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빛이 잠든 대지
태초에 유타칸이라 불리는 대륙이 존재하기 전, 세상은 오직 무채색의 하공뿐이었다. 소리도, 온기도, 흐르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던 정적의 공간. 그 침묵을 깨고 최초의 진동이 시작되었을 때, 두 개의 거대한 의지가 허공에서 잉태되었다.
하나는 만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형체를 부여하는 찬란한 빛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물을 안식하게 하면 깊은 심연의 질서를 세우는 숭고한 어둠이었다. 두 의지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공존했다. 빛이 대지를 빚어내면 어둠이 그 위에 안식의 그림자를 드리웠고, 빛이 강물을 흐르게 하면 어둠이 깊은 바다의 신비를 채웠다.
그 찬란한 빛의 정점에서 탄생한 존재가 바로 고대신룡이었다. 그의 비늘은 태양의 파편을 박아 넣는 듯 눈부셨으며, 그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대지에는 꽃이 피고 생명이 꿈틀거렸다. 반대로 어둠의 정수에서 태어난 다크닉스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머금은 듯한 칠흑의 날개를 가졌으며, 그가 날개를 펼치면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영혼들은 평온한 휴식을 얻었다.
당시의 유타칸은 용들과 인간, 그리고 수많은 정령이 함께 어우러진 지상낙원이었다. 고대신룡과 다크닉스는 대륙의 양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세상의 균형을 지켰다. 낮과 밤의 경계는 명확했고, 생과 사의 순환은 거스를 수 없는 성스러운 섭리였다. 사람들은 신을 경외하며 노래했고, 용들은 구름 위를 거닐며 세상을 보살폈다. 그것은 유타칸 역사상 가장 길고도 아름다웠던 ‘조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낙원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균열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둠의 주인 다크닉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역할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빛이 비추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둠, 빛이 만든 생명들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찾아오는 어둠. 그는 자신이 빛의 보조자일 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왜 빛만이 칭송받아야 하는가. 왜 어둠은 늘 빛의 뒤편이어야 하는가.”
질투는 독이 되어 그의 심장을 파먹었고, 숭고했던 어둠은 파괴적인 증오로 변질되었다. 다크닉스는 결국 금기된 심연의 힘을 끌어들였다. 조화의 상징이었던 그의 칠흑빛 날개는 생명을 집어삼키는 죽음의 장막이 되었고, 유타칸은 비명 횡사하는 생명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 찼다.
평화는 한순간에 박살 났다. 다크닉스의 타락에 경악한 고대신룡은 형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미 광기에 휩싸인 다크닉스에게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서늘한 파괴의 마력뿐이었다. 결국 고대신룡은 유타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형제에게 검을 겨누어야만 했다.
이것이 훗날 모든 기록에서 지워질 뻔했던 빛과 어둠의 대전쟁의 사막이었다.
전쟁은 처절했다. 하늘에서는 거대한 용들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며 추락했고, 대지는 쏟아지는 마력의 여파로 갈라져 용암을 뿜어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유타칸의 절반 이상이 불모지로 변했다. 푸르렀던 숲은 잿더미가 되었고, 찬란했던 도시들은 고대 유적이라는 이름의 무덤이 되었다.
전쟁의 끝자락, 고대신룡은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다크닉스를 죽이기도 전에 대륙 자체가 소멸할 것임을 직감한 그는, 자신의 영혼과 생명력을 담보로 거대한 봉인술을 전개했다. 하얗게 타오르는 눈부신 섬광이 하늘과 대륙 전체를 뒤덮었다. 그 빛은 다크닉스의 어둠을 걷어내고 그를 심연 깊은 곳,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영겹의 감옥 속에 가두어버렸다.
하지만 승리의 대가는 가혹했다. 힘을 소진한 고대신룡 역시 육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주인을 잃은 용들은 슬픔 속에 잠적했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신이 떠난 폐허 위에서 다시 삶을 일구어야 했다. 신화는 그렇게 비극적인 마침표를 찍으며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수천 년의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 격렬했던 전장의 상흔 위로 새로운 흙이 덮이고 푸른 풀이 돋아났다. 무너진 성벽 위에는 담쟁이덩굴이 자라났고,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보며 용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고대신룡의 희생과 다크닉스의 광기는 이제 어린아이들을 잠재우기 위한 옛날이야기나, 술집에서 떠도는 허무맹랑한 전설로 전락했다. 마법사들은 고대 문자를 해독하며 그 시절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신성한 힘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유타칸은 이제 신비가 사라진 대륙, 오직 인간의 땀과 노동만이 가치를 갖는 평범한 땅이 되었다.
세상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은 살얼음판 위의 걸음과 같았다. 심연의 감옥에 갇힌 다크닉스의 원한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응축되고 있었고, 흩어진 고대신룡의 빛 또한 대지의 어디선가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며, 다시 한번 빛과 어둠이 조우할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 끝, 거대한 제국과 마법 도시들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에델’이라 불리는 작은 농촌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전쟁의 역사도, 신화의 엄중함도 비껴간 듯한 평화로운 장소였다.
황금빛으로 물든 보리밭 위로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왔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보리 이삭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거대한 황금빛 파도 한가운데, 작고 가녀린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루아.
열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는 제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밭두렁을 걷고 있었다. 루아의 순백색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은색 실타레처럼 공중에 흩란렸다. 마을 사람들은 루아의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천사의 깃털을 닮았다”며 신기해하곤 했지만, 정작 루아 본인은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색깔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영차…!”
루아는 밭 한쪽 그늘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허리를 쭉 폈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콧등을 소매로 쓱 닦아내자, 흙먼지가 조금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녀의 밝은 레몬색 눈동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이 멀어버릴 법한 강렬한 태양 빛이었음에더, 루아는 그 눈부심이 오히려 포근하다고 느꼈다.
루나는 머리 한쪽에 꽃힌 노란 문양의 머리핀을 매만졌다. 출신도 부모도 알 수 없는 고아인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물건. 마을 어귀에서 갓난아기였던 그녀를 발견했을 때부터 배냇저고리에 함께 꽂혀 있었다는 이 핀은, 루아에게 있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루아! 거기 있느냐?”
멀리서 들어오는 이장의 목소리에 루아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 아저씨! 여기 고구마 다 담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청아하게 울려 퍼져, 보리밭의 정적을 기분 좋게 깨트렸다. 루아는 자신이 왜 남들과 다른 머리색을 가졌는지, 왜 자신의 눈이 이토록 선명한 노란빛을 띠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뜨는 태양이 반가웠고, 흙을 만지면 느껴지는 대지의 온기가 좋았으며, 자신을 거두어준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오늘이 행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아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밭을 일구며 밟고 있는 이 평범한 흙 아래, 아주 깊은 곳에서 고대의 마력이 그녀의 발검음에 맞춰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무심코 꽂고 있는 그 머리핀의 문양이, 수천 년 전 유타칸을 수호했던 성스러운 문장과 닮아있다는 것을.
소녀는 다시 괭이를 들었다, 밭을 일구는 그녀의 가녀린 팔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희미하게 산란하는 빛의 가루가 흙먼지 사이로 섞여 들었다.
신화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륙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순순한 마음을 가진 소녀의 일상을 통해, 유타칸의 새로운 장이 이제 막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고, 루아의 웃음소리는 황금빛 보리밭 너머로 길게 뻗어 나갔다.
-프롤로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