안티아고가 속삭인다.
"확실하게 이길 방안이 있으면 제시해 봐."
"하지만 펠드라 길드는 대륙의 운명을 두고 무모한 도박을 하진 않을 거다."
이솔데가 마지막으로 못을 박는다.
이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이길 확률과 맏바꾸려고 하고 있다.
분한 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실상 놓고보면 빙하고룡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오미야콘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살이 얼어붙을 듯이 춥다.
'지브롤터는..'
피부 표면에 얼음 결정들이 생겨나고 있다.
반면 빙하고룡... 초월까지 했다면..
잠시 진정하고 둘러보니 주변 마을의 흔적이 보인다.
브레스의 흔적.
가구 수십 채가 빙하 속에 영원히 갇혀서 눈에 묻히고 있다.
정녕 이 힘에 맞설 수 있을까.
"도련님.. 프린세스님과 나머지 분들께 펠드라 길드의 입장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안티아고.
그래. 어쨋든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어.
"그, 이들 말대로 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선 정보라도 공유..해야 될 것 같아요."
"아니, 안티아고,"
"이들 말이 맞는 것 같아."
"여기서 싸우는 건 승산이 없어. 프린세스 누님한테 전해."
"작전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고."
...분하다.
최근 들어 벌써 두 번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닥쳐온다.
분명 모두를 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옳은 선택을 한 거야, 이카루스."
세냐가 옆에 다가와서 위로하려고 시도한다.
흰 광야에 서니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이다.
친구들은 변했다.
릴리아 이솔데는 너무나도 차가운 현실을 제시한다.
안티아고와 하운드 덴의 요원들에게도 이 '현실'이 우선인 듯하다.
'내가 더 강하기만 했다면... 빙하고룡을 제압할 힘이 있었다면.'
그럼 모든 게 다 괜찮았을텐데.
---
남쪽으로 향하는 비행은 춥고도 오래 걸린다.
혹한의 냉기에 지브롤터도 바람을 뚫어내기에 고전한다.
우선 펠드라 길드와 하운드 덴의 나머지 요원들이 모두 윈터펠 마을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곳에서 확실한 빙하고룡의 흔적이 발견된 모양이다.
최종으로 합의된 계획은.. 일정 거리를 두며 추격하는 것.
대륙의 중반부에 들어서는 텐파 지역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예정이다.
'그곳에서 결전을 짓는다.'
하운드의 정보원에 따르면 걸리는 시간은 약 14시간.
그 사이에 있는 마을은 열 개도 넘는다.
"쉬지 않고 가야 한다. 전원 탑승!"
릴리아 이솔데가 펠드라 길드원들을 지휘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운드 덴의 6명은 간단히 정보만을 교환한 후 조용히 비행한다.
중간중간 보이는 마을들은 이미 푸른 얼음 속에 잠들어 있다.
이전보다 더욱 거대한 일이 대륙을 닥치고 있다.
며칠 후에 있을 메이저 대회도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상 최초이다.
"펠드라 길드도 주요 인원이 다 소집됐고, 라피엘은 말할 것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지."
프린세스가 설명한다.
"그나저나 프ㄹ.. 루드오어도 라피엘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생각이 궁금하다.
정보 요원들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프란델?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럴 인간으로는 안 보였는데..."
"저번에 널 잡으려던 거 보니 사실상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기는 해."
그렇구나.
형이라서 딱히 실망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실제 가족도 아니니까.
다만, 만약 루드오어까지 상대해야 된다면...
설상가상 루드오어도 초월을 했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 초월의 보석은 정말 제작하기 어렵거든."
"이미 빙하고룡만 해도 우리 예측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서 초월을 한 거라."
"초월한 드래곤이라는게 그렇게 강한가요?"
"사실 정확히는 아무도 모르지. 처음으로 성공한 거니까."
"그래도.."
마침 한 마을의 상공을 지나간다.
처참한 광경을 보고있자니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
상상을 뛰어넘는 힘.
만약 지브롤터가 초월을 했다면..?
그랬다면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런 기회가 왜 주어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