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핥고 지나갔다. 토사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증발하면서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끄으응...
토사프는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긴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모닥불이었다. 눈동자를 약간 위로 들자 밤하는 한가득 별이 보였다. 하지만 시야가 선명하지 않았다. 기절했다가 막 정신을 차려서 그런지 사물이 뿌옇고 혼탁했다.
토사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곤 다시 크게 떴다. 이렇게 하면 선명한 별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저 하이랜더가 뒤척거리는데?"
"벌써 깨어났어?"
"그러게. 하이랜더는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가봐. 티아라님의 찌르기를 당하고도 한 시간 만에 깨어나다니... 나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구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 토사프의 뇌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특히 '티아라'라는 이름이 비수처럼 뇌리에 콱 박혔다.
티아라!
그녀는 한때 우고트 왕국의 플루토나이트 집단인 호부를 이끌던 호부의 총수였다. 별명은 차가운 외모와 성격에 딱 알맞은 얼음호랑이.
헌데 놀랍게도 티아라는 12년 전쟁이 한창일 무렵 우고트를 배신하고 흡혈왕에게 투항했다. 그런 다음, 케라닉을 보좌하는 군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 활약했다.
사람들은 티아라를 배신자라고 욕했다.
물론 감히 티아라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티아라는 아주 무서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북해에 잠긴 빙산보다 더 차갑고 날카롭다고 했다.
티아라가 자신의 플루토인 '글래시어(Glacier; 빙하)'를 소환해서 날뛰기 시작하면 피비린내가 수십 킬로미터 밖까지 진동한다는 풍문도 나돌 정도였다.
토사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뿔싸, 내가 흡혈왕 무리에게 포로로 잡혔나 보구나!'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끄으응...."
토사프는 짐짓 이마를 손으로 움켜쥐며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남몰래 탈출방법을 강구했다.
'어떻게 하지? 인질을 잡고 탈출을 해야 되나? ... 그래, 인질을 잡아야 탈출에 성공할 확률이 높을게야.'
토사프는 침착하게 마나를 모았다. 몰래 마법을 준비해 놓았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인질을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마나가 모이자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토사프가 막 마법을 난사하려는 순간.
빠악-!!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작렬했다.
"크허억-"
막 탈출을 감행하려던 토사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마나홀이 뒤흔들리고 호흡이 끊겼다. 피가 역류하면서 혈관이 뒤틀렸다. 뇌에 공급되던 산소가 갑작스레 차단된 탓에 정신이 가물가물 흐렸다. 세상이 잠시 깜깜했다.
토사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웬 여인이 그를 불렀다.
"깨어났으면 이리 와 봐."
여인의 목소리는 오만했다. 그리고 동시에 살 떨릴 만큼 살기가 어렸다.
토사프는 여인이 내린 명령을 홀린 듯이 받들었다. 비틀비틀 기어서 그녀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스윽.
여인은 기다란 속눈썹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며 토사프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하이랜드 왕국의 대표냐?"
토사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첫번째 이유는 예상치 못한 기습 때문이요, 둘째는 눈 앞의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약해보이거나 남자의 보호본능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름다우나 강해보이고,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이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토사프의 영혼을 흐물흐물 녹였다.
토사프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여인이 다시 물었다.
"대답해라. 네가 하이랜드 왕국의 대표냐?"
끄덕끄덕.
토사프는 입을 열어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메어 소리가 일순간 나오지가 않았다.
"하이랜더 장로들이 왜 너를 여기로 보냈지?"
"그건..."
토사프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여인이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말 안 해도 알아. 케라닉 님을 뵈러 왔지? 케라닉 님이 왜 하이랜드 쪽으로 이동중이신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게야. 그렇지?"
"맞습니다."
"이유가 알고 싶으냐?"
"네?"
"바하문트 님께서 왜 북쪽으로 향하시는지 이유가 궁금하냔말이다."
"궁금합니다."
토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임무마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만약 케라닉 님의 뜻이 전쟁에 있다면 어쩔 셈이냐?"
"전쟁!"
토사프의 목구멍을 비집고 비명이 터졌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전쟁은 절대로 안된다. 흡혈왕과 하이랜드 왕국의 전력 차이는 극심하다. 둘 사이에 싸움이 붙는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다.
토사프의 놀란 모습이 재미있다고 여겼을까? 여인은 긴 속눈썹을 슬쩍 내리깔며 좀 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토사프는 급박한 마음에 저절로 허리가 90도로 숙여졌다. 전쟁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허리를 잡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호호호, 호호호호!"
그리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열쇠를 가지고 왔다."
"ㄴ..네?"
토사프는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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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제왕에서 흡혈왕으로 바꿨습니다. 네 자 쓰는 것 보다 세 자가 낫더라고요. ㅋㅋ 그리고 후에 가면 흡혈의 권능이란 것이 나오는데, 흡혈왕이라는 칭호가 나을 것 같아 바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