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잊을 수 없는 추억 (15)
나이트의 검은 칼리시의 몸통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그의 검격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칼리시는 지팡이를 놓고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나이트 드래곤은 그저 조용히 지팡이를 뽑아낼 뿐이었다.
“이거…. 였구나.. G스컬님이 그냥 당하실 분이 아니었는데….”
칼리시는 이제야 나이트 드래곤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네놈이 특별한 건 그 빛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보다 더 특별한 건 하늘의 신전이 무너졌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그 힘이었던 거지….”
꽂힌 지팡이를 뽑아내고서 그의 팔뚝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얼마 안 가 멈추었다. 나이트 드래곤이 빛의 힘으로 그새 상처를 아물게 했다.
“이토록 불합리한….”
“우습군, 던전의 미물들이 불합리함을 논하다니.”
검을 쥔 그의 위로 향했다. 이제 저항할 수 없는 그녀의 목을 잘라내는 것만이 남았다.
칼리시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에게 착 달라붙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고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젤라틴?”
그 후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당겨졌다.
“후훗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닥쳐라.”
“이놈들이….”
이상함을 인지하고 나이트 드래곤이 핑크 젤라틴을 저지하러 달려갔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었다.
바닥에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붉은색으로 빛나며 넘어갈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핑크젤라틴은 사라지면서도 나이트 드래곤에게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아쉽게 됐습니다. 당신이 그녀가 아닌 나를 막으려 했다면 달라졌을지도….”
-
“그렇게 그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대신룡도 함께.”
나이트 드래곤이 사라졌다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양손을 펼치며 이야기를 끝냈다. 번개고룡은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을 추려보고 법진을 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네 말대로라면 이 문자들은 던전으로 이동하기 위한 법진인 것 같네.”
“법진을 사용할 수 있겠나?”
번개고룡은 눈을 찌푸리며 결계 너머의 문자를 보았지만 역시 알아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용은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봐서는 정확히 무슨 문자가 되어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어”
“알아볼 수 없다?”
“아마 그 젤라틴 혹시라도 누군가 이 법진으로 그쪽으로 다시 갈 수 없게끔 외부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 같은데. 근데 애초에 들어가질 못하니 무슨 의미인지 싶지만.”
“만약 들어가면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건 그렇긴 한데…. 아까부터 사용 여부에 대해 굉장히 집요하네…. 그게 중요해?”
“중요하다.”
나이트 드래곤은 말을 하자마자 그의 손에서 약간의 노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있으니까.”
천천히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붉은 색의 벽을 향해 나이트 드래곤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빛나는 황금색의 빛을 감은 자신의 두 손을 그 결계에 갖다 댔다.
나이트 드래곤의 손이 벌벌 떨리더니 처음에는 양쪽의 다섯 손가락의 끝부터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두 손 전체가 전부 들어갔고 그 후 나이트 드래곤은 굳게 잠긴 문을 강제로 비집고 열 듯이 결계를 찢어 약간의 공간을 만들었다.
“들어가면 돼?”
“그래.”
번개고룡은 고개를 숙이며 나이트 드래곤이 찢어놓은 그 결계로 들어갔다.
“어으..”
구역질이 나오려는 기운을 참아가며 안쪽에서 주문을 확인했다. 대부분 그녀가 아는 주문이었다.
“뭔지 알겠나?”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번개고룡은 주문을 일부 지우고 고쳐쓰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G스컬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순간이동 될 공간을 다시 설정하고 순간 이동할 물체를 특정해 적어나갔다.
이리 간단했다면 왜 처음부터 순간이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걸 말하자면 ‘수정’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간이동 법진을 만들려면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던전이 아닌 이상 날아가는 게 훨씬 빠르다.
그 핑크젤라틴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거대한 법진을 만드는 것은 드래곤으로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몬스터여서일려나..’
번개고룡이 주문의 수정을 마치고 그에게 돌아왔다.
“끝났나?”
“어, 이제 내가 이 주문에 번개를 흘러 넣게 되면 작동하겠지.”
“그럼….”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뭐지?”
“....고대신룡하고는 무슨 관계야?”
-
“그 드래곤은 뭐 하는 녀석인데?”
“그저 평범한 나이트 드래곤이었습니다.”
