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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Ep.02

15 실버윙7
  • 조회수21
  • 작성일2026.07.16

그림자


Ep.02: 균열






축제가 끝난 지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햇살은 잔인할 정도로 따스했다. 어둠의 용들의 구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맑고 투명한 하늘빛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온기마저 거처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내게는 그저 피부를 찌르는 이물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마다 무거운 꼬리가 건조한 흙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덜 깬 잠결에 웅웅거리는 머릿속으로 오늘 치러야 할 혹독한 훈련 일정들이 굴 줄기를 타고 늘어서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날개 뼈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삐걱거리는 감각에, 깊고 눅눅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로감이 혀끝을 써늘하게 적셨다.



숨을 크게 들이쉬기도 전에, 단단한 무언가가 내 이마를 정면으로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눈은 멋으로 달고 다니느냐, 흑룡!"


쿠당탕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며 시큼한 흙먼지를 잔뜩 들이마셨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는 사흘 전 축제장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날이 서 있었다. 묵직한 발톱으로 내 연약한 날개 언저리를 짓누르며 사납게 내려다보는 스승의 붉은 눈동자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제대로 고개를 치켜들기도 전에 매서운 호통이 사정없이 귓전을 후려쳤다.


"훈련장에 가기도 전에 다리가 풀려 비틀대다니. 어둠의 용들의 구역을 짊어질 후계자라는 놈이 이따위 정신머리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기강이 빠져도 유분수지, 축제의 단물에 절여져 뇌가 썩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지독하게 끔찍하고 징글맞은 원로들 같으니라고. 아침부터 짖어대느라 목청도 좋네. 저렇게 펄펄한 걸 보니 아주 백 년은 더 살아서 날 괴롭히겠어.



속으로 거칠게 욕을 짓씹으며 주둥이를 앙다물었다. 겉으로는 반항하는 기색을 철저히 지운 채,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긴 꼬리를 안으로 바짝 말았다. 어둠의 용들의 구역에서는 어떤 말대꾸도 곧 나약함이자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조금이라도 억울한 기색을 비추면 돌아오는 건 뼈가 으스러지는 매질뿐이었다.



스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 동안이나 내 조상의 핏줄까지 들먹이며 쏘아붙이고서야 겨우 짓누르던 앞발을 치웠다. 짓눌렸던 날개 축지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피어올랐다. 흙먼지를 채 털어낼 틈도 없이, 나는 그 거대한 검은 덩치 뒤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가파른 협곡 꼭대기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매서운 채찍질 같은 잔소리가 가는 내내 귓가에 웅웅거렸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앞발은 무거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겨우 땅을 짚어 나갔다.



훈련장의 바닥은 메마르고 날카로운 깨진 바위투성이였다. 어둠의 용들의 구역 특유의 습하고 거친 바람이 계곡 사이를 날카롭게 찢으며 불어왔다.



공중에서 무방비하게 떨어지는 바위와 타격구들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는 지독한 훈련이 반나절 넘게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아직 덜 여문 어린 용의 비늘 사이로 사나운 칼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른 용들이 사정없이 내뿜는 묵직한 어둠 마력구가 쉴 새 없이 꼬리와 등 비늘을 강타했다. 쿵, 하고 바닥에 처박힐 때마다 온몸의 비늘이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날개를 더 팽팽하게 펴라! 어둠의 방패가 겨우 그 정도로 깨져서야 어둠의 용들의 구역의 찬 바람을 어찌 버티겠느냐!"


스승의 고함이 귀를 찢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던 찰나, 사납게 날아온 검은 기류가 내 뒷발을 쓸어버렸다.



푹, 하고 날카로운 돌 끝에 뒷발 발목이 깊게 긁히는 감각이 감각 세포를 타고 생생하게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화끈거리는 열감과 함께, 뜨거운 핏방울이 메마른 회색 흙바닥 위로 붉게 떨어져 물들었다.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루도 피를 보지 않거나 붕대를 감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쁜 호흡과 땀방울이 찢어진 비늘 틈새를 적셔오는 감각은 짜증스러움을 서서히 머리끝까지 부풀렸다. 주둥이를 찌푸리며 신음조차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무는 와중에도, 스승은 그저 멀찍이 서서 싸늘한 눈으로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자세가 또 무너진다, 흑룡! 그 정도 긁힌 고통을 참지 못해 얼굴을 구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괜찮냐는 다정한 말 한마디는커녕, 상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들여다보려는 기색조차 없는 저 메마르고 지독한 눈빛. 훈련이 완전히 끝나자마자 스승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자리를 떠났다.



피곤과 통증에 찌든 몸을 이끌고 겨우 가파른 경사로를 내려와 거처로 기어 들어왔다. 어두운 둥지 구석에서 앞발과 이빨을 이용해 굴러다니던 꺼칠한 붕대를 물어뜯어 상처 부위에 대충 칭칭 감았다. 서두르는 손길 탓에 상처가 쓸려 욱신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흐르는 피만 멎게 한 뒤, 나는 비틀대며 쓰러지듯이 가죽과 마른 잎이 두껍게 깔린 둥지 깊숙한 곳에 온몸을 던졌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듯 아파왔고 날개 축지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데, 기이하게도 머릿속이 쨍하게 깨어나며 잠은 오지 않았다.



둥지 천장에 불규칙하게 깎인 돌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품을 크게 내뱉었다.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이 끔찍하고 자비 없는 일상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 걸까. 일주일 뒤에 또 그 하얗고 번지르르한 갑주를 입은 백룡 앞에 서서, 상처 하나 없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억울함과 피로감이 뒤섞여 가슴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그때였다. 지독하리만큼 조용하던 공터의 결계 경계선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가 요동쳤다.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가 너무 가파르고 다급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둥지 밖에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거칠고 거대한 무언가가 땅에 처박히듯 쿵 떨어지는 육중한 진동이 거처 바닥을 타고 징그럽게 울려 퍼졌다.


