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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Ep.03

15 실버윙7
  • 조회수10
  • 작성일2026.07.16

그림자


Ep.03: 붕괴








눈을 떴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기분 나쁠 정도로 무겁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아침 공기였다.



빛의 용들이 모여 사는 이 구역은 언제나 티 없이 맑고 가벼우며, 사방을 정화하는 쾌적한 빛의 마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이곳의 당연한 규율이자 존재의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짙고 차가운 안개가 지면 바짝 낮게 깔려 있었다. 백색의 고결한 비늘 사이사이를 끈적하게 적셔오는 습기 탓에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에 무거운 납덩이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거처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정갈한 자세로 날개 깃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완벽한 아침을 시작했을 텐데, 둥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첫 순간부터 날개 축지가 기분 나쁘게 뻐근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젖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흰 날개를 가볍게 터는 찰나, 사흘 전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머릿속을 둔탁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사방이 소란스럽고 번잡하기 짝이 없던 축제장, 그리고 그 난잡한 소음들 한가운데에서 마주쳤던 사납고 불길한 검은 눈동자. 흉측하게 돋아난 비늘을 잔뜩 세우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쏘아보던 그 불쾌하고 거친 흑룡의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왜 하필 지금 그 지저분한 녀석이 생각나는 걸데?



스스로에게 지독할 정도로 화가 나고 짜증이 밀려왔다. 고결하고 순수한 빛의 용들의 구역을 이끌어갈 유일한 후계자라는 내가, 왜 그 음침하고 뼛속까지 거친 어둠의 용 따위를 이 신성해야 할 아침에 떠올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한 번 의식의 틈새를 파고들기 시작한 기억은 끈질긴 덩굴손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 녀석의 거친 주둥이와 반항적인 눈빛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폭하게 어지럽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원인 모를 불쾌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잊어버려. 그런 한심하고 거친 녀석 따위, 내 고귀한 머릿속에 단 일 초도 담아둘 가치조차 없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긴 꼬리를 둥지 바닥에 탁, 탁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머릿속에 이끼처럼 달라붙은 흑룡의 잔상을 억지로 지워내려 애썼다. 스스로에게 차갑게 다그치듯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리며, 나는 그 불길한 생각들로부터 도망치듯 서둘러 둥지를 벗어나 거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침 공터에는 흐릿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끼리끼리 모여 있는 다른 어린 빛의 용들이 보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후계자로서의 품위와 격식을 지키기 위해 멀찍이 서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불쾌한 짜증과 잡념들을 어떻게든 털어내야만 했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 최대한 밝고 여유로운 척 그들에게 다가갔다. 대단치도 않은 사소한 장난감이나 어제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의 우스꽝스러운 모양 같은,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늘어놓으며 나는 아이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어 소리 내어 떠들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커지고 공터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머릿속을 괴롭히던 흑룡의 잔상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려던 바로 그때였다.


"후계자라는 자가 이 이른 아침부터 품위 없이 소란을 피우다니,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


등 뒤에서 들려온 지독하리만치 서늘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공터의 온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차가운 눈살을 찌푸린 채 엄격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빛의 용들의 구역 원로가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세운 척추와 매정한 눈빛을 마주하자, 아침부터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억울함과 불쾌함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그저 평범하게 동족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후계자라는 가식의 틀을 씌워 숨 막히게 조여대는 이 상황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순간 참지 못하고 반발심에 주둥이를 열어 그 뻣뻣한 얼굴에 대들려 했다.


"저는 단지—"


내가 미처 세 마디도 뱉기 전에, 원로가 쥐고 있던 지팡이 끝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차가운 백색의 정화 마법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크윽……!"


가슴팍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관통하는 듯한 이질적이고 매서운 빛의 마력이 전신을 휘감아 내렸다. 굳어버린 날개 끝과 등 뼈 마디마디가 빳빳하게 마비되며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고통스러운 정화의 기운은 내 안의 작은 반항심과 자아마저 강제로 짓누르고 부수며 숨통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제대로 숨을 들이쉬지 못해 파르르 비늘을 떨며 비틀대는 내 위로, 원로의 자비 없는 잔소리가 사슬처럼 감겨왔다. 그것은 가르침을 빙자한 잔인한 협박에 가까웠다.


