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의 날개

9화: 붉은 그림자의 습격과 구원
청염이 열어준 푸른 불꽃의 길은 루미나리스와 그레이록을 불의 산 초입에 내려놓고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공중을 부유하던 신비로운 마력이 사라지자마자, 루미나리스는 폐부를 찌르는 뜨겁고 매캐한 공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으나, 그곳엔 오직 검은 화산재 구름과 자신들을 쫓던 어둠의 잔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청염의 따스한 마력은 이제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고, 루미나리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한 고립과 상실감을 마주했다.
발밑의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열기를 내뿜었다. 그레이록은 땅에 박힌 발톱을 바르르 떨며 주위를 살폈다. 숲의 부드러운 흙 대신 발바닥을 달구는 거친 현무암 지대는 어린 해치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했다. 루미나리스는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의 풍경은 온통 핏빛과 잿빛뿐이었고, 공중에는 타버린 영혼의 조각 같은 검은 그을음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미나리스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는 것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의지를 꺾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억지로 떨림을 멈추고 굳건히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두 해치는 굶주림과 갈증을 견디며 산의 가파른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길목마다 솟아오르는 유황 증기는 시야를 가렸고, 때때로 발밑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참을 걷던 중, 그들은 바위 틈새에서 기이하게 요동치는 '화석화된 화염 넝쿨'을 발견했다. 루미나리스는 본능적으로 그 식물이 가진 치명적인 독성을 감지했지만, 동시에 그 메마른 줄기 안에 응축된 마력의 결정체를 보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저주받은 땅의 독기조차 양분으로 삼아야 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앞발로 넝쿨을 찢어 그 안의 찐득하고 붉은 즙을 핥았다.
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전신을 훑었고,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하지만 고통의 끝에서 미약했던 심장 박동이 불꽃처럼 강하게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루미나리스는 자신의 혈관 속으로 흘러드는 열기를 느끼며 깨달았다. 이 산의 열기는 자신을 죽이려는 적이 아니라, 자신이 다루어야 할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그레이록에게도 넝쿨의 즙을 나누어 주었다. 둘은 서로의 눈에 깃든 생존의 불꽃을 확인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 찾아오자 불의 산은 굶주린 괴수처럼 포효했다. 땅밑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은 뼈마디를 울렸고, 능선을 따라 흐르는 용암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핏줄처럼 번뜩였다. 루미나리스와 그레이록은 간신히 몸을 눕힐 수 있는 좁은 바위 틈새를 찾아 몸을 숨겼다. 차가운 밤바람과 뜨거운 지열이 충돌하며 동굴 안은 기묘하고 습한 안개로 가득 찼다. 루미나리스는 지쳐 잠든 그레이록을 자신의 날개 아래 품었다. 그레이록은 잠꼬대처럼
“루미나리스, 우린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숲의 냄새가 그리워..."
라고 중얼거렸다. 루미나리스는 대답 대신 그의 차가운 머리를 조용히 쓸어내리며 밤을 지새웠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루미나리스는 홀로 깨어 붉은 하늘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았다. 비늘 사이사이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청염의 푸른빛과는 다른, 더욱 치열하고 파괴적인 주홍빛이었다. 고난은 그녀의 껍질을 벗겨내고 더 단단한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다짐했다. 이 고통은 자신을 태워 없애려는 불길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강철로 벼려내려는 시련의 풀무질임을.
이튿날 아침, 화산재가 잠시 잦아든 틈을 타 루미나리스는 동굴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멀리 산 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연기 기둥을 보며 그녀는 그레이록에게 속삭였다.
"가자, 그레이록.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저 위야. 그곳에 도달했을 때, 우린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닐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잿빛 대지 위로 루미나리스의 작지만 단단한 발자국이 깊게 새겨졌다. 그것은 멸망해가는 유타칸의 중심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연대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고독하고도 장엄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안 가 화산 기슭에서 루미나리스에게 가고일처럼 생긴 몬스터들이 돌진을 해왔다. 그레이록은 재빨리 움직여 그것을 막았지만, 여전히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고일들을 그들이 당황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첫 번째 가고일이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붉은 무언가가 눈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