"비켜라! 지도자님은 어디 계시나! 당장 뵙고 고해야 할 중대 사안이 있다!"


경계 순찰을 나갔던 어둠의 용들의 구역 순찰대원 두 마리였다. 거처 입구의 좁은 틈새로 고개를 슬쩍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날개 깃은 식은땀과 검붉은 흙먼지로 떡이 져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주둥이 틈새로 더운 콧김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나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온 것처럼, 그들의 두 눈은 충격과 공포로 크게 번들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용의 신전이…… 신전의 기둥이 무너졌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순찰대원 한 마리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빛의 용들의 구역을 수호하는 빛의 기둥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고통으로 쑤시던 온몸의 신경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용의 신전에는 각 구역을 수호하고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여섯 개의 거대한 기둥이 존재했다. 빛의 기둥, 어둠의 기둥, 바람의 기둥, 물의 기둥, 불의 기둥, 그리고 땅의 기둥. 전설에 따르면 이 기둥들은 각 속성의 용들이 살아가는 구역의 원천을 지탱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신성하고 강력한 마력의 동력원이었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온 구역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대역죄로 취급되는 절대적인 성역 중의 성역.



그런데 그 기둥이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그것도 다른 기둥이 아닌, 빛의 용들의 구역의 상징이자 그들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빛의 기둥이 말이다.



거처 밖의 넓은 공터는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주변 동굴과 바위 틈새에 흩어져 쉬고 있던 어둠의 용들이 하나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꼬리를 불안하게 털어댔다. 충격과 온갖 의문이 뒤섞인 날카로운 속삭임과 수군거림이 거친 해일처럼 어둠의 용들의 구역 전체로 빠르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비틀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거처 밖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요동치며 가슴을 세차게 때려댔다.



그때, 어둠의 용들의 구역을 총괄하고 다스리는 거대한 지도자 용이 묵직하고 위압적인 날갯짓 소리를 내며 상공에서 거칠게 내려앉았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내뿜는 기운은 공터의 시끄러운 소란을 단숨에 가라앉혔다. 지도자는 사나운 눈빛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순찰대 두 마리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짓이냐. 결계의 흔적은 어떻게 되어 있지? 빛의 용들의 수작이더냐, 아니면 다른 구역의 소행이더냐. 상세히 고하라."


낮고 거칠게 깔린 목소리가 공터 전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질문을 받은 순찰대원은 목덜미의 비늘을 바짝 세운 채,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적이…… 아예 남아있지 않습니다. 공격을 가한 마력의 잔해도, 침입자의 흔적이나 냄새도 전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둥 자체가 안쪽에서부터 처참하게 균열이 가며 스스로 으스러진 것처럼, 그렇게 끔찍하게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지도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흔적이 아예 없다는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일으킨 자가 흔적을 지울 만큼 상상 이상의 힘을 가졌거나, 혹은 빛의 용들의 구역 내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뜻이었다. 지도자는 한참 동안 어두운 눈을 굴리며 침묵하더니, 거대한 날개를 크게 넓히며 주변의 정예 어둠의 용들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지목했다.


"너희 둘, 그리고 제1순찰대원들은 나와 함께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간다.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다른 구역의 원로들이 개입했는지 밝혀내야 한다. 경계를 강화하라!"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덩치 큰 정예 어둠의 용들이 호출되었고, 지도자를 선두로 한 총 일곱 마리의 어둠의 용들이 거친 바람을 사방으로 일으키며 먹구름 같은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들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뒤, 남겨진 공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른 어둠의 용들은 이 유례없는 사태가 다른 구역과의 전면전을 뜻하는 서막인지, 혹은 세계가 멸망하려는 징조인지 목청을 높여 토론하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린 어둠의 용들은 난생처음 마주하는 거대한 규모의 불안감과 어른들의 살벌한 기세에 겁을 먹고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꼬리를 바짝 감아쥐었다.



시끄럽게 폭발하는 소음 속에서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백룡.



그 하얗고 거만하던 아이의 얼굴이 불쑥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빛의 용들의 구역의 상징인 기둥이 부서졌다. 그렇다면 그 빛의 용들의 구역에서 '빛의 후계자'라는 거창하고 끔찍한 족쇄를 차고 인형처럼 서 있던 백룡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가식적이고 고결한 척하던 원로들이, 빛의 기둥이 손상된 책임을 어린 백룡에게 묻고 억압하지는 않았을까. 그 가냘픈 비늘 위로 더 무서운 정화 마법을 쏘아대며 아이를 고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가혹한 지옥 속에 갇혀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백룡을 걱정하는 스스로가 지독하게 가증스럽고 짜증이 나면서도, 요동치는 심장은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며 진정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 그 잘난 빛의 용들의 구역의 공주님이 알아서 잘 대접받고 있겠지.



애써 혼잣말을 짓씹으며 어지러운 머리를 앞발로 감싸 쥐었다. 결국 나는 밖의 혼란을 피하듯 서둘러 둥지 안으로 몸을 피했다. 외부의 소란을 차단하듯 둥지 구석으로 기어 들어가 상처 입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다시 눅눅하고 서늘한 마른 잎 위에 누웠지만, 눈은 번쩍 뜨인 채 어둠 속을 헤맸다. 굳게 닫힌 거처의 입구 너머로 어둠의 용들의 구역을 거칠게 흔드는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울부짖었다. 세상이 송두리째 뒤틀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지독한 가시를 품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폭하게 헤집어 놓았다.



단 한 번도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지 않았던 백룡의 차가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거울처럼 아른거려, 나는 결국 어두운 밤이 방 안을 완전히 삼킬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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