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땅의 값어치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슈퍼졸부가 되었다.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그 땅 값이 정말 끝도 모르고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한 건 내가 중학교를 막 입학하던 때였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엄청난 액수의 돈 얘기를 막 듣게 되었을 때, 그 땐 나름 순수성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어쩌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고작해야 차를 간신히 바꾸고 주말에 자주 가던 삼겹살집에서 한우를 파는 식당으로 외식 장소를 바꿀 정도였다. 그러나 그 순수한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때 쯤 우리 가족은 완전히 다른 가족이 되어 있었다. 이전의 삶을 완전히 잊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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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1학기가 막 시작 되었을 때 강남학군으로 전학을 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부터였다. 엄마가 사교육에 눈을 뜨고 막 열을 올리던 시기가 그 때였다. 물론 내 템포는 엄마와 달랐다. 학군을 바꾸고 그 학교를 다니며 달리 텃세를 부린 적도 없는 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미묘하게 섞여들지 못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마치 잘 조여 매여진 매듭 같은 아이들 틈에 나 혼자만 어울리지 않게 흐트러지고 풀어진 모습으로 앉아있었으니까.
너무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바뀌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는 집, 먹는 음식, 입는 옷, 다니는 학교, 만나는 사람들, 그냥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그런 스트레스 탓인지 학군 탓인지 1학기 기말고사 때는 전교 꼴등이라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즈음 아마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엄마가 교무실을 들락거렸던 같다. 애들이랑 어울리지 못해서, 수업태도가 좋지 못해서, 불려다닌 이유는 너무 많았지만 제일 컸던 건 아무래도 그 바닥을 기는 내 성적이었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위신과 반 평균 점수를 마구 떨어뜨리는 주범이었고 더 이상 떨어질 등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엄마의 무안한 얼굴과 담임의 암담한 얼굴이 겹쳐 내 입지를 더 쪼그라들게 만들면서도 이상하게 반대로 반항심은 끝도 없이 자라나게 했다. 곪아 터지기 직전의 여드름처럼 내가 어떻게 터져버릴 지 나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방법은 있다고, 그 학교에는 봉사 점수나 생기부에 기재할 수 있는 특별 활동들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었다. 멘토멘티 제도도 그 중 하나였다. 성적이 낮은 멘티에겐 성적을 올릴 기회를, 멘토를 자처하는 애들은 그만큼 입시에 유리하게 얻을 수 있는 가산점을.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제도였음에도 멘토라는 자리에 앉기 위해 아이들은 기꺼이 제 피 같은 한 시간이라는 시간을 기증했다. 반대로 나 같이 바닥을 기는 학생에겐 그 제도를 선택하고 말고 할 권리조차 없었다. 담임 말로는 나와 매칭이 된 멘토는 전교 10등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던 아이였다.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난 늦은 오후, 띄엄띄엄 자리를 띄워놓고 낯간지럽게 배치를 해둔 책상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그 학교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이제 시작 단계가 아닐까 직감했다. 정말로 예감이 좋지 못했다.
상상으로는 숱하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학교를 벗어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서술하던 반항아의 표본처럼 교복 타이를 풀어 헤치고 조끼를 벗어 던지며 학교를 욕보이는 것. 분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상담실로 끌려가 상담을 하는 상상까지 마친 나는 현실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자리를 뗄 수 없다는 것에 속으로 굉장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필 내 멘토라는 그 애가 1학년인 것 부터가 내 심기를 더욱 더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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