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Ⅶ
“하아……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난 삽으로 땅을 파다 중얼거렸다. 땅을 판다라는 생소한 동작을 하게 된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땅을 팠던 게…… 아마 몇백 년 전이었나. 그땐 그래도 그냥 손으로 팠었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던 난 고개를 들었다.
오늘 새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참호가 아르네스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왜 고작 이런 걸 나한테 시킨 거지. 난 속으로 물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몬스터 제거나 뭐 그런 거 시킬 줄 알았건만……”
내가 입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손은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흙을 퍼냈다. 난 잠시 주변을 바라보며 내 작업의 결과물을 감상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지켜보던 마을 이장은 내게서 삽을 받아들며 굽신거렸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일을 다 끝내셨을까……. 저, 힘드실 텐데 뭐라도 좀 드시는 게…….”
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어 보이지 않겠지만) 거절했다. 그는 내가 아무 호의도 받지 않고 아침부터 계속 혼자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전부 거절하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었죠?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의 일과가 마무리 지어졌음을 확인한 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마을 어귀에 있는 집에서 한 꼬마가 나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꽃?”
난 의아한 얼굴로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주는 거야?”
꼬마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손에 쥐어진 들꽃 한 송이를 지긋이 바라보던 난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러자 그 아이는 환하게 웃더니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자리에 남겨진 난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호의, 인가. 속으로 중얼거린 난 걸음을 재촉했다.
⨝
“……그래서 그 꼬맹이가 이걸 줬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 앉은 아오라는 밝게 웃었다.
“와아, 진짜? 이거 꽃병에 꽂아놔야겠다!”
아오라는 작고 아담한 병을 찾아와 물을 조금 채운 뒤 내가 꼬마에게 받은 들꽃 몇 송이를 그 안에 꽂아서 식탁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내가 입을 열자 앞치마를 입던 아오라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 일하다가 잠깐 가면을 벗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왔어. 이건 뭘까?”
내 말에 아오라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쳐 갔다. 그는 다시 내 앞에 앉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 어떤 사람들? 많이?”
“어어…… 그냥 마을 여자들? 수는 한…… 스무 명 좀 넘었던 것 같은데…….”
난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잠깐 와서 목이라도 축이라는 둥, 저녁 먹고 가라는 둥, 대충 그러던데?”
아오라는 심각하게 말했다. 왜 그러지?
“다크닉스, 앞으로는 가면 벗지 마. 이거 원, 임자 있는 사람, 아니 아니 용이라고 머리에 써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임자가 있다고? 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 아냐, 됐어. 어쨌든, 앞으로는 절대 사람들 많은 곳에서 가면 벗지 마, 알겠지?”
아오라는 내 볼을 꾸욱 누르며 이렇게 당부했다. “손 떼라.” 아…… 이거 설마? 난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턱을 괴고 도발했다.
“왜, 누가 나 뺏어가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오라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ㅁ, 뭐어? 질투우? 누가, 내가?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다크닉스는 바보야! 멍청이!”
옳거니, 맞구나. 난 씩 웃으며 받아쳤다.
“얼굴을 그렇게 잔뜩 붉히고 씩씩거리면서 말하면 하나도 설득력 없거든? 너, 누가 나 뺏어가면 어쩔래?”
조금만 더 놀려볼까. 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다크닉스를 뺏어가면…… 뺏어가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던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오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지만, 그녀는 그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당황한 난 어쩔 줄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 품에 안겨들어 왔다. 이런, 장난이 너무 심했나. 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우으으…… 다크닉스…… 진짜로 나 말고 그 여자가 더 좋은 거야?”
난 헛웃음을 지었다. 얘는 어디까지 상상하고 있는 거야?
“바보. 내가 너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예쁜 얼굴 상한다.”
이렇게 아오라를 다독거린 난 작게 중얼거렸다.
“뭐…… 울어도 예쁘지만, 넌 웃을 때 더 예쁘니까…….”
“다 들리거든!”
이런. 난 움찔했지만 내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내가 아오라를 살살 달래도 아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읏? 아오라, 이게 갑자기 무슨……”
“정말로…… 내가 제일 좋은 거지?”
난 피식 웃고 그녀를 의자에 앉힌 후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당연하지. 네가 내 전부인 걸.”
이렇게 말한 난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한 아오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다크닉스가 준비되면 사랑한다고 해줄 거지? 그렇지?”
아오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내 손길이 잠시 멈췄다. 너는 그 말을, 아니 그 말 뒤에 숨은 내 마을을 이렇게나 갈망하는구나.
“당연하지. 꼭 그렇게 될 거야. 약속.”
난 이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했다.
“이건 도장이야. 그러니까 절대 약속 어기면 안 돼, 알겠지?”
“응? 도장이라니 그게 무슨 뜻-”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약속했다.
“절대 어기지 않을게. 절대로.”