"네 몸에 흐르는 빛의 마력이 조금이라도 흐려지거나 더러운 감정에 오염된다면, 너는 더 이상 이 빛의 용들의 구역을 수호할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가식적이고 쓸데없는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후계자의 고귀한 자격을 스스로 더럽히지 마라. 만약 다음번에도 이와 같은 천박한 나태함을 보인다면, 네 비늘에 새겨진 정화의 낙인을 더욱 깊고 고통스럽게 새겨 넣어야 할 테니까 명심해라."


목덜미를 짓누르는 정화 마법의 잔인한 온기를 느끼며,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이 고이는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주둥이가 부르르 떨려 대답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복종의 뜻을 표하자 원로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불쾌한 소동 이후에 이어진 오전 훈련은 그야말로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 지옥 그 자체였다. 원로의 마력 탓에 욱신거리는 가슴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날개 때문에 비행 제어와 빛의 구체 방출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나를 감시하는 교관들의 눈초리는 매 순간 칼날처럼 살벌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마저 나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수천 개의 차가운 눈동자처럼 느껴져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기분이 바닥을 뚫고 엉망진창으로 가라앉은 채 겨우 오전 일과가 끝났을 때, 나는 날갯짓 한 번 할 힘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가 있었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공터 한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먹이 보관소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에는 빛의 용들의 구역에서만 자라는 탐스러운 황금빛의 멜론 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겉 표면에서부터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이 과일은 평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달콤한 먹이였다. 앞발로 멜론을 하나 집어 들고 껍질을 찢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극상의 달콤함과 시원하고 청량한 과즙이 훈련과 억압으로 타들어 가던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며 전신을 적셨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 좋은 단맛에 잔뜩 찌푸려졌던 미간이 조금씩 펴졌다. 억망이었던 아침의 기분이 아주 조금은 부드럽게 풀리며 위로받으려던 바로 그 평화로운 찰나였다.



쿵—!



갑자기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격렬하게 흔들리며,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충격음이 공터 전체를 뒤흔들었다.



단단히 쥐고 있던 황금빛 멜론이 놀란 내 손에서 미끄러져 시꺼먼 흙바닥 위로 으깨어지며 볼품없이 굴러떨어졌다. 입안에 감돌던 달콤함은 순식간에 모래를 씹은 듯 써늘하게 흩어졌고, 공터 경계를 이루고 있던 거대한 빛의 결계선 쪽에서 가쁜 숨소리와 함께 거친 먼지바람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하아, 하아……! 비, 비상이다……! 신전이……!"


아침 경계 순찰을 나갔던 빛의 용 두 마리가 상공에서 제어력을 잃고 거의 추락하듯이 공터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들의 수려하고 아름다웠던 흰 비늘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긁힌 듯 엉망으로 터져 있었고, 은빛 먼지와 흙으로 얼룩진 몰골은 참혹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은 감당할 수 없는 극도의 공포와 큰 충격으로 미친 듯이 뒤혹들리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가슴팍이 부자연스럽게 들썩였고, 완전히 이성을 잃고 패닉에 빠진 탓에 주둥이 근육이 마비되어 제대로 된 문장조차 뱉지 못하고 허공에 발을 버둥거렸다.


"그, 기둥이…… 신전의 중심이…… 아, 안에서부터 처참하게……!"


"진정해라! 대체 무슨 일을 보고 왔길래 수호자의 명예도 잊은 채 이리 흉측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이냐!"


웅성거리며 어수선해진 공터 중앙으로, 우리 빛의 용들의 구역을 총괄하고 다스리는 위엄 있는 지도자가 거대한 백색 날개를 낮게 깔며 묵직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눈부신 후광을 두른 지도자의 등장에 겁에 질려 웅성거리던 다른 어린 용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며 서둘러 길을 비켜섰다. 지도자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긁고 있는 순찰대원들의 어깨를 거대하고 단단한 황금빛 앞발로 짓누르며 준엄하고 단호하게 물었다.


"상세히 고하라. 용의 신전에 어떤 이변이라도 생긴 것이냐?"


순찰대원 중 몸집이 조금 더 큰 한 마리가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주둥이를 벌려 공터 전체를 얼려버릴 듯한 비명 섞인 외침을 뱉어냈다.


"용의 신전의…… 빛의 기둥이 거의 쓰러질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훼손되었습니다!"


그 순간, 공터에 모여 있던 모든 빛의 용들의 숨소리가 단 일 초 만에 약속이라도 한 듯 완전히 멎었다.



