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DERSEA는 제가 미리 써놓았던 글을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드빌의 드래곤들로
덮어씌운 것이기 때문에
작중 미처 수정하지 못한 원래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올 수 있습니다.
( UNDERSEA 1화, 2화도 다시 읽어봤다가 수정 못하고 놓친 부분들이 꽤나 있었어서 읽으면서 너무 놀랐어요..)
3월. 겨울의 끝자락, 봄의 착수. 그렇다고 추위가 가신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꽃피는 계절에 한 걸음 다가온 것이 아니던가. 아침에 일어나선 자는 데빌의 머리를 쓰다듬고 점점 녹아가는 눈사람을 내다보는 것, 그게 블랙에겐 낙이었고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나면 꿈틀거리는 눈썹, 곧 있으면 떠지는 눈과 칭얼거리는 말. 그게 망한 세상에서 블랙이 활력을 잃지 않을 수 있던 비결이었다.
데빌 : ".....너 언제 일어났어?"
블랙 : "한참 전에. 너도 늦장 그만 부리고 얼른 일어나. 겨울도 다 지났으니까."
데빌 : "다 지나긴 뭘. 아직도 추운데..."
추운 건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봄을 애타게 기다려온 것이다. 블랙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블랙이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거의 한 뼘 가량 쌓여있던 눈이 이젠 다 녹아 없어졌다. 데빌과도 재회했고 밴쿠버 생존자 그룹에 합류도 했으니 이젠 편하게 따뜻할 일만 남았던 것이다.
그 넓던 밴쿠버는 지난 10월 좀비 사태가 터지고 나서부터 이스트 밴쿠버와 콜링우드를 중심으로 높은 장벽이 만들어져 원래 밴쿠버 크기의 15배 가량으로 좁혀졌다. 블랙은 데빌과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좁은 그 안으로 겨우겨우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미 장벽 안은 용으로 미어터지고 있던 것이었다.
"뭐요? 이봐요. 난 여기 원래 살던 사람이라고요! 슬로칸스트리트 4150번지요!"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용과 실랑이를 하던 것을 마침 분리수거를 하러 나온 데빌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블랙은 아마 그 날 장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블랙 말고도 장벽 안으로 들어오려 애를 쓰고 있는 용들이 많았다. 한달을 넘게 그 앞에서 기다렸다는 용도 있었지만 블랙은 데빌 덕에 용케 안으로 들어왔다.
애초에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1월 30일에 고신과 있던 공항을 떠났으니, 몇몇 길이 무너져 있던 걸 감안하더라도 블랙이 밴쿠버에 도착했어야 한 건 적어도 2월 1일이었다. 기름 빵빵한 차량을 몰고 왔음에도 블랙이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들어온 건 아무래도 서툰 운전 탓이었다.
아나함 레이크 시내에서 운전 좀 했다고 자신감이 붙은 것도 모자가 고신에게 잔뜩 화가 난 채로 출발한 것인지라, 7할 정도 가서는 차를 나무에 들이받아버렸던 것이다. 그대로 남은 길은 걸을 수 밖에 없었는데 심지어는 길도 잘못 들고 난리도 아녔다.
그렇게 밴쿠버 장벽에 겨우 도착해서도 우연히 마주친 데빌과 재회를 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안으로는 발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블랙을 들여보내면서도 용들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데빌 : "블랙, 나 따뜻한 물 좀 떠다주라."
블랙 : "내가 무슨 네 신부름꾼이야?"
툴툴거리면서도 시키면 다 한다. 데빌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선 이불을 뒤집어쓰고 블랙이 데워온 물을 한 모금 했다.
블랙은 데빌과 사태 이전부터 장벽 안 지역에 살았었다. 블랙과 사귀게 된 후 데빌의 집에 블랙이 자연스레 얹혀 살면서 동거를 시작했는데, 종종 투닥거리곤 했지만 두 용은 행복했다. 정말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크게 싸웠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9월 말이었다.
블랙 : ".....그러니까 또 내 탓이란 말이지?"
데빌 : "왜 말을 그렇게 해."
블랙 : "맞잖아. 내 말이 틀려? 또 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거잖아."
그 무렵 블랙은 마침 잠깐 훌쩍 떠나고 싶어했다. 원체 자유로운 성격인지라 한곳에 오래 메여있었으니 답답해했는데, 차가운 눈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데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블랙은 그 길로 짐을 챙겼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데빌을 뒤로하고 집을 나와 아무 버스나 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싸운 당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재밌어 보이는 게 있으면 무작정 내렸고 숙박은 싸구려 모텔이나 게스트 하우스에서 전전했다. 계획은 밴쿠버가 있는 주인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한 바퀴 돌고 한 달 안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So-called "zombies" are attacking people indiscriminately. The Canadian government has shown no response other than a message to refrain from going out. Are we going to go into anarchy? The medical professionals tell.....
(이른바 좀비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메시지 이외의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정부 상태로 돌입하고 있는 걸까요. 전문 의료진들은.....)
그러나 10월이 재앙을 몰고 온 탓에 계획은 변경되었다. 최대한 빨리 밴쿠버로 돌아가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블랙은 방향 감각이 없었고, 지도를 손에 들고도 자꾸만 반대로 걸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12월이 되고 1월이 돼도 도저히 돌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나함 레이크라는 아주 작은 마을의 이정표를 발견해 고신을 만나 겨우 차를 얻어 밴쿠버로 돌아온 게 2월이고, 그게 블랙이 데빌의 곁을 떠난 지 4개월째였을 때였다.
데빌 : "블랙, 조금만 더 잘까."
블랙 : "내가 물도 떠다 줬는데 더 자자고?"
데빌 : "이리 와서 좀 안아줘."
원래 애정표현이 통 없던 사람이라 데빌이 이럴 때마다 블랙은 꼼짝 없이 당했다. 블랙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데빌은 블랙이 밴쿠버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종종 모든 게 다 꿈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곧 깨어나서 네가 떠나 없는 그 어느 날에 깨어날 것만 같다며 울먹이면 가슴이 미워져서 통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4개월 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말라서 손목은 앙상했다.
블랙은 데빌을 품에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블랙도 정말 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 품에 안겨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그 자그마한 뒤통수에, 나 여기 있어, 꿈이 아냐. 그렇게 속삭이고 블랙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