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많이 내렸다. 모닥불이 꺼진 아침은 찢어지도록 춥다. 고신은 눈을 뜨자마자 꽁꽁 언 몸을 이끌고 건물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겉옷도 없이 눈 쌓인 밖에 나와 건물 주변을 급히 살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머물렀던 곳을 눈으로 빠르게 훑고 다음 층으로 뛰어갔다. 3층에도, 4층에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옥상 문 앞에 섰다. 숨이 차오르는 건 계단을 급히 올라왔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을 벌컥 열었다. 눈이 쌓인 옥상을 살피다 뒤쪽 난간에서 고신은 작은 회색 수첩과 파란 볼펜 한 자루를 찾을 수 있었다.
1월 12일 (흐림)
고신이 위험했다. 돌아오는 게 늦어져 급하게 찾으러 간 게 정말 다행이었다. 몇 분만 늦었어도...... 생각하기 싫다. 고신을 잃는다니, 끔찍하다. 그렇지만 그건 고신도 마찬가지겠지.
(하람의 지역 언어로 쓰여있어 읽을 수 없는 문단이 있다.)
쉽게 믿기진 않는다. 이상 하나 없이 건강하던 이 신체가 그들처럼 될 것이라니. 총에 맞은 것도 칼에 찔린 것도 아닌데, 내가 정말 죽게 될까. 정말 죽게 되어, 널 혼자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가게 되는 걸까. 정말 우린 망가지게 되는 걸까. 내일이면 지긋지긋한 덴버도 떠난다. 정말 오래 지낸 집인데도 정 하나 없이 신물이 났다. 덴버는 너무 위험하다.
1월 13일 (흐림)
물리고 고작 한 밤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열이 심하다. 상처는 곪아가기 시작하고 왼팔엔 감각이 없다. 그렇지만 아픈 건 아직까지 버틸만 하다.
이럴 줄 몰랐다. 고신도 몰랐겠지. 고열이 끓어 죽는단 말은 우리 둘 다 못들어봤으니까. 감염 후 발현 전 그 사이의 일에 대해선 무지했으므로.
너무 춥다. 콜로라도에서 오래 지냈지만, 겨울이 이렇게 추웠던가. 추워. 너무 춥다, 고신.
(하람의 지역 언어로 쓰여있어 읽을 수 없는 문단이 있다.)
우린 무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1월 14일 (눈)
정신이 흐릿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젠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고신은 영문도 모르면서 내 곁을 잔인하게 지킨다. 내 입으로 말해야만 하겠지. 괴로운 사실을 전해야만 하겠지. 이건 너무 잔인하다. 감기를 앓는다 생각하면서도, 고작 그런 정도에도 괴로워하는 고신의 마음이 날 바닥 어딘가로 끌고 내리는 것 같다.
(하람의 지역 언어로 쓰여있어 읽을 수 없는 문단과 문장이 있다.)
1월 15일 (흐림)
고신. 어제 물어봤던 그거 있잖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얼 할 건지.
있지, 만약 막을 수 없었다면, 나는 죽을 것 같아.
이 모든 걸 버텨 받아내라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니.
나는 죽어버릴 것 같아.
나 물릴 때도 아프지 않았어. 상처가 썩어들어가고 고열이 들끓는데도 난 괜찮았어. (하람의 지역 언어로 쓰여진 문장이 두 개 있다.)
넌 무엇을 갈망하니.
우리도 신이 만든 작품인 걸까. 비극으로 끝을 마무리하는 그런 슬픈 문학 작품 같은 것.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아. 그렇지만 네 옆에선 절대 안 되지. 우리는 총도 없으니까, 내가 만약 네 옆에서 되살아난다면..... 응. 그런 일은 없게 해야지.
1월 16일 (눈)
살아. 꼭 살아야 해. 이게 내 마지막 말이야. 넌 이 괴로운 문장을 붙들고 앞으로를 살아나가야 해. 실버손으로 가, 고신.
너는 나 없이 살 수 없을 테지. 나 또한 그러할 테니.....
그래서 글을 남겨.
꼭 살아남아.
사랑해. 잊지 말길. 하람.
중간중간 하람의 지역 언어가 끼어있다. 고신이 읽을 수 있는 문자는 자기 이름과 사랑이란 단어 뿐이었고 그걸론 한참 부족했다. 그럼에도 고신은 거기에 빼곡히 적혀있던 하람의 절망을 정면으로 맞았다. 가르쳐준다고 할 때 한국어 배워둘 걸. 고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신 : "내일 보자며. 내일 보자며, 하람. 응? 내일....."
같은 말만 계속 만복하며 그동안 삼켰던 비명을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건물 아래는 차마 내려다 볼 수 없었다. 듣는 이도 없는데 뭉개지는 발음으로 힘겹게 말을 쏟아냈다.
"내일 보자며.....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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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인용한 시의 제목은 '두 사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