빛의 기둥이 훼손되었다니. 세계의 동력과 균형을 지탱하고, 무엇보다 우리 빛의 용들의 구역 전체의 마력과 생명을 유지해 주는 그 신성한 원천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멸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이 구역의 모든 빛이 소멸하고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서 굶어 죽거나 소멸할 것임을 뜻하는 최악의 묵시록이었다.



언제나 인자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지도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득였고, 지도자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려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넘어진 순찰대원들을 매섭게 다그쳤다.


"누구의 짓이냐! 결계를 침입한 어둠의 용들의 흔적이나, 신전 주위에 흩어진 마력의 잔해를 명확히 포착했는가!"


"그, 그것이…… 아무리 기둥 주변을 살피고 냄새를 맡아도 외부 침입자의 흔적이나 마력의 찌꺼기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 강한 충격을 주어 부순 것이 아니라, 마치 기둥 자체가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 균열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도무지 누구의 마력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대답이 공터에 떨어지기 무섭게, 조금 전까지 숨죽이고 있던 평화로운 공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빛의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면 우리 빛의 용들은 모두 사라지는 건가?"


"다른 사악한 속성의 용들이 우리 구역을 멸망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게 분명해!"


"당장 무기를 들어라! 신성한 기둥을 건드린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해주마!"


공포와 분노가 한데 뒤섞인 어린 용들의 울음소리와 어른 용들의 거친 사효가 공터의 높은 하늘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다들 이성을 잃고 서로를 밀치며 혼란을 배가시켰다.



지도자는 흘러넘치는 대혼란 속에서도 이빨을 꽉 악물며 애써 지도자로서의 평정을 연기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백색 날개를 하늘 높이 활짝 펼쳐 빛의 장막을 가볍게 터뜨리며 소란을 잠시 진정시킨 뒤, 옆에서 대기하던 가장 강인한 정예 용 대여섯 마리를 차가운 눈빛으로 빠르게 지목했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지금 당장 신전으로 향한다. 직접 눈으로 기둥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태를 수습함과 동시에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 즉시 움직여라!"


지도자가 거친 돌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급상승하자, 공포에 질려 다리가 풀렸던 순찰대원들도 거의 울다시피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검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의 거대한 실루엣이 구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공터에는 아주 짧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그 고요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까보다 훨씬 더 무질서하고 끔찍한 대혼란이 폭발하듯 번져 나갔다. 어른 용들은 각자의 무기와 방어 마구를 챙겨야 한다며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어린 용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자신의 안전한 거처로 도망쳐 숨기 바빴다. 언제나 기품 넘치고 우아하게 정돈되어 있던 빛의 용들의 구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생존에 대한 추악한 본능과 통제되지 않는 공포만이 사방에서 난도질하듯 거칠게 날뛰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웅웅거리는 이명과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 그저 얼어붙은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빛의 기둥이 무너진다면, 빛의 용들의 구역을 짊어질 후계자라는 내 존재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비늘과 영혼에 낙인처럼 새겨진 이 끔찍한 의무와 속박도 기둥과 함께 부서져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더 혹독하고 참혹한 지옥으로 변해 나를 옥죄어 올까.



엄습하는 실존적 불안감에 휩싸인 채, 나는 멀찍이서 심각한 표정으로 둥글게 모여 밀담을 나누고 있는 원로들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원로의 차갑고 뻣뻣한 하얀 도포 자락을 앞발로 다급하게 부여잡으며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로님, 빛의 기둥이 정말로 손상된 게 맞나요? 대체 그 단단하고 신성한 기둥이 어떻게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질 수가 있는 건가요? 제게 설명을—"


그러나 원로는 내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단 한 번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른 늙은 원로들과 머리를 잔뜩 맞댄 채, 아침에 내게 호통을 칠 때보다 훨씬 더 굳어지고 음산하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무언가를 다급하게 속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후계자라는 내 존재의 간절한 질문은, 그들의 이기적이고 심각한 밀담 속에 무참히 짓밟혀 흔적도 없이 무시당했다.



