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신의 예술 세계는 엔젤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고신이 화난 것에 가까운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릴 때면 엔젤은 찍소리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서 고신을 기다렸다. 딱히 방해하지 말라고 히스테리를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엔젤은 그 세계에 빠져든 고신을 감히 건들 용기가 없었다. 다른 걸로는 다 지랄발광 해도 그 세계에 빠져든 순간을 터치할 용기는 없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엔젤은 그런 고신을 기다렸다. 탁 허벅지를 내려치고 앞치마를 벗고 손을 씻고 자신에게 다가올 때 까지. 물론 그 이후부턴 괜한 앙탈이지만.
몽글몽글하고 폭신폭신한 구스다운 이불 밖으로 머리만 빼어낸 채로 고신이 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렇게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젤 위에 있는 고신의 캔버스엔 도통 뭔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막 그려져 있다. 근데 또 제 애인 그림이라고 깍지 껴진 눈엔 그 2억에 팔려가던 그 물감 튄 것 같은 그림보단 뭔가, 뭔가 조금은 더 예술적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치만 정확히 뭐라고 해석 할 순 없다. 입 밖을 그림을 팔아치우던 그 경매장의 사회자처럼 표현할 말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고신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엔젤과 나누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엔젤은 뭔가 참을 수 없는 화를 억지로 누르고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아르테미스는 그걸 괜히 열폭하는 거라고 했다. 그게 열폭이지 뭐냐. 니가 잘 모르니까 그냥 존나 빡치는 거잖아. 아르테미스의 옆에 앉아있던 데빌은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는 아르테미스를 따라 웃었다.
살다 살다 내가 열폭한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말만 그렇게 엔젤은 벌게진 얼굴로 정색했다. 정확하게는 고신에게 열폭하는 건 아니고 그냥 고신의 작업실을 들락거리는 에이전시 직원들, 특히 사장. 그 돌싱에 40대 줄에 접어든 늙은 여우같은 그 용과 고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해설할 줄 아는 용들. 그런 거에 좀 빡치는 거지. 나는 죽어도 그게 안 되니까.
곧 죽어도 안 될 엔젤에게 1순위는 고신이었고, 그건 에이전시를 차리고 고신을 밟아 버린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일 거다.
얼굴에 물감 묻은 것도 모르고 열일하네. 고신이 잠깐 뭔가를 찾으러 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릴 때 나 봐달라고 끼 부리며 쳐다봐도 볼따구에 푸른색 물감 묻힌 고신의 시선은 분주하게 테이블 윌르 오가다가 다시 이젤 위의 캔버스로 돌아가 버린다.
끼 부리다 말고 고개 돌리자마자 뚱한 표정으로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노려봤다. 어차피 말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할 거고. 그럼 또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1순이가 저거라서. 지 그림이랑 엔젤이랑 동시에 물에 빠지면 지 그림 건지고 같이 죽겠다 할지도 몰라서. 엔젤은 또 슬슬 삐뚤어져서 차근차근 단계별로 빡쳐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