피닉스가 하는 질문마다 그는 그저 말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처음으로 금오가 제대로 말해주었다.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태초에…. 당신이 불의 산을 수호하는 피닉스가 되기 전에 일어났던 빛과 어둠의 전쟁을요.”
“지겹게도 들었지. 헬 그놈이 그걸로 날 엄청나게 볶았다고. 자기는 그걸 눈앞에서 봤다느니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둥. 아오…. 갑자기 빡치네.”
“그 전쟁으로 많은 빛과 어둠의 드래곤이 죽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숨겨진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대신룡이 자신의 빛 일부를 떼어내어 다른 드래곤들에게 전해준 겁니다.”
“...그게 말이 돼?”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졌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습니다만, 그 고대신룡의 빛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힘을 쓸 수 있는 드래곤은 나이트 드래곤이 유일했습니다.”
피닉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흠…. 뭔가 이상하네? 그때는 아모르의 연결이 끊긴 것도 아니었을 텐데. 나이트 드래곤 같은 녀석을 만드는 게 어려웠을까?”
그것은 질문이었을까. 금오는 그녀가 아는 지식 너머에 대한 물음에 늘 같은 방식으로 답해주었다.
“현재로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내가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바보는 아니야. 그리고 내 경험상 넌 무조건 뭔갈 알고 있어. 맞지?”
“...그것에는 답해드릴 순 없습니다.”
“말하지 마, 이미 확신하고 있으니까.”
“어떤 나이트 드래곤…. 네가 말한 그 녀석이 유일했던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야.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거지. 다른 드래곤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던 이유도 그렇게 되어야지 빛과 어둠의 전쟁이 완전한 고대신룡의 승리로 되는 게 아니니까.”
“과한 추측입니다. 어째서 아모르가 고대신룡의 편을 들지 않겠습니까.”
피닉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래 추측이지. 더 해볼까? 내 생각에는 아모르는 처음부터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던 거야 고대신룡도 다크닉스도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 없도록 조정 했을 뿐이지.”
“왜? 균형의 수호자였던 그 녀석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유타칸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
“그렇게 둘 중 누구도 완전하게 승리하지 못한 결과. 고대신룡은 약해졌고 다크닉스는 봉인되었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모르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거지. 균형은 언젠가 깨지게 될 테니까.”
“그게 그 나이트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깨진 균형을 바로잡을 드래곤이.”
“아니 걔도 결국 도구에 지나치지 않아.”
“그렇다면….”
“빛과 어둠의 전쟁은 단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었어. 처음부터 그 전쟁을 끝맺을 녀석은 걔가 아니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두 번째 고대신룡이 아모르의 계획이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금오가 웃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던 금오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뭐야. 왜 웃어? 죽고 싶은거야?”
처음 보는 금오의 모습에 피닉스는 그저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괜히 부끄러웠다.
“놀랐습니다.”
“갑자기? 뭐를”
“당신은 역시 평범한 드래곤이 아닙니다.”
“어쩌라고.”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하는 금오가 언짢았다. 그러나 다음에 금오가 한 말은 그녀가 예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피닉스의 눈이 커지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해도 되는 거냐? 뭐 정해진 길 어쩌고저쩌고….”
“말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들을 자격이 됩니다.”
피닉스가 잠시 뚱해지고선 괜히 가만히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의 크기를 더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그저 이야기를 즐거워하는 해치 드래곤처럼 순수한 눈을 하고서 금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뭔데? 그 진실이란 거.”
“당신 말대로 빛과 어둠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자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모르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고대신룡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죠.”
-
(“다크닉스, 내가 어떻게 너를 죽이겠어.”)
고대신룡의 빛의 검은 다크닉스의 목 앞에서 멈추며 베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다크닉스의 검은 불꽃을 두른 손은 고대신룡의 복부를 관통했다. 다크닉스는 이성을 잃은 채로 고대신룡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대신룡도 공허하면서 길을 잃은 분노를 담은 다크닉스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태, 고대신룡도 느꼈다. 더 이상 자신은 그를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의 희생이 헛되게 할 필요는 없겠지”)
-------------------
오랜만입니다.
다행히 ep.40을 넘기지 않고 하늘의 신전 에피소드가 끝이 났네요. 다음 화부터는 다시 원래의 분량으로 끝까지 달려보겠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