나는 힘없이 떨리는 앞발에서 힘을 빼며, 펄럭이던 원로의 하얀 도포 자락을 고스란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소란스럽고 먼지가 날리는 공터 한가운데에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뻘쭘하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주변을 채운 수많은 동족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돌아보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고결함과 후계자로서의 의무를 강요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그 끈적하고 숨 막히던 눈길들은 온데간데없고, 다들 제 하찮은 목숨을 부지하고 가문을 챙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내 은백색 날개 깃 사이를 쓸쓸하고도 가차 없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판단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거대한 사건을 마주하고 내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행동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사방으로 흩어지며 공포에 질려 울부짖던 어린 빛의 용들이 내 화려한 흰 비늘을 발견하고는 구름처럼 내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룡! 네가 우리 빛의 용들의 구역을 지킬 위대한 후계자잖아!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로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면 우리 다 어둠 속에서 죽는 거야?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


"네가 가진 그 대단한 빛의 마력으로 기둥을 당장 고쳐놓으면 되잖아! 제발 우리를 살려줘!"


내 날개 깃을 무자비하게 붙잡고 흔들어대는 다급하고 이기적인 손길들, 그리고 귓가를 사정없이 찔러대는 날카로운 비명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피로감과 혐오감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왜 다들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나라고 이 상황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이리 내 목을 조르는 거야.



억눌려 왔던 분노와 감당하기 힘든 환멸이 동시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는 후계자라는 무거운 족쇄 아래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기계처럼 굴게 만들었으면서, 정작 진짜 위기가 닥치자 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며 매달리는 이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에 온몸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넌더리가 났다. 나는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가냘픈 아이들의 발톱을 사납게 떨쳐내며, 평소의 온화함을 완전히 버린 채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비켜.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마."


뒤에서 들려오는 배신감 섞인 웅성거림을 무시한 채, 나는 거처를 향해 앞만 보고 사납게 달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공터의 혼란을 뒤로하고, 내 어둡고 고요한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꼬리로 돌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



사방이 일시에 적막 속에 잠겼지만, 내 머릿속은 결코 고요해지지 않았다. 빛의 기둥이 부서졌다는 극도의 위기감, 나를 도구로만 보는 원로들의 잔인한 침묵과 협박,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짓눌러오는 후계자로서의 압박감이 한데 뒤섞여 머리를 깨뜨릴 것처럼 아프게 조여왔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해소되지 않는 심신의 피로가 마비된 전신의 비늘을 타고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더 이상 단 일 초도 서 있을 만한 정신적, 육체적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채 정리하지도 못해 흐트러진 둥지의 꺼칠한 가죽 위로 툭 쓰러지듯 온몸을 던졌다.



딱딱하고 거친 가죽 바닥에 뺨이 닿아 쓸렸지만,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 심신은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닫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정없이 갈라져 으스러진 빛의 기둥의 잔해와 불길한 흑룡의 눈동자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어지럽혔다. 나는 그 거대한 공포와 답을 찾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불안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으며, 현실로부터 도망치듯 깊고 짙은 수면의 나락 속으로 빠르게 잠겨 들었다.











지독하게 써늘한 바람만이 황량하게 쓸고 지나가는 들판이었다.



구름조차 발밑으로 아득히 가라앉아 있는 곳, 아래로 용들의 여섯 구역이 마치 정교하게 빚어낸 미니어처처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높은 고산지대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흔한 들짐승의 울음소리나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떤 생명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공간인 듯, 이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무거운 고요함뿐이었다.



스슥. 스스스슥.



그 기묘한 정적을 깨뜨리며, 바스락거리는 잔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의 거대하고 단단한 발톱은 메마른 땅 위에 돋아난 질긴 잔디를 거칠게 짓밟아 뭉개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서 있는 그들의 비늘 위로 차가운 고산지대의 바람이 부딪쳐 산산이 흩어졌다. 난리가 난 아래쪽 구역들의 참상을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한참 동안 관찰하던 한 마리가 턱을 괴며 주둥이를 열었다.


"재밌네. 고작 이딴…… 기둥 하나로 이렇게 왈가왈부할 줄이야."


가소롭다는 듯 뱉어낸 조소 섞인 목소리가 차가운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서 있는 고도에서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용들의 절박한 비명조차 그저 미약한 벌레들의 웅웅거림처럼 하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한 마리가 거대한 꼬리를 느릿하게 까닥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 제 딴엔 중요한 것일 테니. 뭐,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갈까?"


그 질문을 끝으로, 고산지대에는 다시 한번 무겁고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던 녀석이 제 턱을 훑으며 피식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녀석은 아래에서 아수라장이 되어 이리저리 날뛰는 백색의 형체들을 즐겁게 뜯어보며, 아주 길게 뜸을 들인 후에야 잔인할 정도로 황홀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좀 더 구경하다가 넘어가도록 하지. 그 편이 훨씬…… 즐거울 것 같으니까."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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